판타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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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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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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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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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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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6화 의중

DUMMY

#


"나쁜 개새끼들... %$@@...."


샤샤는 시종 정신 나간사람처럼 울다가 웃다가 욕하다가 또 낯선 외국어 같은 소리들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리곤 갑자기 뿌리치듯이 팔 다리를 휘둘러댔는데 한쪽 다리가 운전석 등받이를 걷어차면서 운전하던 선태가 깜짝 놀래서 움찔했다.


"어이쿠, 힘이 장사네. 그나저나 무슨 욕을 저렇게 푸지게 해..... 저게 지금 취해서 저러는 거지?"

"글쎄요. 본래도 욕은 잘하던 걸요. 음... 술냄새는 안 나니까,... 취했다면 아마도 무슨 약에 취한 거 같아요.."


이번에는 옆에 앉아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리던 우진이 샤샤가 휘두른 팔꿈치에 턱언저리를 얻어 맞는다. 룸미러로 뒷자리를 흘끔거리던 선태가 조금 통쾌하다는 듯이 히죽거린다. 그러다 잠깐, 좀 전에 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라 물었다.


"본래....? 두 사람 구면인가?"

"네,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긴 한데, 그건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그나저나 여기 이 사람이 연예인이라는 말씀이죠?"

"글쎄, 엄밀히 따지면... 준연예인쯤 될려나? 요즘은 하도 외국인들이 유튜버로 활약들을 많이 하니까... 공중파 한두 번 탔다고 모두 연예인이라고 해주기도 좀 그렇지?"

"아... 그렇군요... "


고개를 끄덕이던 우진이 문득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해본다. 국적이나 경력, 나이 등 제대로 된 프로필 하나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궁금해하는 사람이 제법 있는지 '샤샤'를 치면 '샤샤 나이'가 자동으로 먼저 검색이 되었다. 혹시나 해서 들어가보면 대부분 낚시글. 그 외에는 고작 몇 명의 극성분자들이 올려놓은 광고 이미지 정도가 여기저기 돌고 있었다.

그때 샤샤가 가뿐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리다가 우진의 폰에 자기 사진이 둥실 떠있는 걸 보고 꺌꺌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샤샤 나이? 왜? 뭐? 너네는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한 건데.... 알려줘? 알려줘?"


우진이 조금 억울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샤샤가 계속해서 약을 올렸다.


"키도 궁금하지? 몸무게? 바스트? 웨스트? 궁금해? 다 알려줘?"


선태는 자못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계속 룸미러를 흘끔거리고, 우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샤샤를 스윽 훑어보는 시늉을 한다.


"그 정도는 그냥 봐도 알아... "

"오~..... 보기보다 허세 왕 쩌는데..."

"보기보다? 날 어떻게 봤길래...?"

"너는 그러니까.....음, 넌 말야.... 머랄까 지루하고 꽉 막히고.... 그리고 또....."

"그래, 그건 됐고..... 너 채동식 알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선태가 핸들을 삐끗 움직였다. 샤샤도 순간 표정이 변했다. 그리곤 눈빛이 점차 싸늘해지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그리고는 예의 그 낯선 언어로 뭐라 뭐라 한참 이야기를 했다. 선태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전화기를 가리켰다.


"지금부터는 전부 녹음해 두는 게 좋겠네."


우진이 들고 있던 폰의 녹음 기능을 찾고 있는 중에 선태가 연달아 이것저것 떠오르는 질문을 해댔다.


"샤샤, 채동식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글고 혜원인 어디 있지?"


혜원의 이름까지 튀어나오자 일순간 우진과 샤샤가 같이 얼어붙었다. 우진은 뜻밖의 인물이 언급된 의도를 몰라 그랬던 거지만 샤샤는 충격을 받았는지 갑자기 아까 모텔 앞에서처럼 경기를 일으키듯이 발작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연이어 자해를 하듯이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미친듯이 긁어댔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선명하게 핏기가 돋았다.

선태는 놀라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우진이 샤샤의 다친 손가락을 신경 쓰면서 양쪽 팔목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자 상체를 들썩거리며 버둥거리던 샤샤가 차창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 뒤 혼절해 버렸다. 우진이 샤샤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선태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건 그냥 한번 던져본 건데....."


우진이 실신한 샤샤를 바라보며 어떡하나 우진이 고민 중일 때 마침 강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간략히 상황을 전해 들은 강주는 동물병원 홍씨에게 연락을 취해 방문해도 좋다는 승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신라동물병원으로 막 출발하려는 순간, 샤샤가 깨어났다, 마치 한숨 잘 자다가 깬 사람처럼 기지개까지 켜면서.



#


신세계 미술학원 건물 아래, 선태의 차가 도착했다. 꼬불꼬불하고 복잡한 길이었지만 고비마다 샤샤가 손가락짓으로 알려주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었다.


"무슨 약인지 정말 특이하군. 그 와중에 묻는 건 곧잘 대답하네."

"저도 잘 모르지만 암페타민과 유사한 일종 아닐까요..."

"대체 누가 저런 약을 먹인 거야."

"어쩌면 우리랑 비슷한 이유일지도...."

"뭐? 설마....?"

"그것보다 저런 걸 먹이곤 그대로 거리로 내보낸 이유는 뭘까요."


우진의 얘기를 듣고 별안간 섬뜩해진 선태가 백미러로 몇 번이나 뒤를 살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우진이 차에서 내려 미술학원 건물을 바다보다가 CCTV가 설치되어 있을 만한 곳들을 둘러보더니 주변 건물들을 일일이 폰으로 찍어 사진으로 남겼다.

선태로서는 그런 게 도무지 어떤 곳에 소용이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좌우지간 채동식의 장성한 아들이 모든 걸 앞장서서 주도해주니 너무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울 따름이었다. 잠복하고 미행하고... 한 달 가량 별 소득도 없이 혼자 탐정 흉내를 내던 쓸쓸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선태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샤샤가 채동식과는 무언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혜원의 잠적까지 함께 연관되어 있을 줄은 미처 상상치 못했던 터라 어쩌면 이번에 꽤 큰 특종을 건질 수도 있겠다 싶은 데까지 생각이 이르니 기대감에 모처럼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샤샤가 선태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사감의 감시망을 피해 기숙사에 숨어드는 장난기 많은 불량소녀마냥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조용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에 장단이라도 맞추듯이 두 사람은 조심조심 샤샤를 따라 어두운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


계단을 올라가는 샤샤의 걸음걸이를 보면서 우진은 샤샤가 어느 정도 약에서 깬 상태라는 것을 눈치챘다. 4층에 도착하자 샤샤는 체념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가만히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준 인수는 뜻밖의 이방인들이 머쓱할 정도로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최선을 다해 평정심을 찾은 후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샤샤는 여유만만한 안주인 같은 표정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팩에 든 음료 같은 것을 꺼내 두 사람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자아, 두 분은 이거라도 먹으면서 얌전히 기다려 주세요. 원하면 저기 바나나를 먹어도 좋아요.... 나는 인수랑 잠깐 이야기를 할 거야."


샤샤는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인수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고 원장실로 들어갔다. 우진은 창가에 서서 길거리와 인근 건물들을 살피듯이 둘러보고 있다. 선태가 두유에 빨대를 꼽아 한 모금 마신 후 발걸음을 옮기며 신기한 듯 실내를 둘러보다가 혼잣말을 한다.


'흠... 이거 진짜 점점 수상해지는군."


조소실 앞에 이른 선태가 몇 걸음 걷다가 헉, 하고 기겁을 한다. 어두운 유리 안쪽으로 바짝 다가붙어 있는 여러 개의 눈들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예지와 유라가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


네 사람이 테이블도 없어 어색하게 둘러앉았다. 성한 의자가 몇개 없어서 선태만 등받이 있는 나무 의자에 앉고 인수와 우진은 플라스틱 박스 같은 것을 엎어 놓고 앉았다. 샤샤는 머리가 아픈지 너덜너덜한 쇼파에 앉아 머리를 한껏 제끼고 있다. 우진은 배가 고픈지 바나나를 하나 집어들었다.

인수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려는 신호다. 며칠 면도도 안했는지 턱밑이 가뭇가뭇한데다 피곤한 듯 안색도 꾀죄죄했다.


"다들 피곤할 듯하니, 서로 용건만 말하지요. 그 전에 먼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유가 뭐죠? 채동식을 찾는 이유.... 아, 아니지... 굳이 죽은 사람의 뒤를 캐는 이유... 아니 다시 묻죠. 우리에게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찾는 이유?"


선태가 습관처럼 주섬주섬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인수에게 건넸다. 인수가 명함을 앞 뒤로 살펴본 후 그래서?라는 표정을 지었다. 선태는 틈만 나면 우진의 표정을 살핀다. 우진은 바나나를 두 개째 먹고 있다. 선태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직업을 떠나서 채동식과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좀 있어요. 난 그의 죽음에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인수는 별 표정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여전히 그래서 뭐 어쩌라구?하는 느낌이다. 우진은 계속 강 건너 불구경하는 표정으로 바나나만 씹고 있다. 선태가 약간 조바심이 생긴 듯 말의 높낮이가 들쑥날쑥해지기 시작했다.


"채동식이 사망 직전에 내게 어떤 문자들을 보냈는데, 마치 어떤 긴박한 메시지를 전해주려는 듯이...."


그제서야 샤샤도 약간 관심을 보이며 상체를 움직였다. 인수는 아직까지 표정에 별 변화가 없다. 선태는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도 좋은지 몰라 또 다시 우진이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까지 저희 질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네요. 그게 도대체 저희랑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대체 왜 우리를 미행하는 거죠?"


선태가 숨을 깊이 내쉬면서 전화기를 꺼내 사진 파일에서 사진 한 장을 골라 인수에게 내밀었다. 횡단보도에서 회색 벤에 오르다가 찍힌 사진이다.


"이거, 본인 맞나요?"


인수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샤샤가 몸을 일으켜 무슨 사진인가 보려다가 인수가 금방 선태에게 돌려주느라 미처 보지 못한다. 인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훗, 아무리 봐도 저군요. 근데요? 그 사진이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됩니까?

"뭔데? 무슨 사진이야."


샤샤가 벌떡 일어나 선태의 전화기를 뺏어 들었다. 그리곤 여러가지 파일 안에서 어떤 건지 혼자 찾지를 못해 한참을 꿍시렁거린다. 우진이 보다 못해 폰을 빼앗아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사진을 확인하더니 샤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뭐야, 이 아저씨 언제부터 인수를 미행한 거야."

"저 차는 본인의 차가 맞습니까?"


선태가 인수의 표정을 살피면서 다시 질문했다. 샤샤가 사진을 보고 난 후부터 확실히 인수도 표정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사촌 꺼예요."

"응? 인수 사촌? 여기 한국에 사촌이 있었어?"

"샤샤, 나중에....."

"헌데 그 사촌분은 무슨 일 때문에 일주일에 두어 번씩...."

"왜 우리 오빠만 괴롭혀!!"


선태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조소실에서 예지가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왔다. 그리곤 인수의 옆으로 다가와 방어하듯이 목을 감싸 안았다. 인수가 아무일 아니라면서 예지를 토닥이며 달랬다. 샤샤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보고 있는데 우진이 슬쩍 입을 열었다.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다.


"미행이니 뭐니 몇 가지 섣부른 행동들은 명백히 우리 잘못입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실낱 같은 단서를 쫓아 움직일 때마다 그쪽 분들이 등장하니 정황상 그냥 지나칠 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솔직히 좀 많이 불쾌하군요."

"죄송합니다. 당연히 그러실테죠. 그래서 저희도 어설프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의도치 않게 폐를 끼치느니 앞으론 기관이나 경찰쪽에 모든 걸 의뢰할 생각입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샤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안돼!! 샤샤가 경찰은 안된다고 했자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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