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 너머로
“감히! 감히!”
죽순의 지배자인 대형 팬더의 등에서 피분수가 쏟아짐과 동시에 밀러의 온 몸은 붉은색의 피로 온몸이 물들었다.
거대한 체구인만큼 상처가 벌어질수록 피의 분수는 더욱 커져만 갔다.
“네 놈들!”
그러나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지배자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동안 오직 거대한 덩치만으로 숲을 지배한 것은 아니기에 불길이 다시금 온 몸을 뒤덮고 밀러는 서둘러 지배자의 등에서부터 떨어졌다.
구오오오오!
포효와 함께 불꽃이 숲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이런......”
“이 정도만 해도 큰 타격이다. 물러나는 편이 좋다.”
성현의 냉정한 분석이었다. 아무리 일대에서 압도적인 무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이후에는 다른 지배자들이나 그를 견제하는 이들에게 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러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으나, 밀러와 캐스의 생각은 그와 반대였다.
“안 돼. 지금 물러났다가는 오히려 기회를 주는 셈이다.”
경험에 의거한 판단이었다. 숲 곳곳에 기거하는 이들은 성현의 생각대로 지배자의 자리를 시시탐탐 노리고 있기는 했지만 실패했다가는 오히려 마을까지 궤멸될 수 있었다.
아무리 마을을 떠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지만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밀러와 캐스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내 네놈들을 반드시 죽여주마!”
불길이 더욱 거세지고 죽순의 숲에 붙었던 불길이 더욱 거세진다.
“숲의 상태는 상관 없어. 당장 해치운다!”
“좋은 화살도 구했어.”
밀러는 불길이 약해지는 틈을 노려 계속해서 접근해 쌍곡도로 휘둘렀고, 캐스는 지배자가 날린 죽순더미를 화살로 사용하여 지배자에게 지속적인 데미지를 주었다.
‘녀석들 모두 판단력을 잃었다.’
생존하여 숲을 나가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능력치에 반해 기술이나 판단력은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때문에 성현이 내린 판단은
‘밀러와 캐스 그리고 지배자까지. 모두 죽인다.’
이미 소모된 두 그룹의 공방은 얼마가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밀러와 캐스의 마을을 향한 집착은 굳이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명줄을 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동행하는 성현도 그 명줄에 위협이 된다면 애초에 삼대국이 패권을 다투는 대륙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벗어난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Assasinate – 암행(暗行)
성현의 몸이 그림자가 되어 숲 곳곳에 번져나가는 불길을 피해가고, 급기야 지배자의 지척까지 도착한다.
“또 네놈이냐!”
입에서 사출되는 불길이 휘감긴 죽순들이 성현을 노리지만 통할 리가 만무했다. 허무하게 그림자를 통과해버린 죽순.
그림자가 서서히 벗겨지자, 그의 장검이 크게 휘둘러진다.
Assasinate-살의(殺意)
어떠한 불필요한 감정이 담기지 않은 순수한 살의가 그림자가 되어 검을 옭아매고 내질러진 검이 깊은 상흔을 남겼다.
장검을 따라 새겨진 상흔을 타고 그림자가 분리되어 침투한다.
“비전암술”
영폭(影爆)
검황국 닌자부대에 대대로 내려지는 암술의 비기 영폭이 그의 검격의 신호에 맞춰 지배자의 상처를 더욱 찢어발겼다.
스며든 그림자 하나하나가 폭발하며 상처를 헤집고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내자, 거구의 몸에 붙은 불길이 서서히 꺼져간다.
이는 지배자의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뜻했으며, 밀러와 캐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우오오오오오!”
밀러의 쌍곡도가 주춤해진 불길 사이사이를 틈타 상처를 헤집고 새로운 자상을 입히면, 캐스가 쏘아낸 죽순 화살이 두꺼운 가죽 너머의 상처에 깊은 상처를 새롭게 새겼다.
쿠웅
지배자의 불꽃같이 타오르던 동공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이내 생기가 사라지자, 거대한 몸이 바닥에 떨어져 굉음을 내었다.
“해냈다.”
“하아....... 우리가 지배자를 잡다니. 이건......”
기쁨에 취해 바닥에 쓰러진 둘이었지만 주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불길이 죽림부터 타이게르의 숲까지 옮겨붙어 거대한 화마가 주변에 가득했다.
“........”
“아재. 부탁이 있어.”
성현만이 멀쩡한 상황. 밀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현을 보고 입을 여는 것이 고작이었다.
“말해라.”
“캐스만큼은 같이 데려가줬으면 좋겠어.”
“....알고 있었나?”
“아재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해되지 않아서 힘을 아꼈겠지. 그래도 말이야. 그 잡스러운 마을에서도 나름 정이 있고, 아씨 모르겠네. 아무튼 조금 거시기 하거든.”
은혜나 정 따위의 것들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이 상황에서 말로 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밀러는 대충 뭉뚱그렸다.
“아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이렇게 무리하게 나서는 것을 좋게 보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이유는 그렇고, 캐스는....... 아재랑 똑같아. 이 숲을 벗어나서 남편을 찾겠다고 했거든.”
그것이 데려갈 이유는 되지 않았으나, 숲을 벗어나는 일이 장기적인 계획이 되었을 경우 한 명의 유무는 꽤나 컸다.
심지어 일행이 자신을 포함한 셋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이렇게 번져버린 불길 속에서 남은 힘을 쥐어짜내어 벗어날 수 있으려면 한 명이 최대였다.
“이 개새끼가! 듣자듣자 하니까. 너 살 생각 없어?”
캐스 또한 밀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상황은 밀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력을 다한 나머지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고, 바닥에 드러누워 소리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한 성현이 자신들을 버릴 생각으로 처음부터 힘을 아꼈다는 사실도 그녀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깟 녀석 알아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하하하. 나한테 반해봤자, 애초에 사는 국가도 다르고, 무리야.”
“무슨 개소리를!”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 작금의 상황에서는 전혀 맞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기에 이런 핑크빛 기류가 도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럼 부탁할게 아재.”
“.......받아들이지.”
“시발! 개새끼야! 너!”
점점 거세지는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대나무가 차례대로 쓰러지기 시작하며, 곧이어 밀러를 향해 쓰러졌다.
“아재! 놔! 시발! 죽어도 같이 죽을 거야!”
“숲에서 나간 다음이면 상관없다. 일단 도리상 구해주마.”
성현은 그런 캐스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캐스를 팔에 끼운채로 그림자로 변하여 불길 속을 달려 벗어난다. 결국 밀러가 대나무에 깔려 불타 죽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도 하지 못하고 캐스는 의식을 잃었다.
“그래. 네 놈이 전쟁을 끝낸 영웅이라지?”
프로스트의 앞에는 검황국의 황제이자, 이제는 리한나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쉔롱이 황좌에 앉아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웅이라....... 그렇다고 해두지.”
“.......”
프로스트는 주변에 자리 잡은 초점 없는 랭커들을 보면서 황제에게 대답했다. 이곳까지 온 이유는 둘째치고서라도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있는 황성임에도 느껴지는 비인간적인 무언가. 굳이 따지자면 위화감 때문에 그는 쉽사리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바가 있는가?”
“저번에 과학국의 사절을 무참히 살해했다더군.”
“그렇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머지 짐이 친히 죽여주었지. 크히히히히히. 참으로 아름다운 비명이었어.”
리한나의 꼭두각시라고는 하지만 평소의 행실과 말투는 쉔롱이 평소에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저들이 살아왔던 세상의 기준에서 그의 행실과 사상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됐고. 평화협정을 거부하는 이유라도 있나?”
삼국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인 것은 분명했다. 모두가 피폐해졌고, 국력의 근간이 되는 국민들이 세 국가 모두 무참히 죽어나간 상태였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면 적어도 30년 이상은 족히 걸릴 것이 분명한 상황. 때문에 프로스트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과학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평화협정이라는 명목으로 검황국의 황성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이유라....... 대충 그대가 생각하는 것 그대로라고 말하고 싶군. 짐의 생각을 감히 헤아려 보게끔 허락하지.”
오만. 그러나 그에게는 그리 대답할만한 근거가 있었다. 가장 피해가 적은 국가였고, 4의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랭커들과 유저들조차도 현재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저들은 더 이상 의 무언가를 할 생각이 없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 랭커들의 상당수가 그의, 사실상 리한나의 휘하로 있는 한 검황국이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면 받아들일 생각이지?”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프로스트는 물었다. 자신의 옆에는 현재 희령과 사령, 로베르타까지 있어,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온전히 몸을 빼낼 자신이 있었다.
“흐음. 그래. 최근 휘하로 있던 닌자부대의 장(長)이 짐의 허락도 없이 이곳을 떠난 상황이다.”
“성현인가?”
“호오, 역시 알고 있군.”
“그래서? 그를 찾아서 데려오라는 이야기인가?”
“아니지. 짐을 이렇게 정신적으로 괴롭게 만들었으니 백 번 죽어야 마땅하지 않겠나?”
일그러진 웃음을 짓는 쉔롱. 그의 목적은 단순했다. 성현을 찾아 죽이는 것. 다만, 그것은 반드시 프로스트가 해야만 한다는 조건이었다.
“우선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없는 틈을 노려서 너희가 전쟁을 벌인다면 그것도 문제야.”
성현을 죽이는 것은 탐탁지 않았지만 원한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이전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닌자들이 노렸다는 사실은 분명했으니까.
“짐이 황제인 이상 이 이상 전쟁은 없음을 공표하도록 하지.”
“.......”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프로스트는 거절을 하려했지만 그 변명조차도 쉔롱은 손쉽게 부숴버렸다.
“과학국 해안에서 남동쪽으로 가다보면 또 다른 대륙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검황국의 황제인 이 몸이 말을 번복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정 뭣하다면 그래. 마력을 사용한 계약서를 작성하면 믿어주겠지.”
프로스트가 평화를 책임져야할 의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람들까지 져버릴 수는 없었다.
- 작가의말
근 1주인 만에 인사드립니다. 꾸벅!!! 기다려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아아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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