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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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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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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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DUMMY

“제가 모르는 소식이 또 있는 건가요?”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라 방황하던 도진은 결국에 차례로 타인들의 얼굴을 훑으며 물었다. 그가 갑자기 대화의 막대한 비중을 가로챈 것에 대해 누구도 지적하지 않아 보였다.


“내가 황호를 만났거든.”


흑석이 도진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그가 잠든 사이에 모두가 전해 들은 이야기를 막 반복하려는 시점이었다.


“죽을 위기에 놓였던 거라고 말해야 정확하겠지만. 그렇게 벌써부터 표정을 굳히지 말고 들어. 어차피 너희도 나와 비슷한 정도의 일을 겪은 것이니까. 너희가 운 좋게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나도 그저 운이 좋았던 거야. 아니, 운이 좋았다고 하는 건 틀린 표현이겠지.”


흑석이 탁자 위로 올린 두 손으로 깍지를 끼며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모두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이미 무언지 아는 것처럼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였다. 도진은 점점 초조해지는 박동에 기대어 저 역시 그런 흉내를 내며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황호가 우리를 고의로 살린 것일 테니까. 변명의 여지도 없이, 그렇지만 아주 은밀하게. 나는 내가 불행하게도 첫 번째로 당한 줄 알았는데 정말로 첫 번째가 맞았어.”

“첫 번째라니요?”


도진이 들썽거리는 마음을 전부 감추지 못하고 질문했다.


“너희는 어제 저녁, 밤이 되기 전인 저녁 무렵에 바다에 휩쓸려 빠졌다다고 들었어. 물론 태강이 하는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겠지만 야담과 달목도 그렇게 증언했으니 그게 정확하겠지.”


뒤쪽에서 태강이 못마땅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도진이 앉은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나 누구도 그 눈빛에 반응하지는 않았다.


“저희는 우선 훔친 책을 당분간 가지고 있겠단 부탁을 전하러 책이 있던 서점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네가 밖에서 자고 있었을 이전에 들었어. 하지만 책은 빼앗겼잖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쉬워해서는 안 되겠지. 내가 볼 때 황호는 우리를 살린 대신에 그 실패를 대신할 다른 물건이 필요했던 거야. 아무튼 너희가 자정을 넘겨서 심연도에 이르렀던 것과 다르게 나는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내가 갇힌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 너희 네 명보다도 먼저 습격을 당했는데도 말이야.”


앞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화와 초영의 얼굴이 사뭇 온기를 잃은 듯이 보였다. 흘깃 쳐다보던 도진은 도로 흑석을 마주하며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눈치를 주었다.


“난 땅 밑에 갇혔었거든.”


이것만을 재차 말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지 흑석은 말하는 동시에 눈과 코를 얼룩덜룩하게 찡그렸다.


“혹시라도 만일에 대비해서 천일나무를 대신할 나무가 있는가 싶어서 계속 산을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걸 하려던 거야. 그런데 나무를 관찰하다가 그만 함정에 걸리고 만 거지. 녹수 쪽에서 내 행방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전혀 모르겠네.”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그건 흑석, 네가 생각보다 단순해서야. 네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네가 어느 곳에 있을 거란 걸 우리도 다 알 수 있어. 넌 늘 뭔가 만들 궁리만 하잖니.”


그의 설명이 끝나기를 묵묵히 기다려주던 이들 중 초영이 그것은 짚고 넘어가야 했는지 검지를 곧게 내밀어 흑석을 가리켰다.


“······됐고,”


흑석은 눈을 더 찌푸리면서도 그녀의 지적을 가뿐히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탈출하는 데 좀 오래 걸렸지. 난 숨을 쉬기 힘들어서 원래 더 걸릴 터였는데 황호가 위에서 나를 꺼내주었거든. 내가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지. 그리고 황호가 내게 부탁했어. 월계가 아닌 세계로부터 온 백면의 필적을 받아오라고.”

“백나나 양인 겁니다. 더불어 백나나 양이 위험할 거라고 전했다고 하지요.”


이들 중에서 가장 말수가 없던 달목은 잔잔하게 흑석의 이야기를 거들었다. 따라서 흑석은 그의 부연(敷衍)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 씨가 위험해진 건가요?”


이내 도진이 바로 자신의 심경을 건드리던 부분을 짚었다. 흑석은 대수롭지 않게 그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목숨이 위험한 건 아니야. 자세히 모르지만 그쪽에서도 백나나가 살아 있는 상태여야 한가 본데. 잃어버린 시집과 관련이 있겠지. 원본이 필사본이라며? 그러니 내게 필적을 받아오라고 했던 거겠지.”


건너편에서 주화가 머뭇거리다가 이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며 주목을 끌었다. 약간은 긴장된 모양인지 침을 삼키고는 그녀가 말한다.


“황호는 괜찮아 보였어?”


줄곧, 그동안에 곁에 없던 이들에게 세월은 또 어떤 방향으로 흘렀는지 궁금하였기에 지금의 주제에서 벗어난 소재임을 인지하면서도 그녀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피곤해 보였어.” 흑석이 답했다. “몇 년을 악몽에 시달린 사람처럼 완벽하게 피곤해 보였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드문히 입술을 잘근 깨물며 주화와 다른 방식으로 대화의 방향에 집중하던 초영이 덥썩 얼굴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니?”


실제로 그녀가 몰두해 있던 것은 대화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것은 모두 마찬가지였으므로 초영의 선언은 난데없은 화제 전환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초영.”


야담이 초영이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도록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초영은 고작 한 번 불리었다고 해서 그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한 명은 이미 옛날에 떠났고, 이 시절에 와서는 벌써 두 명이 죽었으니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그러는 이유가 무엇이지?”

“그 두 명이 녹수와 황호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잖아. 홍연은 죽어야만 하는 때에 죽은 것이었고, 그래, 그건 순리적인 죽음이었어. 그리고 천규는······.”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태강의 눈치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일부러 표정을 관리하는 태강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조심스럽게 이어나갔다.


“천규는, 천규는 자신이 선택한 죽음이었어. 그런 면에서 이번 일과 관계가 없는 거잖아.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봐.”


문득 초영은 말을 마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해하기 위해서 야담 네가 먼저 떠난 거 아니었어? 그런데 이러면 분열만 더 일어날 뿐이야.”


다음에는 끝맺음도 없이 돌연히 자리를 떠나 밖으로 사라졌다. 섭섭한 감정이 숱하게 묻어난 그녀의 마지막 문장이 남은 이들의 죄책감을 묘하게 자극했다. 때문인지 누구도 먼저 끊긴 대화의 맥을 이어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도진이 멍하니 탁자 위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안쪽에서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곧 태강이 그의 시야로 들어와 마지막에는 초영처럼 바깥으로 나섰다. 다음에는 달목이었고, 그 다음에는 주화였다.

자신이 언제 일어서야 할지 눈치만 보다가 야담과 둘만 남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 도진은 어떤 말을 꺼내고 나가야 할지 몰라서 두 눈알을 다급하게 굴리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야담이 먼저 일어서서 문을 향해 걸어나왔다.


“나도진.”


그렇게 야담마저 떠나면 자신 역시 일어서려던 도진은 자신을 부르는 야담의 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다소 어리벙벙한 어조로 도진이 대답하자 야담은 등을 보인 자세 그대로 그에게 말했다.


“백나나가 아직 조조이의 집에 있다고 하니 내일 일찍 가보도록 해.”

“···네. 그러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당분간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해도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네가 계속 그 애 옆에 있었으면 한다.”


도진이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좋을지 고민하는 동안에 그는 무미건조한 말 한 마디를 더 남기고 다른 성인들처럼 끝인사 없이 떠났다.


“부탁한다.”


도진은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다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주억거렸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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