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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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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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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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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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화

DUMMY

“이건 기억으로도 읽을 수 없는 사랑이니까.”


그러니까 떠나야만 했다. 기억으로는 달랠 수 없는 슬픔이었기에 기억으로만 남을 수 없는 사랑을 위해서 떠나야만 했다. 남자는 말을 완전히 마치고서 눈을 감았다. 밤이라는 때가 찾아온 것처럼 그는 지그시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오히려 검게 물든 시야에 만족했다. 청청한 어둠을 지게 되면 표면은 도로 하얘질 것이다. 그렇게 때가 되면 눈을 뜨면 된다. 그러면 될 것이다. 그리고 형형색색의 빛이 새하얀 면을 다시 더럽히게 된다면 그때 너의 입술은 예술을 말할 것이다.


“기억으로도 읽을 수 없는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너의 사랑은 어쩌면 초영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의 얼굴을 저 멀리서 내다보듯이 바라보며 태강이 말했다.


“괜찮아.”


남자가 낮게 소곤거렸다.


“어째서?”

“난 이제 누구도 탓하고 싶지 않아졌거든. 게다가 나는 사랑은 과거로 인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직 한순간만을 함께해도 잊을 수 없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는 자신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스스로에게는 늘 더 확실하게 들리는 것에 흡족했다. 가장 비겁해 보이던 짓이 가장 용감한 짓이었으니, 너 또한 최선을 다했겠지.


“누구를 말하는 거야?”


남자의 속마음을 엿듣던 태강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한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명상을 방해했다.


“누구긴, 너를 말하는 거지.”

“나를? 칭찬은 고마운데, 내가 어떤 최선을 다한 건지는 모르겠네. 그리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거짓말은 하지 마.”

“알겠어, 그래 맞아. 천규를 생각하고 있던 거였어. 내가 왜 천우라고 하는 이름을 지었는지 알아?”


이는 확실히 구미를 돋우고도 남아서 이제 모든 주도권이 남자에게로 넘어온 듯이 태강은 두 눈을 반짝였다. 다만 남자가 그를 바라볼 수 없었기에 간절한 심정은 그다지 전해지지 않았다고 해야겠다.


“천규 때문이야?”


태강이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맞아. 참, 말이 나온 김에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까?”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뭔 말장난을 또 치려고 그래?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든가.”


뒷걸음질 치며 태강이 상당한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말장난일 수밖에 없지. 우리의 이름이야말로 장난에 지나지 않잖아.”


남자는 누구도 탓하지 않기로 한 만큼 역시나 자신의 탓도 아니라는 듯이 공공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면 네 이야기는 사절이야. 어차피 그건 네 진짜 이름도 아니잖아. 괜히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지.”


태강이 완강히 거절했다. 그런데 말장난은 이미 시작되었던 건지 남자는 이를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법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고마워.”

“고맙다니, 싫다는데 고맙다고?”

“응. 피곤하다고 대답하진 않았잖아. 그런데 말이야. 태강, 너 시 좋아해?”


나나의 기억에 따르자면 이는 앨리스가 트위들덤과 트위들디를 만나서 말을 걸었을 때 동생인 ‘디’가 덧붙인 인사였다. 다음에 앨리스는 미심쩍은 말투로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디’가 어떤 시를 그녀에게 들려줄지 고민하게 될 것이고, 마침내 형인 ‘덤’이 어떤 시를 들려줄지 대답하게 된다.


“이야기 대신에 시를 낭송할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남자는 ‘덤’에게 그 시를 알려주고자 결심했다.


***


“고개를 좀 더 들어 봐요.”


어둠 속을 차근차근히 파헤치듯이 나나는 예민하게 굴었다. 바짝 긴장한 여명은 눈을 처음 뜬 사람처럼 자꾸만 부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아니, 그는 나나를 위해서 가만히 동작에 갇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토록 어색하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이렇게요?”


자신의 짤막한 표정조차 가늠할 수 없는 가련한 이간이 그 얼굴 전체를 인지하고자 애를 먹는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뇨, 더 옆으로.”


명령조로 지시한 나나는 그것만으로 모자랐는지 모델이 있는 곳까지 달려와 직접 자신이 여명의 머리통을 들고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있던 여명은 작은 움직임에도 퍽 충격을 받았으나, 나나를 위해서 입을 곽 다문 채로 인내하고자 노력했다.


“그나저나 되게 오랜만이에요.”


이제 그녀가 만족할 만한 순간에 멈추었다고 생각한 여명이 약간의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말했다.


“뭐가요?”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아홉을 떨쳐버린 나나가 맥락을 짚지 못한 상태로 대꾸했다. 대답이 어찌나 심드렁했는지, 여명으로서는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에 그리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라고 짐작까지 할 정도였다.


“우리 말이에요.”

“아, 맞아요. 그렇네요.”


기계적인 대답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도 않아서 쉽게 상처를 받을 수도 없었다. 대신에 여명은 위로를 받기 싶은 마음에 잠시 눈을 아래로 떴다. 자신의 옆에 놓인 스킨답서스 화분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잠깐만요. 눈 아래로 뜨시면 어떡해요? 이제 막 그리기 시작해서 얼굴을 잘 관찰해야 한단 말이에요. 좀 그리고 나서는 괜찮아도 지금은 안 돼요.”

“아, 미안해요.”


그런데 나나가 금방 지적하는 통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곧장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겉으로 어떤 움직임도 없었건만, 생각을 바꾼 탓에 모습은 금방 바뀌고 만 것일까.


“그런데 그래도 보기 좋네요.”


게다가 생각은 전혀 제약을 받고 있지 않은지라 나나의 팔이 바삐 움직일 때마다 시시때때로 여명은 다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모습 말이에요?”


나나가 캔버스에 대고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뇨, 지금 모습은 잘 모르죠. 지금 내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거울을 봐야 하는데, 거울도 없잖아요. 나나 씨는 그 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럼 뭐가 보기 좋다는 거예요? 새로운 꽃집?”

“새롭다고 하기에는 꽤 시간이 흘러서 그렇지도 않아요. 나는 여기 매일 있었거든요.”

“그래요? 그럼 도대체 뭐가 보기 좋다는 거예요?”


이젤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나나가 잠깐 모든 것을 멈추었다.


“나나 씨가 그림을 그리는 것 말이에요.”


그런 그녀를 향해 여명은 수고스럽게 손인사까지 건네며 대답했다. 언젠가 나나가 그림을 향한 열정을 무심코 내비쳤던 순간을 목격했던 그는 기쁜 마음으로 한 행동이었다.


“손 들지 마요. 아까 각도 좋았는데!”

“아, 그랬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쓸데없는 인사였다. 이미 그녀가 그 열정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괜히 소심해진 여명이 어깨를 움츠리자 나나는 이번에도 다가와서 자신이 원하는 모양새로 그의 자세를 다듬었다.


“시작이 중요하단 말이에요.”

“왜요? 수정할 수 없는 건가요?”

“아뇨, 수정할 수는 있는데······ 그러니까 수정할 수 있기는 해요.”

“그러면 조금 더 편하게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거든요.”


처음으로 여명이 없는 딴 데로 눈을 돌린 나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왜요?”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사명감만으로 여명이 입술까지 작게 오므리며 그 까닭을 물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요?”


허무한 대답에 긴장이 풀린 탓일까, 그는 곧 등을 살짝 구부리고 말았다. 전체적으로 그의 자세가 다시금 망가진 것이다. 그런데 나나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아니면, 오히려 이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여명이 아닌 다른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내려보았던 화분을 말이다.


“혹시 이것도 따라 하는 게 될까요?”


뜻밖의 질문이 튀어나옴에 놀란 사람은 비단 여명만이 아니었다. 나나 자신도 무척 놀랐기 때문에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을 때, 서로의 형편없어진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뭐, 뭐가 말이에요?”


여명이 제법 익숙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림 말이에요.”


남자는 자신의 실수를 그림 위에 그대로 두었다. 여인의 입술에 번진 것은 그가 의도한 게 아니란 걸 나나는 알고 있었다. 고의성이 느껴지지 않아서 오히려 더 눈에 들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반대로 나는 실수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왜 나는 그 사람을 따라 하고 있는 것만 같을까.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기 때문일까. 분명히 다른 얼굴을, 그래서 다른 사람을 그리고 있는 건데 말이야.


“지금 제가 그림을 따라 그리고 있는 건 아니겠죠?”


나나는 아직 얼굴의 윤곽도 잡히지 않은 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림도, 그리고 자신의 얼굴도 모든 것이 불완전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ㅁ셔서 감사합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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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312화 21.04.11 34 1 9쪽
312 311화 21.04.10 32 1 9쪽
311 310화 21.04.09 85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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