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천하제일 무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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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죽으면 궁내부에 큰 변화가 온다.
우선 왕후와 왕의 후궁들이 모두 대왕대비전으로 들어간다.
그 빈자리를 세자궁 인원이 채운다.
세자궁 수라의 책임자는 왕의 수라간 책임자이자 내시부 최고 관직인 상선이 되었고, 박내관은 내시부 최고 실세인 상전이 되었다.
머무는 궁이 변하면서 이삿짐이 계속 움직이고, 복색 또한 몽땅 교체하고, 비어있던 대왕대비전을 꾸미느라 담장도 새로 올라간다.
박내관은 세자궁 인원 전원을 왕궁 요소에 배치했다.
내시부 자체의 법도가 있지만, 국왕 광해에게 전권을 받은 박상전의 말을 무시할 이는 아무도 없다.
대대적인 물갈이가 일어나고 나이 많은 내관과 궁녀가 대거 출궁했다.
이사작업이 끝나고 광해가 모두 모았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신내림을 받았다.”
이어지는 화려한 마법쇼 쇼 쇼!
일단 집안단속부터 해야 한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사관제도에 손을 대면 공정한 역사를 기록할 수 없사옵니다.”
“역사가 잘못되면 미래가 사라지옵니다. 과거 법도에 비추어 올바르게 시행되고 있는 사관제도를 함부로 바꾸는 것은 후대에 좋지 못한 예를 남기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옵니다.”
“사관도 사람이옵니다. 퇴청도 못하고 평생 기록만 하라니요.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비변사 대신들이 일제히 입을 모았다.
당파에 따라 싸우지만, 왕권 강화를 막기 위해서는 하나 되어 싸운다.
광해는 아직 그들과 마찰을 피했다.
“좀 더 생각해 보겠소. 다만 이들은 왕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논란이 끝날 때까지 내가 데리고 다니겠소. 그리고 인사 교체를 발표하겠소. 영의정 유영경이 죄를 짓긴 했으나 그게 과인에 대한 충심으로 그랬음을 알고 있소. 다만 없던 일로 할 순 없으니 우의정으로 강등하겠소. 영의정엔 오리 이원익 대감을, 좌의정엔 내암 정인홍 대감을 올리겠소. 또한 고생했던 이이첨을 대사헌에 올리겠소.”
남인 이원익과 대북 정인홍, 탁소북 유영경.
나름의 탕평책이다.
8일 만에 처음으로 왕이 의견을 냈다.
남인 입장에선 고마운 승진이다.
류성룡이 실각하고 이덕형이 영의정에서 물러난 이후 오랜만에 남인 영의정이 나왔다.
대북도 환영할만하다.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드디어 삼정승에 들었다.
여기에 이이첨을 대사헌에 올리는 파격을 행했다.
비변사의 대부분이 대북파이기에 대북파의 두 거두가 승진한 일에는 강하게 반대를 하지 못했다.
덕분에 유영경의 처벌이 우의정 강등으로 끝나는 무리한 지시도 유야무야 넘어갔다.
모두 광해를 지지하던 당파였기에 왕의 첫 인사단행을 극렬하게 막기 힘들었다.
“또 과인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모란 있어선 안 될 위험한 일이지만, 정적을 없애는데 사용되면 그게 더 위험하다 생각하오.
기축옥사를 생각해보시오. 거짓 고변으로 시작해 양반들의 활쏘기 모임이 역적모의로 꾸며졌소. 그로인해 많은 동인들이 고문당하다가 거짓자백 당하고 희생당하지 않았소? 솔직히 역모로 꾸며 고문한다면 이 자리의 모든 대신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고. 그러니 이제 역모의 기준을 바꾸겠소. 좌의정 정인홍은 들으시오.”
“예. 전하.”
“책임지고 기축옥사를 재수사하시오. 특히 억울하게 멸문당한 광산이가를 중점적으로 파고 그들의 명예를 되살린 방도를 생각해 내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소신이 기필코 샅샅이 파헤쳐 모든 진실을 바로잡겠사옵니다.”
“누굴 죽이라는 게 아니오. 고문은 불허하오. 수색과 탐문으로 조사를 하시오. 어차피 주도자들은 이미 죽지 않았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정철과 함께 기축옥사를 주도했던 이들은 이미 정철 실각 후 다양한 이유로 참형을 당했다.
문제는 기축옥사 자체다.
정철이 주도했지만, 그 뒤에 선조가 버티고 서서 정철을 조종했다는 것은 조정 대신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기축옥사 자체를 부정하지 못한다.
기축옥사를 부정한다는 것은 선조의 권위에 대항한다는 것이기에.
언급할 수 없었던 참사를 광해가 언급했다.
공정한 수사를 통해 당시 무너진 가문들의 명예를 되살리라 명령한 것이다.
정인홍이 감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겸사겸사 예서의 소망도 들어주고.
“그리고 앞으로 역모는 확실한 증거. 왕위 교체에 관한 서신이나, 사병 이동과 같은 실제적 행동만을 역모로 취급하겠소. 밀담을 주워들었다느니 병사를 몰래 키운다는 노비의 이야기 따위는 역모가 될 수 없소. 혹여 그런 이야기를 가져와서 역모라며 고문해야 한다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자신의 정치력 강화를 위해 정적을 죽이려는 기군행위로 간주하겠소. 당연히 큰 처벌이 있을 것이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리 되면 종묘사직이 위태롭사옵니다.”
“거 무슨 말이오. 도성엔 충성스런 대신들과 조선 최고의 군대인 훈련도감이 있지 않소. 뿌리 깊은 나무는 잔바람에 쓰러지지 않는 법이오. 기축옥사를 보시오. 무고한 고변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소이까. 노비의 하찮은 고변 따위로 훌륭한 명문가가 몰락하는 것보다 약간의 잔바람을 감수하며 굳건히 국가를 운영하는 게 조선을 더욱 강하게 하는 일이며 이에 감복한 선비들이 더욱 충절을 뽐내게 될 것이오. 그러니 역모의 원칙을 실제 행동으로 제한하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빌드업.
기축옥사를 먼저 이야기해 동인들이 강하게 반대하지 못하게 한 후 역모의 정의를 바꿨다.
이제 집권당이 정적을 쳐내기 위해 얼토당토하지 않은 역모를 씌우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즉, 주도 당파 입장에선 매우 강력한 무기를 하나 잃게 된 것이다.
“허균이 사헌부 장령, 최명길은 사간원 정언. 이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네. 내가 아니라 주상 전하와 영상의 뜻일세.”
이조에 들른 우의정 유영경이 인사발령을 지시했다.
간신 유영경을 흘겨보던 이조정랑은 영의정과 주상이 언급되자 자세를 바로 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헌데 내수사 별좌 모현성? 모현성이란 자는 누구입니까?”
“주상께서 세자시절부터 왕자사부로 모시던 분이라네. 이 또한 주상의 뜻일세.”
“헉. 그렇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분명 과거제도가 존재하지만, 과거제도 외에 음서나 천거로 관직에 오르는 이가 많다.
당장 영의정 이원익만해도 음서제도를 통해 13살의 나이에 군수직에 올랐다.
왕자사부가 추천으로 관직에 오른다고 막을 수 없다. 무려 왕의 보증인데.
이들 이외에도 허균의 백관 중 양반가 자제들이 하나 둘 하급 관료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양반들 모르게 조용히 폭탄이 심어지는 것이다.
특히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위주로 관료를 채웠다.
그 이유는......
“주상 전하. 경연이란 옛 성현의 지혜를 익혀 백성을 다스릴 힘을 얻는 중요한 과정이옵니다. 명일도 빠지실 경우 오일 째 경연이 열리지 않게 됩니다. 이는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없던 일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광해가 자꾸 경연을 빼먹자 작정하고 온 대사간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통촉을 외쳤다.
“그래. 알겠네. 내일은 비변사 회의도 없으니 하루 종일 경연에 참가하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문무백관 모두 성상을 우러러 본받을 것입니다.”
성은까지야.
경연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신료들이 준비한다.
내일 경연은 허균이 미리 잡아 놨다.
앞으로 허균이 경연을 이끌 때만 참여할 생각이다.
광해의 생각까지 짐작하지 못한 대사간은 그저 젊은 국왕이 기특할 따름이었다.
만약 속내를 알았다면......
다음날 아침 왕이 출궁했다.
보통 경연은 궁내에서 열리지만, 경연관에 따라 한강변 정자나 행궁에서 열기도 한다.
경연을 핑계로 나서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가마꾼과 내시, 궁녀와 호위병들을 이끌고 궁을 나선 광해는 인적이 좀 뜸한 곳까지 오자 가마에서 내렸다.
“박내관. 먼저 간다. 잘 따라와. 사관 놈들 딴 데 새지 않게 감시 잘하고.”
광해는 뛰기 시작했다.
며칠 운동을 못했더니 몸이 찌푸둥하다.
문제는 남겨진 이들의 슬픔.
“허. 헉!”
“주... 주상 전하.”
“따라라.”
“달려라.”
왕이 먼저 가버렸다.
왕이 앉는 가마나 요강, 무치한 일에 대비해 시선을 막을 대형 비단 등 각종 짐을 들고 있던 시종들은 죽어라 뛰어야 했다.
불행한 사관 둘도 소 끌려가듯 뛰었다.
‘니들도 운동 좀 해야 해.’
이게 다 니들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다.
석계마을에 도착했을 때쯤엔 기병 여섯을 제외하곤 모두 하늘이 노래지는 걸 경험했다.
미리 날짜를 공지했기에 석계마을 연병장엔 모두 도열해 있었다.
수호군과 안보군, 허균과 백관.
먼저 도착한 광해는 그들 하나하나와 시선을 마주한 후 선언했다.
“지금부터 천하제일 무술대회를 열겠다.”
“와아아아.”
무술대회가 오늘 경연의 주제다.
“모두 몸부터 풀어라.”
“옛.”
간격을 벌린 안보군과 수호군이 요동 단검술과, 방패술 등 배운 바를 차례대로 펼쳐냈다.
“합.”
“하압.”
불과 한 달 반밖에 되지 않았다.
초식은 대충 따라가지만 완벽하지 않다.
그래도 이정도면 일반병사 두셋은 상대할 만하다.
둘러싸고 구경중인 마을 사람들이 보기엔 제법 폼이 난다.
병사들이 몸풀이로 초식을 펼칠 때 왕의 호송행렬이 헉헉대며 도착했다.
내시와 궁녀는 모두 광해의 사람들이다.
남의 사람은 사관과 금군대장이 이끄는 호위병뿐이다.
광해의 등 뒤에 선 좌별장 이중로를 보며 물었다.
“어때 보이나?”
“사병이옵니까?”
“왕에게 사병이란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조선에서 사병을 기르는 것은 대역죄다.
헌데 왕이 사병을 기른다면?
이중로의 머릿속이 혼란에 빠졌다.
“엇. 모든 병사는 주상의 병사들이니 사병이란 말은 옳지 않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실수야 인정했으면 됐지, 벌줄 것까지야. 내가 직접 초식을 가르치고 훈련시킨 병사들이다. 어때 보이나?”
광해의 질문에 이중로가 진지하게 전방을 바라봤다.
단검술은 가볍고 방패술은 단단해 보인다.
한손에 방패를 들고 한손검으로 휘두르는 것은 안정적이고, 창술은 매우 화려했다.
“강병이옵니다. 조선의 모든 병사가 저리 강하다면 참화는 없었을 것이옵니다. 특히 저 창술을 익힐 수만 있다면 조선의 군사력은 두 배 강해질 것이옵니다.”
“오호.”
생각보다 보는 눈이 좋다.
닥치고 조총, 닥치고 판옥선만 외치는 성리학자들과 시선이 다르다.
광해가 이중로를 바라볼 때 몸 풀기가 끝났다.
진행을 맡은 백관 중 하나가 나섰다.
“천하제일 무술대회를 개최하겠다!”
“와아아아아.”
진행자의 선언에 환호성이 터졌다. 병사 천여 명과 인근 주민 이천 명이 운집한 이곳은 축제의 장이었다.
사형집행조차 좋은 구경거리가 되는 이 시대에 무술대회는 훌륭한 축제다.
광해가 자기사람으로 키우고 있는 석계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예선 과정을 소개하고 8강에 오른 이들을 하나하나 호명해 칭찬한 후 토너먼트를 진행했다.
탁탁. 휘리릭.
검과 봉이 교차한다.
8강 진출자 중 절반은 창술을 쓰고 절반은 검방술을 쓴다.
단검으로 나선 이들은 일찌감치 전멸했다.
창과 창의 만남은 화려하다.
빛살 같은 찌르기를 풍차 돌리듯 막고, 몸을 회전하며 들어오는 연환격을 쳐올리기로 막는다.
덕분에 관객의 눈은 즐거웠다.
검방술과 창술은 금방 끝난다.
방패를 앞세워 돌진하는 검병. 창술로 찌르거나 내리쳐 때리면 승리고 저지 못하면 패한다.
검방술과 검방술은 짜고 친 것처럼 오래 걸린다.
어려운 방패술의 응용결과에 승패가 갈린다.
오래 수련하지는 않았지만, 특출난 이는 금방 드러난다.
대결이지만 스포츠가 아니다.
목숨 건 전투를 위한 훈련이다.
단 한 번의 유효타로 승부가 가려지고, 눈 찌르기와 낭심치기가 권장된다.
전신 갑주를 입고, 무기는 전부 나무지만, 잘못 찔리면 환관이 될 수도 있다.
광해는 나름 집중해서 결투를 봤다.
휙.
급소를 찌르는 목검을 광해가 돌을 던져 막았다.
“그만.”
채애앵.
광해의 선언에 곁에서 징을 치며 승자를 가렸다.
감히 왕의 선언에 불복하는 이는 없다.
“오메메. 다치겄네.”
“막았네. 아이쿠 또 막네.”
“히야. 찌르기가 보이지도 않는구먼. 저걸 어찌 막는대.”
마을사람들의 환호성과 탄식 속에 승자와 패자가 빠르게 갈리면서 금세 결승까지 왔다.
간삼.
처음으로 치료받은 나병환자이며 지금의 소망은 은혜를 갚는 것으로 바뀌었다.
간삼은 창을 들고 나왔다.
여러 무기술을 배웠고 수호군의 기본 무기는 검방술이지만, 창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실망시켜 드릴 수 없다.’
손바닥에 피가 나고, 딱지가 앉았다가 터지길 반복해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밤마다 아내가 손바닥을 만지며 눈물짓는 걸 느껴도 멈추지 않았다.
상께서 내게 원하는 바를 행한다.
“결승을 시작하겠다. 간삼. 우진춘. 나와라.”
결승까지 왔다.
간삼은 한켠에 편히 앉아있는 주상께 예를 올리고 상대를 봤다.
같은 수호군 출신인 우진춘. 그 또 한 열심히 했다.
주상을 위해서겠지.
하지만 질 수 없다.
“시작!”
구호와 함께 발을 내딛으며 얼굴로 봉을 찔렀다.
상대도 전진하며 방패를 들어올린다.
넓게 파지한 두 손 중 뒤쪽인 오른손을 올리고 앞쪽인 왼손은 내린다.
이러면 창이 아래로 꺾인다.
창은 검보다 간격이 길고 방향전환이 쉽다.
방패로 인해 일순 시야가 가린 상대는 막지 못했다.
빠악.
봉이 상대의 발목을 가격했다.
“끝.”
광해의 조용한 선언에 징을 치며 전투 종료를 알렸다.
어찌보면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대결.
하지만 이게 진짜다.
전쟁에서 전투란 이런 거니까.
“우승자 간삼 나와라.”
- 작가의말
박진감 넘치는 전투가 뭐죠?
한대 맞으면 끝인데...
리메전과 큰 변화 없는 부분이기에
오늘 밤에 한편 더 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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