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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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군은 외궁을 지킨다.
700명이 교대로 근무를 하고 무술을 훈련한다.
왕을 근접 호위하는 역할도 있다.
왕이 업무를 볼 때나 궁 밖으로 나올 때 곁을 지킨다.
다만 왕이 금남의 구역에 들면 외궁 입구에서 대기한다.
교대 병력까지 생각하면 700명은 충분히 많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
국왕의 명령으로 팔대문을 금군이 봉쇄하면서 궁을 지키는 병력이 줄었다.
야심한 시각 정릉 행궁 입구에 양반들이 모였다. 당상관 대신들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인 하급관료와 노비, 의금부에 하옥되었던 범죄자와 검계의 밀주 등 숫자가 얼추 500을 헤아렸다.
역대 반정들, 세조반정이나 중종반정 등을 생각하면 이정도 인원이면 차고 넘친다.
국왕의 호위는 생각보다 약하다.
“이귀 빼곤 다 모였군. 에잉. 이 사람은 진짜.”
“빨리 합시다. 시간 끌어서 좋을 건 없소.”
“알겠소. 내 앞장서리다.”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장은 홍여순의 제자다.
금군 별장 남이홍과 이중로는 국왕파지만 중하급 지휘관 대부분은 왕을 따르진 않는다.
지휘관의 절반 이상은 성리학자이며 그들에게 스승의 말은 국왕의 말과 같다.
홍여순이 다가가자 미리 말을 들었던 제자가 정문을 활짝 열고 합류했다.
대신들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진입했다.
국왕은 아직 대전에 있었다.
좋은 일이다.
내궁으로 도망쳤다면 혼란이 컸을 텐데 깔끔하게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대전 앞에 있던 좌별장 이중로와 병력 20명. 이들이 왕을 지키는 최후의 병력이자 전부다.
“물렀거라. 우린 대의를 바로잡으러 왔다.”
“본관도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방법은 옳지 않소. 일단 물러나고 명일 적법한 항의를 하시오.”
홍여순의 말에 이중로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 이러겠는가. 이러지 않으면 다 죽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물러서지 않으면 베겠다.”
“우리라도 이 자리에서 죽어야 조선의 충절이 알려지지 않겠소. 모두 검을 들어라.”
이중로는 결연한 다짐을 하며 검을 들었다.
‘시발?’
‘싸우려고? 정말인가?’
‘왜 우리한텐 안 물어보는데!’
뒤에서 사시나무 떨듯 벌벌대던 병사들은 똥 씹은 얼굴이 되었지만, 엉거주춤 검을 들어야 했다.
그때 근위병을 살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면 됐다. 근위병은 검을 내려놓고 항복하라. 명령이다.”
대전 안에서 들려온 광해의 명령에 이중로와 근위병은 우물쭈물하다가 검을 내려놨다.
넓은 대전 안엔 광해 혼자, 아니 광해와 사관 둘만 있었다.
높은 옥좌에 홀로 앉아있는 광해의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
광해의 무력을 봤던 홍여순은 검계의 야인들부터 먼저 밀어 넣었다.
대신들과 그들을 따르는 중하급 관료들과 노비들이 대전에 꽉꽉 들어찼다.
“이 늦은 시간에 어인일이신가?”
홍여순이 소리쳤다.
반정 후의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선 지금 나서야 한다.
“소신들은 소중한 조국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나섰습니다.”
“잘못된 길이라니. 내 행한 바는 모두 백성을 잘 살게 만들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정책이었는데.”
“아닙니다. 주상께서는 백성을 생각하기 이전에 대국을 생각하셨어야 합니다. 소신들은 조선의 신하이기 이전에 대명제국의 신하입니다. 주상께서는 재조지은을 잊고 대명률을 어기셨습니다. 이는 꼭 바로잡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옵니다.”
“하하하. 대명제국의 신하라. 명나라의 정책에 반하는 정책을 벌인 것 만으로 왕을 쫓아낼 명분이 설 수 있나?”
“예. 대명에 죄를 짓느니 성상께 죄를 짓겠습니다.”
성리학은 없앨 수밖에 없는 학문이다.
조선 국왕의 신하 이전에 대명제국의 신하.
임시로 갖다 붙인 반란의 명분이 아니라 성리학자 대부분의 기본 인식이다.
같이 갈 수 없는 학문.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와 한 배에 탈 수 없다.
“하하하하하. 장하구나. 대명제국의 신하였어. 대명제국의 신하들이 조선을 다스리고 있었으니 나라꼴이 이러했을 수밖에. 남의 나라 충신들에게 나라살림을 맡긴 꼴이었어.”
“남의 나라라뇨. 대명제국은 조선의 모태가 되는 나라이옵니다. 혹시 재조지은조차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럼 정말 금수보다도 못한 인간이 될 터인데.”
“재조지은이라......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구만. 알겠어. 그럼 대신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 되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고 조선의 왕 이전에 명나라의 신하임을 자각하면 되는 것인가?”
광해군이 허망한 표정으로 묻자 홍여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가의 적통은 왕후에게서 난 영창대군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명제국에서도 적통에게 왕위를 이어주라는 황명이 왔습니다. 소신들은 대명제국의 뜻에 따라 올바른 주인이 옥좌에 앉도록 조치할 것이옵니다.”
명나라에서 있었던 쟁근본 논쟁.
대신들은 수년도 지난 이야기를 꺼내 명분을 찾았다.
홍여순의 말에 광해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 왕을 바꾸겠다니. 역모 아닌가. 그대들은 명나라의 신하이지만 과인의 신하가 아니더냐.”
광해는 이 상황이 재밌었다. 웃음을 겨우 참으며 연기톤으로 놀고 있었다.
“소신들은 선왕에게 임명받은 선왕의 신하들입니다.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올바른 주인에게 자리를 넘겨주려는 바입니다. 여봐라. 옥좌를 비워라.”
끝까지 명분을 찾는 성리학자 홍여순.
이 와중에도 목적어는 말하지 않는다.
왕을 끌어내리라는 말이 실록에 적히긴 싫겠지.
노비들이 다가오자 광해가 다급히 말했다.
“연산군을 끌어내린 대신들은 반정공신이 되어 포상을 받았다. 하지만 직접 포박한 병사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끌어내려질 당시 그는 왕이었기 때문이지. 지금 너희는 명령대로 행하더라도 결국 왕에게 무엄한 행위를 한 죄로 훗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옥체에 손을 대지 말거라.”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일단 노비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곤 대표격인 홍여순을 바라봤다.
“과인에게 마음을 추스를 이틀의 시간을 달라. 그러면 귀관들이 지목하는 인물에게 왕위를 선양하겠다. 과인이 직접 선양하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나.”
“이틀? 흥. 지방에 나간 병마를 기다리시렵니까?”
“어차피 사대문을 장악하지 않았나? 난 이곳 대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 귀관들의 병력이 날 감시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곧장 제압하면 되지 않는가. 신병까지 확보해놓고 그렇게 소심히 행동하면 훗날 대국을 이끌지 못할게야.”
딜?
“거부하면 어쩔 텐가?”
홍여순은 왕에 대한 존칭을 버렸다. 광해는 품에서 작은 소검을 꺼내들었다.
“이 검으로 싸우다가 죽을 테다. 귀관들은 야심한 밤에 왕궁에 쳐들어와 왕을 죽인 무뢰배로 역사에 기록될 걸세. 부귀? 영화? 다음 대 왕을 세울 순 있어도 3년을 못 갈 걸세. 지방 사림이 들고 일어나 사형에 처해질 걸.”
명분과 역사를 무서워한다.
성리학자의 특징이다.
홍여순이 고심하고 있을 때 뒤에서 사관들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니다! 함정이다! 이 상황은 국왕이 유도한 거다. 당장 죽여야 한다!’
소리치고 싶지만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니 몸조차 움직일 수 없다.
그저 마음으로 외칠 뿐이었다.
왕의 자해공갈협박에 홍여순이 넘어갔다.
“알겠습니다. 이틀. 대신 이 대전에만 있어야 하며 수상한 짓을 할 경우 당장 포박하겠습니다.”
“그래. 아. 이틀 동안 혹시라도 날 옹호한다는 이가 있다면 제압하되 죽이지는 말아줘. 나의 충신이 나 때문에 죽는걸 보는 건 슬프잖아. 내가 선양한 후에 죽이든 말든 신경 안 쓸게. 아. 그리고 이틀 후까지는 내가 왕이니까 사관들 데리고 있어도 되겠지? 올바른 역사를 남겨야 하잖아.”
광해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쯧쯧. 경박한 말투하고는. 역시 우리의 선택이 옳았어. 알겠습니다. 당상관 여러분들. 대전을 지킬 조를 나눕시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누가 모시고, 선양에 대한 예법은......”
“제가 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예법에 밝았던 율곡 선생의 제자가 맡아야 하겠죠.”
뒤늦게 합류한 이귀가 숟가락을 슬쩍 얹었다.
대신들은 다 이긴 것처럼 떠들며 대전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것은 폐위가 거의 확정된 광해와 소리치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사관 둘 뿐이다.
밀주가 광해를 습격할 때 홍여순은 곁에서 지켜봤다.
인간 같지 않은 무력. 암습자 열셋을 잃은 기습에서 귀 끝에 피를 약간 보는 게 다였다.
“밀주. 자네와 노비들, 하급 관료들은 전부 대전을 지켜라.”
200명 정도 둘러싸고 지키면 막을 순 있겠지.
“들어가서 영창대군과 소성대비를 모셔와라.”
홍여순이 제자들에게 명하자 유영경이 막았다.
“잠깐. 내궁은 침범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소?”
“이미 왕궁에 침입했는데 내궁을 밟는다고 큰 문제 될게 있겠소?”
“왕이 선양하기로 했잖소. 좋게 갑시다. 역사에 기록되오.”
홍여순과 유영경의 기싸움.
차기 정국을 잡기 위한 눈싸움이 벌어졌다.
“쳇. 내궁에서 궁녀를 불러 말을 전하라. 영창과 대비가 빨리 안 나오면 우리가 들어간다 전하라.”
“예.”
홍여순이 말을 끝내자 유영경이 말을 받았다.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서 도성 양반들을 포섭합시다. 동참할 자는 궁으로 나오고 폐주에게 충성할 자는 집 안에서 죄를 기다리라고. 머릿수를 불려야지 자칫하면 금군에 밀리게 되오.”
홍여순과 유영경이 팽팽히 기싸움 하는 가운데 양반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아침이 되자 대세가 굳어졌다.
영창과 소성대비를 방문해 왕위를 선양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소성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부탁했다.
소성대비는 대세를 따르겠다는 애매한 말로 얼버무렸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양반들이 장정들을 이끌고 달려와 궁문 앞의 장정 수가 천명을 넘겼고, 금군과 포도청 병력 등 300명이 합류했다.
끝내 왕을 배신하지 않은 이들은 왕의 명령에 무기를 내려놓고 포박을 받았다.
이제 한성 전체에 홍여순에게 반하는 이는 남지 않았다.
왕이 된지 두 달도 되지 않은 광해는 자기 심복도 없이 홀로 한성에서 날뛰다가 결국 연금을 당했다.
무혈혁명.
홍여순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술 가져와. 술.”
대전에 연금된 광해는 바깥에 소리쳤다.
대전을 지키던 하급 관료 김자점이 주안상을 직접 들고 들어왔다.
탕!
“많이 드십시오.”
“이걸 누구 코에 붙여? 더 가져와라. 수라간 음식 그대로 남았을 거 아니냐?”
왕은 김자점의 불손한 태도 대신 주안이 적은 걸 문제 삼았다.
“지금 시국에 음식이 넘어가십니까?”
“최후의 만찬이라는 말도 모르느냐? 달리 할게 없어서 심심하구나. 어여 가져와라.”
“허허. 역시 폐위가 정답이야. 거 참.”
김자점을 말리고 싶었던 사관은 몸을 움직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김자점이 나가고 비로소 입을 열 수 있게 되자 조심히 물었다.
“저 자는 사형입니까?”
“응? 사관이 말 할 수 있나? 역사만 기록한다메.”
“이 와중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반정 자체를 광해가 유도했고 그 생각대로 되고 있음을 아는 사관은 결국 광해가 살아남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고통.
그렇기에 김자점의 불손한 행동은 자살행위로 보였다.
“이것 봐. 원칙대로 되는 건 없다니까. 사관제도야말로 신권이 왕권보다 강하다는 걸 상징하는 거야.”
“그런 것 같군요. 어쨌든 저자는 죽이실 겁니까?”
“그래. 그런데 불손해서 죽이는 건 아니야. 난 건방진 놈 좋아하거든. 저놈이 죽는 건 세 명을 강간했고, 일곱 명을 죽여서야. 피해자의 원한이 저놈에게 덕지덕지 붙어있군. 죽은 이의 원한을 풀어줘야 하지 않겠나?”
광해의 말에 사관은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혹시 저희도 살려주실 수 있습니까? 저희는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았잖습니까?”
“이지안 넌 살고 저놈은 죽는다. 넌 원한이 없는데 저놈은 원한이 많이 붙어 있어.”
“헉. 저는 아니 읍읍.”
귀찮게 변명하려는 사관을 석화마법으로 굳혔다.
이지안은 그 말에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그럼...... 앞으로 대책이 있으신지요? 지금이라도 병졸들이 들이닥쳐 포박하면 어쩌실 런지요? 혹시 병졸들을 매수하셨사옵니까?”
“대책? 없는데. 아. 첩자 하나 심어놓긴 했지만...... 혼자 나를 구하진 못하겠지? 이럴 때 적용할 좋은 말이 있지. 고민해도 변할게 없으면 고민하지 말자.”
광해는 태평하게 말을 뱉고는 술을 쭈욱 마셨다.
미친놈인가?
이지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왕은 날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그 왕이 죽을 것 같다.
대책이 있긴 있을 텐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아니 대책이 없는 것 같다.
왕이 대책 없이 죽고 나면 난 살 수 있을까?
저 사관을 죽이고 난 살린다고 했는데 이 말을 전해들은 반정공신들이 날 광해의 사람으로 보고 죽이려나?
아... 괜히 물어봐서.
이 새끼는 왜 하필 날 살려준다고 해서.
모르겠다.
죽을 것 같다.
- 작가의말
상국에 죄를 짓느니 성상께 죄를 짓겠소
광해군이 실제로 들은 역사에 기록된 말
성리학 참...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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