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소탕
순도 100% 픽션입니다
저쪽엔 왕과 사관 둘.
사관 둘도 지난 두 달간 억지로 끌려다니며 고생했으니 사실상 혼자.
반면 이쪽엔 검계의 고수를 포함한 이백여 명이 있다.
이 중 자신의 일파는 서른이 채 되지 않는다.
지금 광해에게 가면 자신도 죽는다.
유영경은 빠른 계산을 통해 최악의 답안지를 내놓았다.
“무슨 소리냐! 난 주상의 신하이기 이전에 대명의 신하다!”
찰나의 선택이 인생을 바꾼다.
지금껏 지시대로 잘 해놓고서 마지막에 배신하는 간신.
“허허. 알겠다. 혹시나 해서 묻겠다. 이곳에서 나에게 충성을 바칠 자가 있느냐?”
간신이 편리해서 쓸 뿐이지 꼭 필요해서 살려둔 건 아니다.
광해는 유영경을 붙잡는 짓은 하지 않았다.
왕의 외로운 외침에 다들 시선을 살짝 돌렸다.
홍여순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주상. 어서 왕위를 선양하시오.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품위를 지키기 힘들 것이오.”
광해는 한숨을 쉬며 용포를 벗었다.
홍여순의 눈빛이 밝아졌다.
용포를 벗은 광해의 전신엔 은색 천옷이 있었다.
실보다 두꺼운, 마치 사슬갑옷처럼 생긴...
“갑옷?”
전신을 감싼 갑옷.
거기에 요상한 장갑을 꺼내들었다.
“무... 무슨 짓이오? 저항하겠단 말이오? 제발 체통을 지키시오.”
광해는 대신들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저것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이건 대신과 왕의 권력다툼이다. 병사들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니 물러나거라.”
광해는 길게 말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손에서 실이 나간다.
스걱.
아다만티움으로 실을 뽑아 만든 무기.
마력이 없는 세계. 내공이 없는 세계.
대부분의 무공은 이계에서 강탈했다.
그곳의 무기술은 그곳 상황에 맞춰 발전했다.
이곳의 상황에 맞춰진 최상의 무공이 따로 존재할 것이며, 긴 사색 끝에 광해는 자신만의 최상의 무기술을 구상했다.
길이 10m의 아다만티움 철사 100가닥.
철사는 염동력에 의해 움직인다.
오직 광해만을 위한 무기다.
스거걱.
“아아악.”
저도 모르게 선두로 나왔던 홍여순과 유영경 등 대신들의 발목이 잘렸다.
“막아!”
“달려들어!”
“끄아아악!”
“이건 왕과 신하의 권력다툼이다. 병사들은 물러나라!”
“뭐! 뭐해! 막아! 잡아!”
사각. 사각. 스걱!
노비와 병사를 철사로 감아 벽면으로 던지고 관복을 입을 신료들만 노렸다.
신료들의 발목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아아악!”
“살려줘!”
편전은 비명소리로 가득 찼고, 뒤쪽에 있던 이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줬다.
“구 구원병을 불러오겠소.”
“나도 나도.”
이 와중에 변명을 만들어내며 도주하는 양반들.
나도나도 정신이 널리 퍼졌다.
벤 자는 스물이 안 되건만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양반들이 도망치는데 병사와 노비들이 열심히 싸울 리 만무하다.
“이건 왕과 신하의 싸움이다. 병사와 노비는 물러나라. 이건 왕명이다!”
왕명이라는데. 피해야지.
양반이 도주하자 검계의 주인, 밀주가 선두에서 도주했다.
활을 사용하는 밀주는 애초에 후방에 서 있었다.
밀주가 탈출에 성공하려는 순간.
“밀주. 문을 막으면 살려주마. 도망치면 모두 죽이겠다.”
좁은 편전 문에 몰려 제대로 나가지 못한다.
밀주는 한순간 움찔하더니 곧장 돌아섰다.
그리고 보조 단검을 뽑아 신료들을 벴다.
“검계는 지엄하신 주상 전하를 도와 대역죄인들을 잡는다.”
밀주의 말에 잠시 당황하던 검계의 무사들은 신료들을 찌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배신이라니!”
“이놈들! 네놈들이 저지른 죄는!”
밀주의 임기응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광해는 그 뒤를 덮쳐 신료들의 발목만을 노렸다.
거기 섞여 있던 노비와 병사들은 자신들을 베지 않자 좌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생명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니까.
일각도 되지 않아 상황이 끝났다.
편전 안에는 발목이 잘린 대신 50여명과 좌우로 피한 병사와 노비 100여명만 남았다.
탈출에 성공한 것은 비교적 뒤쪽에 있던 하급관료 50여명.
“소성대비는 대비전에 가 계시오. 처벌은 없을 테니 안심하고. 노비들은 양반들의 발목을 천으로 묶어 지혈하라. 병사들은 나를 따라라. 명령이다.”
광해가 밖으로 나왔다.
예전부터 광해의 수하였던 것처럼 밀주와 수하들이 좌우로 갈라져 고개를 숙였다.
영광 영광 광해 마마~
동서남북 사방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백성들이 넓은 궁궐 전체를 포위한 느낌이다.
관복을 입은 이들이 병사와 노비들에게 막으라고 소리치며 사방으로 도주하고 있다.
홀린 듯 따르고 있던 이지안이 물었다.
“주상께서 믿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까?”
“나의 무력. 내 능력을 믿었지. 처음부터 저들은 날 죽이는 게 불가능했어. 병사들아 이 말을 계속 외치거라. 이 분은 조선의 왕 광해님이다. 신하들의 반란은 실패했다.”
전신갑옷을 입은 광해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훈련도감 소속 병사들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광해의 지시에 따랐다.
카리스마.
당연한 듯 명령하고, 그 말을 당연히 따라야 할 것 같다.
병사들은 어느새 광해의 병사가 되어 지시한 바를 따르고 있다.
광해는 귀찮게 도망 다니는 신료를 쫓는 대신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 앞을 가로막는 대신을 베어낸 광해는 정문을 열라 시켰다.
굳게 닫혀 있던 정문이 서서히 열렸다.
두 배로 커지는 노랫소리.
어른도 아이도 여자도 노인도 모두 어깨동무를 이어붙이고 노래하고 있다.
어깨동무의 띠는 길게 길게 이어져 궁궐을 감쌌고, 뒤로도 수십 수백 개의 띠가 형성되어 있었다.
백성들은 돈화문 문이 열리고 전신 쇠갑옷을 입은 남자가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오자 움찔했다.
저 피칠갑을 한 장군이 당장이라도 자신들을 죽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입을 열자 상황이 바뀌었다.
“나는 조선의 왕 광해다.”
와아아아아~
“너희들의 충절 덕에 과인이 왕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 너희들 덕분이다.!”
마력을 실은 광해의 목소리가 멀리 멀리 뻗어나갔다.
와아아아아~
모여서 노래한 것 밖에 없지만, 그 행동 자체를 원했다.
전혀 도움된 건 없지만, 이들은 이제 스스로 왕을 지킨 자부심을 얻게 된다.
또한 양반들을 무찌른 공범이 된다.
“이제부터 반란세력을 소탕하겠다. 백성들 스스로 숫자를 나눠 한성 팔대문을 봉쇄하라. 지금부터 나의 허락 없이 한성 밖으로 나가려는 이는 모두 포박하라!”
“예!”
“일부는 궐 안으로 들어가 도망간 신료들을 잡아라. 죽이지 말고 잡아서 데려오라. 이 과정에서 신료가 아닌 내시나 궁녀들을 죽이거나 도둑질 강간 등을 하는 자는 구족을 멸하겠다. 조심하거라.”
“예!”
“한성단주. 어디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대전에 가보면 발목 잘린 양반들이 있다. 그 놈들을 데리고 남산 집회장으로 오거라.”
“예!”
귀찮은 모든 일을 백성들에게 맡겼다.
이들은 분위기에 취해 양반들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제 소탕하는 임무까지 맡게 되었다.
훗날 지방양반들과 전쟁을 벌일 때 한성의 백성들은 왕의 병사가 되어 스스로 싸워야 한다.
17만의 병사를 얻기 위해 그토록 귀찮은 쇼를 감내했다.
남산자락. 광해소망교 본단으로 이동했다.
광해를 따르는 이가 일만 여명을 넘었다.
광해는 높은 단상에 올랐다.
잠시 후 한성단주와 안보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전하. 명단을 완성했습니다.”
안보군의 장이 된 돌구가 건네준 것은 살생부. 금일 반정에 참가한 이들의 명단이다.
광해는 명단을 보며 가까이 있는 백성을 지목했다.
“너. 열 명을 데리고 가서 오리 이원익 대감을 데려 오거라. 그는 나의 충신이니 무례를 범해선 안 된다.”
“예. 기필코 왕수하겠습니다.”
“너. 스무 명을 데리고 가서 이상의와 가족을 끌고 와라. 반항하면 구타하되 죽이지만은 말거라.”
“예.”
충신과 역적의 차이.
도성 내 양반들의 생사가 하루사이 갈렸다.
팔대문이 봉쇄되고 양반사냥이 시작되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신이 나서 합류했다.
은근슬쩍 약탈을 하려던 범죄자와 죄인이 잡혀오고 충신이 남산으로 몰려들었다.
모인 백성들이 삼만 명을 넘어서자 광해가 재차 단상위에 섰다.
“이 아이인가?”
“예. 주상에 대한 충의로 병사들에게 맞아 기절하면서도 계속 전진해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습니다.”
얼굴도 옷도 전부 피투성이가 된 임경업.
“고맙다. 네가 진정한 충신이구나. 네 이름이 뭐냐?”
“임경업이라 하옵니다. 전하.”
임경업.
들어봤다.
모현성의 수첩에 있던 평가는 그리 안 좋았는데.
평가가 들어있을 정도면 무언가 특이점이 있다는 뜻이다.
임경업은 온몸이 피투성이에 멍이 들고 부어 있다. 손목과 갈비뼈 네 개가 부러졌다.
그 상태로 신음을 삼키며 억지로 절하려 하는 걸 말렸다.
“고맙다.”
‘라이트. 클린. 힐.’
손에 빛이 나고 아이의 얼굴에서 피가 사라진다.
우와아아아~
퍼렇게 부은 멍이 사라지고 찢어진 부분이 아문다.
“기적이다.”
“왕께서 기적을 보여주신다.”
“성은이다. 성은.”
아직 기적을 못 본 이들이 많다. 뜬소문이라고 무시하던 이들.
그런 이들도 오늘은 밖으로 많이 나왔다.
세상이 하수상하니 궁금해서 따라온 이들도 많다.
그런 이들을 전도할 절호의 기회다.
“내게 충성해줘서 고맙다. 달리 소망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내대장부는 보답을 바라고 충성하지 않습니다.”
뭐지. 13살이면 중2병 걸릴 나이인가.
광해는 의문을 표했지만, 백성들은 아니었나보다.
조건 없는 충성. 원칙이지만 지켜지지 않는 원칙.
양반들은 뜨끔했고, 백성들은 감동했다.
“그래. 앞으로 호위병으로 내 곁을 지키거라. 천하제일 창술을 가르쳐주겠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다시 몸을 풀기 위해 요동창술을 연마해야겠다.
겸사겸사 알아서 배우라지.
임경업과 가장 먼저 나선 몇몇 이들에 대한 포상을 끝냈다.
이제 죄인을 처벌할 시간이다.
광해가 손짓하자 광해소망교 신도들이 발목이 잘린 홍여순을 단상위에서 높이 들어 세웠다.
“이 놈은 훈련도감 도제조 홍여순이다. 이놈의 죄는 역모. 살인. 강간. 약탈. 사체유기. 음해 등이다. 우선 왕의 역모에 앞장섰다. 또한 개상의 일가족을 죽여 재산을 빼앗았으며 춘앵을 강간하고 살해했다. 또......”
홍여순에게 걸려있는 원한이 수천 개다. 실로 포악한 자였다.
광해는 그것을 하나하나 다 읊어주었다.
곁에는 사관 이지안이 엎드려 언문으로 죄상을 적고 있었다.
죽다 살아난 이지안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이 자를 고문해 죄상을 조사할 자가 필요하다. 누가 하겠는가?”
정 1품 양반을 고문한다. 모두가 망설일 때 몇몇이 손을 번쩍 들었다.
홍여순과 원한관계가 있는 이들이다.
눈에 핏발이 선 그들은 홍여순을 노려보며 손을 뻗을 수 있는 데까지 뻗고 있다.
“너. 너너너너. 너희 다섯에게 맡기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기억해라. 단순히 자백이 필요한 게 아니다. 모든 죄를 행했다는 증좌가 필요하다. 살해했다면 시체를 묻은 위치와 살해동기까지 전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절대 죽여선 안 된다. 강간하든 손톱을 뽑든 마음대로 하되 절대 죽이지 말거라. 알겠느냐? 크게 다쳐 죽을 것 같으면 내게 데려와라. 어떻게든 목숨은 붙여 놓을 테니.”
“예. 전부 알아내겠습니다. 전하!”
자원한 백성들은 신나게 대답했지만, 어려울 것이다.
증거가 없는 죄도 많을 것이며 홍여순이 기억 못하는 원한도 많을 것이다.
결국 홍여순은 죽지도 못하고 무한히 고문을 당할 것이다.
광해에게 지목받은 백성이 기뻐하며 홍여순을 끌고 가고 다음으로 올라온 것은 유영경이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가 순간 미쳐서......”
광해는 피식 웃었다.
“넌 원래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난 선왕에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기회를 줬지. 그 기회를 네가 차버렸구나.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이 광해의 무릎을 꿇게 한 가격은 비싸다.
유영경에게 딸린 소망은 홍여순 만큼이나 많았다.
무능력한 주제에 세가 약한 탁소북을 이끌며 국정을 차지하려 했으니 뒷 세계 공작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광해는 유영경의 죄를 하나하나 읊어줬고, 모여든 백성 모두가 들었다.
“혹시 이 자가 살아야 할 이유를 댈 자 있느냐?”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유영경도 아무 차별 없이 홍여순과 똑같은 처분을 받았다.
- 작가의말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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