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광해 은행
순도 100% 픽션입니다
“이 주화는 광해은전이다. 전국 어디서든 광해은행에 가져온다면 면포 한필, 혹은 쌀 네 말과 교환해주겠다. 참고로 교환비율은 매달 물가에 따라 바뀌며 은행 앞에 공시된다.”
은행의 책임자인 백관 김승주가 3g짜리 충무공이 양각된 은화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주화는 광해은화다. 광해은전 열개와 교환이 가능하다.”
30g짜리 충무공이 양각된 은화.
“이 주화는 광해금화다. 광해은화 여섯 개와 교환이 가능하다.”
30g짜리 충무공이 양각된 금화.
은 화폐를 쓰는 명나라는 은의 가치가 높아 은과 금이 6:1으로 교환된다.
은이 넘치는 땅, 지팡구란 별명을 얻은 일본은 은이 많아서 은과 금이 12.5:1로 교환되었다.
이 시세차익이 엄청나기에 포르투갈의 중일 상선은 일본의 은과 중국의 금을 바꾸는 걸 반복해서 엄청난 이득을 거둬왔다.
조선은 경제규모가 큰 명나라의 비율을 따르기로 했다.
일본의 경제는 무너졌고, 그 나라 은을 공짜로 전부 삼키게 되었으니 무시한다.
“이 주화는 광해신금이다. 광해금화 백개와 교환이 가능하다.”
30g짜리 충무공이 양각된 텅스텐 주화.
모든 화폐의 모델은 충무공이다.
본래 광해의 얼굴을 새기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으나 광해가 적극 조져버렸다.
그렇다고 이황 이이 따위를 새기느니 충무공의 공에 천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한다.
“가져온 화폐는 이렇게 양팔저울에 올려 무게를 재고, 물에 넣어 크기를 잰다. 만약 이물질을 넣어 가짜 화폐를 만들었다면 이 단계에서 잡힌다. 너희가 직접 만들지 않았다면 화폐를 거래한 이를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여라.”
은화의 순도를 관리하지 않으면 순도 99%의 은화를 녹여 순도 5%의 은화 스무 개를 만든다.
유럽 국가들은 국가단위로 은화의 순도를 낮춰 이득을 보기도 했고 이에 경쟁이 붙어 결국엔 누구도 은화를 믿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실제 이런 사례들로 자본경제가 몇 차례 정지했다.
무게와 부피로 은화를 관리하기 시작하자 비중이 비슷한 납 등을 안에 넣고 겉에 은을 살짝 씌운 진짜 같은 가짜 주화가 등장한 적도 있다.
“그리고 한 번씩 이렇게 은화 중간을 자르는 시험도 한다. 안에 이물질을 넣어 은화인 것처럼 속이는 행위도 없어야 할 것이다.”
무게와 부피, 내부 확인 삼 단계를 거치면 위조화폐 대부분을 잡아낼 수 있다.
“향후 국가에서 지불하는 모든 봉급은 화폐로 지불된다. 모든 화폐는 광해상회에서 쓸 수 있으며 기타 상단들도 화폐를 적극 이용하도록 하라.”
관리와 병사들의 녹봉을 화폐로 주기 시작하면 알아서 화폐가 시장에 풀리게 된다.
이후 편리함을 깨닫게 된 백성들이 참여하면 화폐 경제가 활성화 되는 것이고.
“잘 보면 모든 주화는 톱니바퀴 테두리가 있다. 이는 테두리를 깎아 부스러기를 취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고의로 테두리를 깎아 부스러기로 이득을 보려 한다면 그건 중범죄이며 그런 화폐는 받지 않는다. 또한 출처를 찾아 주화를 손상시킨 이의 전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역사 속에 세계 곳곳에서 여러 차례 화폐를 발행한 일이 있지만 경제만 파괴하고 실패했다.
대부분의 이유는 위조화폐를 잡지 못해서다.
“화폐를 개인적으로 주조하는 것은 최악의 중범죄다. 주조한 당사자는 사형, 구족은 전 재산을 몰수한다. 이를 신고한 이는 몰수한 재산의 절반을 줄 테니 개인적으로 화폐를 주조하는 자를 신고하도록 하여라.”
화폐위조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린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화폐의 최소단위를 은전, 쌀 네 말 가치로 잡았다.
철전이나 동전 같은 소액 화폐가 있으면 편하겠지만 그런 걸 허용하면 누군가 반드시 위조화폐를 만든다.
신고제를 채택했어도 전국 깊은 산속 모든 곳을 관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위조화폐가 퍼진다.
그래서 금과 은만 화폐가 될 수 있다.
신의 금속.
누구도 대량으로 만들 수 없는 귀물.
신만이 만들 수 있는 선물.
금과 은을 갖고 있다면 굳이 위조하지 않아도 가치가 있다.
애써 위조하느니 그자체로 교환하면 된다.
그래서 금과 은만 화폐가 될 수 있다.
거창한 행사를 통해 광해은행이 문을 열었지만, 백성들은 그저 관광하듯 멀리서 황금탑만 구경할 뿐이다.
제대로 이용할 만큼 재산이 없었으니.
대신 숨겨진 부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쌀 사십석이 있소. 은화로 바꿔줄 수 있겠소?”
갓 쓴 양반이 조용히 들어와 물었다.
쌀은 비를 잘못 맞으면 썩어서 버리게 된다.
넓은 광을 방수상태로 유지해야 하고, 때때로 광에서 꺼내 습기를 말리는 작업도 해야 한다.
은화로 바꿀 수 있다면 바꾸는 게 이득이다.
“은화 열개요. 금화 하나와 은화 네 개로 교환해도 되오. 쌀을 가져오면 품질검사 후 교환해 드리겠소.”
“알겠소. 여봐라. 쌀을 들여라.”
장정들이 쌀을 가져와 은행 뒤 창고에 쌓았다.
은행마다 거대한 창고부터 설치한 이유였다.
“국가에 재산을 바치면서 토지 천결에 대한 권리를 받았소. 화폐로 받을 수 있다는데?”
신사업에 참여할 용기가 없던 양반들이 권리증서를 가져왔다.
백관에게 따로 교육받은 은행원이 증서를 보고 가치를 산정했다.
“금화 천오백 개. 혹은 신금 열다섯 개와 교환할 수 있소.”
단위가 커지자 텅스텐 주화가 등장했다.
“신금. 그건 도대체 뭐요?”
금은 삼국시대부터 귀물로 여겨져 장신구 왕관 등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신금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다.
은행원이 금화와 신금을 꺼내 보여주었다.
무게는 같지만 크기는 훨씬 작은 텅스텐 주화.
번쩍임도 없어 나란히 있는 금화에 비해 볼품없어 보인다.
“신의 금속이오. 은과 금은 땅을 파면 나오지요? 이건 오직 광해님만 만들 수 있는 금속이라오. 그래서 안전하지. 누구도 위조할 수 없고 오직 광해님만 만들 수 있는 화폐. 천년만년 지나도 광해신금은 안전하오.”
은행원의 장담에 양반이 조심스럽게 신금을 들어보았다.
철로 만든 것 같은데.
이정도면 쉽게 위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말하지만 광해님만 만들 수 있소. 혹여 당신이 이와 똑같은 주화를 만들어 가져온다면 내 금화 백개를 드리겠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만들어 오시오.”
은행원이 장담했다.
신의 금속이라.
이게 있으면......
“알겠소. 신금 열네 개, 금화 구십 개, 은화 육십 개로 주시오.”
신금은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쓰고.
양반은 나름 효율적으로 화폐를 교환했다.
“집에 숨겨두실라오? 이 큰 돈을? 은행에 맡기는 건 어떻소?”
“맡기다니?”
“매년 은화 하나의 수수료를 받아 돈을 보관해줍니다. 당신이 와서 증서를 내민다면 언제든 찾을 수 있소. 큰 비에 떠내려가거나 도둑맞을 걱정에 끙끙대느니 은행에 맡기는 게 속편하지 않겠소?”
최초의 은행은 돈을 보관해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이게 은행의 본업이기도 하다.
“오. 좋소. 은화만 가져가겠소. 돈을 맡기겠소.”
“이름, 나이, 손도장을 찍으시오.”
한지 두 장을 겹쳐 증서를 만들고 암구호를 정했다.
일치하는 한지를 가져와야만 돌려받을 수 있다.
“증서를 분실한 경우 가족의 증서로도 찾을 수 있소. 가족을 데려와 증서를 만들고 따로 숨겨두면 걱정 없을 것이오. 암구호는 절대 잊지 마시고 누구에게 알리지도 마시오.”
“아. 알겠소.”
이중 삼중 안전장치에 양반은 안심하고 돈을 맡겼다.
도둑을 걱정하느니 은화 한 냥을 수수료로 내는 게 낫다.
전국의 부자들이 등장해 숨겨진 재산을 내놓고 은과 금을 받아간다.
그럼에도 광해은행의 금고는 비지 않는다.
고액은 텅스텐 주화로 가져가고 텅스텐 주화는 금과 달리 만들려는 양만큼 만들 수 있다.
높은 탑에 가득 찬 금화는 자본주의 신뢰의 상징이다.
자본 시스템이 멀쩡하고 언제든 맡긴 재산을 되찾을 수 있다는 뜻이니.
국가가 철전이나 동전 등 소액권의 위조화폐를 막지 못할 때 화폐경제가 무너진다.
금과 은의 양이 충분하지 못해 화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질 때 화폐경제가 무너진다.
그래서 텅스텐 주화를 1년 반 전부터 꾸준히 주조해 산더미처럼 쌓았다.
금과 은처럼 화폐는 신만이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녹는점 3400도의 텅스텐을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광해는 신이다.
이영덕은 어려서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며 학문에 뜻을 꺾었다.
가문의 중심에서 멀기에 음서를 받지도 못했다.
그저 가문의 은결을 관리하며 적당히 거드름피우는 평화로운 삶을 살았는데 광해로 인해 모든 것이 깨졌다.
이 후 생존을 위해 양반의 난에 가담했고, 생존을 위해 관북지방에서 광해소망교를 연기했고, 생존을 위해 요동에 갔다가 이성량에게 억류되어 포로생활을 했다.
이성량의 포로생활은 나름 삼시세끼 잘 챙겨줬기에 딱히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을 강제 구출한 거지들이 싫었다.
“가자.”
“아니 꼭 내가 가야겠소?”
“가야지. 네가 조선의 만행을 멈춰달라며?”
“아니. 그래도 굳이 내가.”
이영덕은 거지에게 하소연했다.
개방 입장에선 조선 때문에 속이 썩고 있었다.
조선의 속셈을 알아냈지만, 황제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아니 황제에게 보고가 올라갔는지조차 의문이다.
신하들은 앞서 조선 사신을 막았던 자들이 줄초상을 치르면서 깨갱 엎드려 있다.
이런 정세에 조선이 딴 마음을 먹고 있다고 보고해봤자 역적으로 몰려 죽을 지경이다.
산서와 하남에서 적의 수괴를 잡아 시커먼 속을 드러내게 하려다가 천여명의 협객이 사라졌다.
이제 개방과 조선은 한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
개방에선 꾸준히 국경 너머로 간자를 보냈다.
한족의 제국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충성스런 개방도들.
꾸준히 보내는데 돌아오는 이 하나 없다.
대체 조선 땅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개방에선 삼장로 장우영을 보내기로 했다.
“나 말고 이귀대감. 그 양반을 보내지.”
“조선 고관은 다른 곳에 필요하다. 네가 한성에서 심양까지 이어지는 첩보선을 구축해라.”
“아놔 미치겠네. 조선말을 아는 자로 채우면 또 몰라.”
“하찮은 오랑캐의 말 따위 배울 생각 없다. 가자. 조선의 헛된 꿈이 더 부풀기 전에 무너뜨려야 한다. 산과 숲으로 숨어 다니면 된다.”
“그런 생각이니 보내는 족족 죽는 거지.”
“건방진 오랑캐새끼. 닥치고 출발해.”
“아오. 진짜. 일단 노래라도 외우시오. 따라 불러. 영광 영광 광해 전하~”
“혹세무민하는 노래인가.”
“일단 외우라고. 썅!”
이영덕은 최소한의 준비를 하고 의주로 향했다.
음서로 관직에 오른 이한성은 학식도 재능도 부족했다.
그래서 의주라는 조선의 변방 끄트머리에 발령받았고, 거기서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예전에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으나 운 좋게도 도성에 난리가 나서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가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오늘도 의주 변방에서 하릴없이 압록강을 보고 있는데 강 건너에서 삼십여명의 무리가 넘어왔다.
“멈추시오. 어디서 오는 이들이오?”
“아핫. 수고하십니다. 나리. 저희는 광해소망교 성주지단 교인들로 명에 가서 비단을 사오란 의뢰를 받았습니다. 짊어진 것은 비단이고, 여기 의뢰서가 있습니다.”
이영덕은 위조한 의뢰서를 보이며 짐꾸러미를 펼쳤다.
무능한 이한성은 의뢰서가 맞는지 구분할 능력도 없었고, 경상도 성주까지 가서 확인할 길도 없었다.
이한성이 의뢰서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 이영덕이 팔꿈치로 뒤에 서 있는 삼장로를 툭 쳤다.
“영캉 영캉 강해 저나~”
보부상으로 분장한 개방도 서른 명이 세상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세상 어색한 노래를 불렀다.
이한성은 그들의 이상한 노래에 분노해 쏘아봤다.
“요즘은 그 노래 안 부르오. 한번 뵙고, 두번 뵙고, 자꾸만 뵙고 싶네~ 짜자자자자자 짜자자자~ 그 누구~나 한번 뵈면 자꾸만 뵙고 싶네~”
이한성은 이 노래가 좋았다.
“새로운 찬송가요?”
“그렇소. 악성 모현성공께서 지은 찬성가요. 이 노래를 부르시오. 모두 사랑하네~ 광해 사랑하네~”
“한번 뵙고 두번 뵙고...”
“통과!”
이영덕이 노래를 따라 부르자 이한성은 통과를 외쳤다.
찬송 부르는 자 중 나쁜 놈 없다.
등 뒤에 수만 대군이 있으니 문제 있는 자들이면 그들이 처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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