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광해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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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만력제는 제방이 생각났다.
“대학사. 제방 보수는 어찌되었지?”
질문을 받은 내각의 수장이 앞으로 나와 엎드렸다.
“제방이 무너진 이래로 하남과 안휘 지역은 비가 날 때마다 홍수가 낫사옵니다. 새로운 물길이 깊지 않기에 제방을 쌓아야 하는데 수천리 길에 제방을 쌓는 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니 작은 비에도 물이 넘쳐 농경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옵니다.”
중국 하남에서 안휘까지 한반도의 몇 배나 되는 땅이 모두 평야다.
얉은 구릉조차 찾기 어려운 드넓은 평야.
덕분에 수천만 명을 먹여 살릴 산물이 생산되는 축복의 땅이지만 치수가 무너지자 재앙이 되었다.
정주에서 남으로 꺾여 회하까지 이어지게 된 황하 주변은 모두 평지다.
한번 넘치면 전부 잠긴다.
이곳에 제방을 쌓아야 하는데 이게 1~2년에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너진 곳을 수선해 황하가 원래 물길로 돌아가야 하는데.
“무너진 곳의 낙폭이 십장이옵니다. 십만 명을 동원해 쌓아보려 했지만, 도저히 쌓을 수가 없으며 예산도 부족하옵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기에 복구가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지만, 실제로 복구하기 어렵기도 했다.
낙차가 워낙 크기에 멀리서부터 토지를 쌓아가며 복구해야 하는데 이는 사람 십만 명을 동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1938년 장개석이 무너뜨렸을 때도 전쟁 등으로 바쁜 일이 있었지만, 복구하는데 10년이 걸렸다.
중장비가 존재하는 시대에도 이럴진대 인력만으로 복구한다는 것은 명나라의 국력을 전부 쏟아 부어야 가능하다.
즉, 심각성을 모르는 명나라는 복구하지 않는다.
실제 역사처럼 300만 명 쯤 아사하고 나서야 국력을 총동원하게 될 것이다.
“중부는 매년 홍수에 시달리고 있으며 북부는 매년 가뭄으로 흉년이 들고 있사옵니다.”
황하가 끊어지고 약간만 지나면 본래 흐르던 지류가 모여들어와 다시 황하를 이룬다.
다만 강물이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황하의 엄청난 양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주변지역에 지하수를 공급하는데 상류에서 오던 물이 끊기자 중하류 지역에 지하수가 부족하게 되었다.
지류에서 흘러온 물은 잠시 흐르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고, 한 주만 비가 멈춰도 밭이 쩍쩍 갈라지게 된다.
중부는 홍수.
북부는 가뭄.
광해가 제방을 무너뜨리고 1년 반이 지나도록 명나라는 두 번의 흉년을 겪었으며 올해 또한 흉년이 예보되고 있다.
1년 반 동안 홍수에 대해 손 놓고 놀았던 만력제가 드디어 일을 하기로 했다.
“홍수. 가뭄. 해적질까지. 모두 조선의 책임이다. 백성들의 원한을 조선에 돌려라.”
만력제가 망군이라 하지만 절대 바보가 아니다.
국정에 손을 놓고 놀았다 하지만 진정 무능했다면 48년 동안이나 제위를 지키진 못했을 것이다.
만력제의 정치란 간단하다.
불만이 폭발할 때마다 본보기를 죽임으로써 경고를 보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왔다.
적당한 부패는 용인하되 선을 넘으면 귀찮지만 죽이는 것이다.
이번 표적은 조선이다.
“그러하오면 조선의 왕을 불러 심문하겠나이다.”
대학사가 말하자 만력제가 한심하게 봤다.
“부른다고 올 리가 있겠느냐. 정벌해 끌고 오너라. 대도독부에서 병사를 일으키고 요양성 이성량을 도지휘사로 임명해 합류하도록 하라.”
“예. 폐하.”
명나라의 조선 정벌이 매우 간단히 결정되었다.
명령서가 작성되고 파발마가 여기저기 부지런히 달렸다.
광해는 은신마법으로 자금성 곳곳을 제집처럼 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황제의 조선 정벌 명령은 열흘 전에 선포되었고, 모든 부서가 전쟁 준비에 매달렸다.
군을 일으키고, 화약, 화포를 점검하고, 보급계획을 수립한다.
하북, 산서, 산동에서 부대가 차출되어 요령성으로 떠나고, 요령군 오만과 요동성 용호장군 누르하치군 이만이 징집되었다.
각 지방에 방을 붙여 가뭄 홍수를 조선 탓으로 돌려 민심을 수습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광해는 손을 써보기로 했다.
황제가 자는 침전 건물 전체를 잠재우고, 막을 씌워 소리를 막았다.
찰싹. 찰싹.
“으음.”
살찐 황제가 싸대기를 맞아 정신을 차렸다.
“무엄하다. 누구냐?”
잠이 덜 깬 만력제는 횡설수설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광해는 굳이 왕의 복장을 숨기지 않았다.
“나 조선 국왕 광해다.”
“이놈. 어디 하찮은 자객이 감히.”
용감하게 호통치는 만력제.
광해의 손에 무기가 안 보이는 점에 용기를 얻어 침전 위에 은신했을 호위를 부르려는 뜻이겠지.
물론 그들은 전부 잠들어 있다.
“조선 출병을 멈춰라.”
“감히 천조의 황제가 속국 자객의 말을 들을 성 싶으냐. 여봐라 누구 없느냐?”
손으로 앞을 가리며 재차 소리친다.
광해는 쉽게 가기로 했다.
철사를 꺼내 배에 서너방 꽂아줬다.
“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황제의 입을 발로 막으며 말했다.
“조선 출병을 멈춰라.”
“끄으으.”
다시 찔렀다.
“끄아아악.”
“조선 출병을 멈춰라.”
“으으 을긋스.”
입에서 발을 뗀 광해가 다시 말했다.
“모든 일은 영길리가 벌였다. 조선을 적대하려거든 배에 난 피를 기억하라.”
황제의 비단 옷을 들어 배를 노출시켰다.
송곳에 구멍난 배 곳곳에 핏물이 흘러나온다.
배에 손을 댄 광해가 치료마법을 썼다.
구멍이 서서히 사라지고 통증이 없어지는 기적.
“조선을 적대하면 다시 오겠다.”
만력제가 놀란 눈을 꿈뻑꿈뻑 뜰 때 광해가 사라졌다.
악몽을 꾼 거 같은데 배와 의복, 침상에 흘러넘친 피는 진짜다.
한참 후 만력제는 직접 침전을 나섰다.
침전에 배치된 궁녀와 내시, 호위내시가 전부 잠들어 있었다.
침전 밖으로 나가 깨어 있는 내시를 불러 뒷정리를 지시했다.
잠들어 있던 인원은 전부 고문당하러 가고, 침전 주위엔 동창과 금의위 등 열배의 호위가 섰다.
다음날 만력제는 모든 관료를 불러 모았다.
“조선 출병을 멈춰라. 조선을 모해하는 짓은 멈춰라.”
“허엇. 황상폐하.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전날 영길리 자객이 날 죽이려 침범했다. 천조의 적은 영길리다. 공격을 멈추고 자객에 대비하라.”
마법으로 은신해 지켜보던 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후 열흘간 곁을 지켰다.
수많은 호위 속에 웅크린 만력제.
확실히 자기 목숨 귀한 줄은 안다.
‘이제 돌아갈까.’
마법으로 숨어서 지켜보는 것도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광해는 사람이고 편한 게 좋다.
그게 아니어도 숨어서 똥오줌 싸고 수라간 음식을 훔쳐 먹는 것도 귀찮다.
황제가 잠든 것을 확인 한 후 자는 것도 열 받고.
세뇌마법이 가장 좋지만, 마력이 너무 많이 든다.
되면 진작했지.
호감마법을 지속적으로 넣기엔 너무 멀리 왔다.
그렇다고 평생 명나라 황제 곁을 지키는 건 불가능하고.
‘다시 방문해 협박을 한 번 더 할까?’
한번 접근해 협박할 때마다 마력 50만 이상이 소모된다.
아깝다.
말도 잘 듣는데.
내일 돌아가자.
그랬는데.
“조선을 정벌하라. 개한마리 풀 한포기 남기지 마라. 모조리 죽여라.”
만력제가 발악했다.
고문을 받던 침전의 궁녀들이 거짓자백을 한 탓이다.
고문당하던 궁녀들이 수면제를 탔다고 자백하자 광해의 초자연적인 일은 만력제의 착각처럼 되었다.
“조선이 궁녀들을 매수해 자객을 들였다. 조선 출병을 막겠다며 짐의 침소에 피를 뿌렸다.”
치료마법으로 고통을 지우자 피만 남았다.
이것이 만력제를 착각하게 만들었다.
“조선을 살려둬선 안 된다. 모든 국력을 쏟아 조선을 정벌하라.”
분노한 만력제의 일갈에 관료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광해는 서둘러 마법진을 그렸지만, 마법이 완성되기도 전에 명령이 끝났다.
‘제길. 모현성이 비웃겠네.’
그리던 마법진을 지우고 다른 마법진을 그렸다.
정전 상공에 검은 먹구름이 생성되고 다량의 전자가 만들어졌다.
‘이제 유도하면... 응?’
콰릉. 콰르르릉.
유도하기도 전에 낙뢰가 떨어졌다.
광해는 몰랐지만, 이 시대 건물 지붕에는 낙뢰를 막기 위한 부적으로 동전을 다량 올려놓는데 이게 피뢰침의 역할을 한다.
건물 주위 나무로 갈 번개가 금속에 이끌려 건물로 떨어지는 것이다.
번개를 막기 위한 부적이 번개를 끌어오다니.
잘못된 지식은 안하느니만 못하다.
수십 발의 낙뢰가 떨어지자 정전엔 금세 불이 붙었다.
“황상을 모셔라.”
“피해라. 폐하부터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광해는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토벽을 만들었다.
정전의 입구와 창문에 높은 벽이 생겼다.
“흐억. 이게 무슨!”
“뚫어. 뚫어야 해.”
지붕의 불길이 아래로 내려오고 연기가 차오른다.
토벽까지 완성한 광해는 은신한 상태로 이동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이리저리 헤매는 만력제를 철사로 찔러 죽이고 자리를 피했다.
만력제가 죽고 정부 고관 삼십여 명이 죽었다.
만력제가 죽으면서 마력 이백만을 빼앗겼다.
황제란 추상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황제에게 뭐 하나 받은 것 없는 자들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빈다.
답 없는 유학자에서 농민까지 그저 신앙처럼 황제가 장수하길 바란다.
그런 힘없는 자들의 작은 소망이 모여 만력제에게 달린 원한을 누르고 거대한 소망을 만들었다.
광해에게 남은 마력은 백만 가량.
소모가 너무 크다.
광해는 이항복이 북경에 마련한 안가에서 사태를 지켜봤다.
조정은 즉각 장례절차에 들어갔고, 사흘 후 태자 주상락이 황위에 올랐다.
정전 화재 때 전부 죽기를 바랬지만, 살아남은 이가 꽤 있었고, 만력제가 죽기 직전 했던 말이 태자에게 전해졌다.
태자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선언했다.
“조선의 자객이 화재를 일으켜 선황을 암살했다. 천조는 전력을 다해 조선을 정벌한다.”
홍수와 가뭄으로 고통 받는 백성의 원한을 조선에 돌려야 한다.
황제가 천벌을 받아 번개 맞고 죽었다는 소문을 진압해야지 내버려두면 반란이 일어난다.
정치란 그런 것이니까.
세뇌를 포기한 광해는 주상락에게 번개를 날렸다.
다음 황제는 만력제의 삼남인 주상순.
태자의 아들 주유교가 황제가 될 줄 알고 미리 작업하고 있었는데 정말 뜬금없는 놈이 황제가 되었다.
주상순 또한 선대 두 황제가 번개 맞아 죽은 것을 조선 탓으로 돌렸다.
너무 불가사의한 일이라서 암살은 생각도 못하는 건가.
황제가 따라야 할 메뉴얼이라도 있나.
광해는 포기했다.
“실패?”
“어.”
“이건 형이 작업을 더럽게 못한 거 같은데? 형 예전엔 대체 어떻게 황제된 거야?”
모현성 따위한테 욕 먹다니.
“나야 보통사람이었잖아. 그냥 살려고 발악했지. 온갖 잡기로 다 때려 부수면 부하들이 알아서 뒤처리했지. 반란 일어나면 때려 부수고 싸우다 지면 도망치고. 뭐 그랬지.”
“에휴. 형이 죽이고 얻은 기술 중에 지능 올려주는 기술은 없었어? 이거 완전 능지처참이네. 처참한 지능.”
“그런 기술은 없었지만, 미래를 보는 기술 하나는 얻었다. 네가 잠시 후 고통에 몸부림 칠 미래가 보이는구나.”
따악.
“오고고곡. 어쨌든 전쟁은 막을 수 없네.”
“그렇지. 어차피 전쟁이 필요하긴 했잖아.”
“어. 이 정도면 됐어. 사전 작업도 거의 끝났고.”
“그래. 싸움 준비해라.”
“어.”
다음날부터 조선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항복은 국경에서 요령의 제왕 이성량과 누르하치에게 재물을 줘 뒷공작을 했고, 이덕형은 포섭한 명나라 각지의 호족들에게 전쟁 발발을 알리고 그들이 할 일을 추천해줬다.
곽재우는 압록강의 진지를 재확인하고 부대의 훈련도와 작계를 점검했다.
3월에 전쟁을 선포한 이후 명나라 중앙군 십만명이 모여 요양성에 도착한 건 5월이었다.
거기서 요령성의 오만명과 누르하치의 만주족 기마병 이만명이 합쳐져 십칠만 군세를 이뤘다.
부대는 조선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데헷.
실패해버렸지 뭐얌.
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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