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로의 흉계
대륙의 깊숙한 서쪽 어느 숲.
올곧이 자라난 나무들은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다.
온통 짙푸른 나무로 뒤덮인 숲 속에 우뚝 서있는 이질적인 흰 색 탑 하나.
달빛도 내리쬐지 않는 밤에 탑만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슈왁-
생명체의 기운이라고는 단 1도 느껴지지 않는 이 곳에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졌다.
생겨난 것은 동그란 타원형의 아공간.
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2명의 영감이었다.
한 명은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배불뚝이 영감에 또 한 명은 아주 긴 작대기 같은 인물의 영감이었다.
어쩜 저렇게 극과 극의 모습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둘다 흰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마법사인 듯했다.
"타노...이거 우리가 늦은 건 아니겠지?"
"그러게 빨리 좀 오자고 했더니~ 자이로가 또 화낼 거라고!"
"...자이로는 화 안 내. 자애로운 자이로잖아~ 그래도 나도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 몰랐지... 여튼 얼른 들어갑세."
이야기를 주고 받던 둘은 탑의 앞에 섰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출입구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작대기 같은 모습의 마법사 하나가 손바닥을 허공에 펼쳤다.
팟-
일순 그의 손바닥이 강한 빛을 뿜어낸다.
놀랍게도 탑 앞에 하얀 색의 계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빨리 가자! 그 인간들이 화를 내기 전에~"
둘은 그대로 계단에 올라섰다.
슉-
순간 계단이 엄청난 속도로 짧아지며 둘은 그대로 탑으로 빨려 들어갔다.
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 곳은 빛의 탑.
필멸의 존재들 중 이 곳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백마법사들 뿐이다.
세상의 모든 백마법을 연구하고 모든 흑마법사들을 척결하는 데 앞장서는 이들이 바로 빛의 탑 소속의 백마법사들이었다.
그 말인즉슨 방금 탑 안으로 들어간 2명도 백마법사란 말이었다.
탑 안으로 들어간 둘은 계단에 선 채 그대로 탑의 꼭대기까지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탁-
제일 상층에 도착하자 눈앞의 문이 둘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쩌억 벌리고 둘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곳은 빛의 탑의 제일 상층부, 오로지 대현자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안은 매우 심플했다.
가구도 없고 단지 형식적인 커튼만 쳐져 있다.
단지 방 한가운데에 원탁이 놓여져 있고 각각의 의자에 대현자들이 앉아있었다.
원탁의 주위에는 아직 모든 인원이 도착하지 않은 듯 지금 막 도착한 2명을 빼고도 2자리가 비어 있었다.
"지각 좀 하지 말라니까~ 마우"
"늦을 수도있지~ 그걸 왜 그러나~ 허허허~"
누군가 둘을 향해 투덜거리자 자이로가 웃으며 투덜거림을 막았다.
"어허허허. 미안해~ 빨리 오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그만~"
이들 모두는 대륙에서 늘 언제나 칭송받는 대현자들이었다.
물론 각각의 위치는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국가에 소속이 된 자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계속 연구를 거듭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속세에 초월한 이들이었기에 항상 대현자들은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모이는 집회는 딱 2번이었다.
그렇기에 오늘 열린 대현자들의 모임은 정기적인 일정이 아니었다.
대현자들의 수장인 자이로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급히 임시로 모인 것이었다.
얼추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빛의 탑의 수장이자 대현자 중 한 명인 자이로가 원탁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모두들 오셨는가. 빈 자리가 있는군. 퍼스가 없고... 나머지 하나는 흠 애닌가? 생각보다 늦군.”
“퍼스야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 제국에서 멸망시켰지 않나. 그 전쟁에서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얘기는 들었네만 현재의 행방은 전혀 알 수가 없는 걸로 알고 있네. 적어도 무사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는 셈이지. 그리고 애니야 원래 워낙 어디에 있는 지 알 수가 없으니 연락이 닿았는지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
대현자 중 한 명인 스웬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했다.
“흠. 그랬지. 거기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 정치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와는 또 다른 법이니. 그럼 나머지 2명이 오든 안 오든 시작하는 데에 이의가 없나? 모두들.”
나머지 대현자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 그럼 이번 임시 회동을 시작하겠네. 오늘의 회의는 좀 중요하네. 모두들 통곡의 벽에서 몬스터들이 신성교단제국을 계속 두드린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겠지? 거기에서 흑마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어서 오늘 이렇게 모두를 긴급소집하게 되었네.”
순간 조용하던 회의실이 자이로의 발언에 시끌벅적해졌다.
“아니, 흑마법? 그럴 리가 있는가. 우리가 흑마법사란 족속들을 멸절시키기 위해 얼마나 힘을 쏟았는가. 또다시 흑마법이란 말인가. 자이로. 자네 잘못 본 게 아닌가? 허허. 이거야 원...”
얼굴을 잔뜩 찌뿌린 채 대현자 중 한 명인 스웬은 연신 수염을 쓰다듬었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눈매의 소유자인 스웬의 눈매가 더욱 좁아지며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다른 대현자들 또한 흑마법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매우 놀란 얼굴로 서로 간에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로부터 흑마법과 백마법은 상극 중의 상극이었다.
악마의 힘을 빌리는 흑마법은 백마법사의 입장에서는 보이는 족족 소멸을 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몇 백 년 전 흑마법사들이 창궐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모든 백마법사들은 빛의 탑의 모든 것을 걸고 흑마법사들과 일전을 벌였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헬름을 죽이는데 성공을 했었다.
당시 헬름이 죽음과 동시에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은 어둠 속에 묻혀갔다.
그런 그들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자자, 조용~ 그래서 우리는 대책을 강구해야 하네. 흑마법이 발견된 이상 단지 나라와 나라만의 싸움이 아니네. 우리가 나서서 그 버러지 같은 흑마법사들의 씨를 말려버려야 하지 않겠나? 아직 그들의 세력이 크진 않지만 이대로 기생충마냥 사람들에게 스며드는 것을 막아야지.”
“맞아.”
“그렇지.”
자이로의 발언에 따라 나머지 대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슈륵~
자이로는 그들의 대답이 끝이 나자 허공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원탁의 중심에 조그만 상자가 나타났다.
상자 안에서는 육안으로 식별될 정도의 검은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 이런 흑마법의 기운이라니! 이런 게 아직 존재했단 말인가! 꽤나 강한 기운이구만~"
안토니스가 상자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내가 여기 흑마법이 사용된 매개체를 하나 구해왔네.”
“호오, 이걸 어떻게 구해왔나? 역시 우리 빛의 탑의 수장이군. 그래서 그 쥐새끼 같은 흑마법사들이 저걸 사용하고 있단 말이지?”
타노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네. 이걸 이용해 마물들을 조정하고 있는 것 같더군. 아마 통곡의 벽의 상황도 이들이 만든 게 아닐까 하네.”
“이런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녀석들같으니라구. 얼른 그 녀석들의 우두머리를 잡아서 소멸을 시키는 게 최상이 아닐까 싶네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거기 상자를 한번 열어보겠나? 마오.”
자이로의 말에 마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손을 가져다 상자를 열었다.
상자가 열린 곳에는 검은 색의 구슬이 덩그라니 놓여져 있었다.
“무슨 구슬이지? 이건.”
상자를 연 마오가 구슬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
슈왁-
순간 구슬 속에서 검은 빛이 나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둥근 방 가장자리에 숨겨져 있던 몇 개의 구슬로부터 짙은 검은 빛이 쏘아져 나왔다.
그 빛은 상자 안의 구슬과 공명을 하며 자리에 앉아 있는 대현자들을 속박했다.
“아니, 이게 무엇인가!”
안토니스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이로를 향해 물었고 나머지 대현자들 또한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자이로를 쳐다보며 똑같은 말을 했다.
자이로는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허허, 아니, 별 건 아냐. 내가 그리고 우리 카이저 제국이 대륙을 지배하는 데 있어 자네들이 너무 걸림돌이 되더라고.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해두지 않으면 내가 어찌 자네들을 잡을 수 있겠나? 자네들이 한꺼번에 덤비면 이기기도 힘들고 말이지~ 그래서 약간의 아주 약간의 수를 좀 썼지. 허허~”
“설마 네 녀석..네 녀석이 설마 흑마법에 빠진 것이냐···? 대현자이자 빛의 탑의 수장이 감히 흑마법에 손을 댄단 말이냐!”
스웬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자이로를 향해 이를 갈며 말을 했다.
“아아. 너무 억울해 마. 자네들이 사라지면 날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사라지게 되지. 드래곤이 와도 절대 지지 않을 정도의 전력 또한 곧 갖추게 되니까 말이야."
"이놈..."
대현자들의 표정은 자이로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하하. 아니 뭐 그렇다고 자네들을 죽이진 않을 거야. 자네들이 해줄 일이 있거든. 그리고 지금 자리에 없는 퍼스와 애니 또한 내가 찾는 즉시 자네들에게 보내줄 테니까 억울해 하지 말고 들어가 있게나들~”
자이로는 말을 맺으며 손을 다시 휘저었다.
슈와악-
자이로의 손짓에 따라 원탁에 놓여져 있던 구슬 안에서부터 공간이 생겨났다.
그 공간은 구속된 대현자들을 끌어당겼다.
모두가 빨려들어간 공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상자는 자동으로 닫혔다.
탁-
자이로는 미소를 띤 채 상자를 집어들었다.
슉-
갑자기 방 한 쪽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나타났다.
바로 회의에 빠졌던 퍼스와 애니였다.
“아아... 벌써 늦어버렸는가...”
자이로는 마나의 파동이 느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자신을 노려보는 둘이 서있었다.
“아... 자네들 이제서야 오면 어떡하나~ 거참... 상자를 다시 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여기서 죽여버려야 하나? 아니지... 필요하긴 한데...흠...”
자이로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얼굴에서 저렇게 흉악한 말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네 녀석. 도대체 어디까지 타락한 것이냐... 이미 카이저 제국의 기사들의 마나홀을 살펴보았지. 교묘하게 흑마법을 잘도 숨겨놨더군. 모든 것이 네 생각대로 이뤄지진 않을 것이다. 베어른 왕국의 복수는 물론 모든 것을 되갚아주마... 일단은 물러가겠지만 내가 다시 너에게 오는 날은 너의 죽음이 될 것이다.”
퍼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얘기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이로의 웃음이 방 안에 울려퍼졌다.
어찌나 웃긴지 눈물마저 훔치는 자이로였다.
“요 근래 들은 농담 중에 제일 재미있는 말이 아닐까 싶네만. 글쎄... 곰곰이 생각을 해봐~ 자네의 실력으로 날 잡을 수 있겠나? 그리고 일단 우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생각하는 게 어떻겠나?”
자이로는 말을 마치자마자 재빠르게 손을 휘저었다.
슈욱-
순식간에 퍼스와 애니가 서있는 곳에 오망성이 그려졌다.
[라그나 블라스트]
순간 둘이 서 있던 자리에는 화염의 기둥이 솟아났다.
[워터 월]
[텔레포트]
자이로의 마법에 당하기 직전 퍼스와 애니의 입에서 서로 다른 주문이 발현되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캐스팅이 늦었으면 둘은 통구이가 될 뻔했다.
불기둥이 휩쓴 자리에는 그들이 땅을 디뎠던 발자국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아아, 놓쳐버렸나~ 도망은 참 잘도 치는군. 뭐 어차피 남은 2명 정도 잡는 건 일도 아니지. 허허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자이로였다.
"기다려라. 이제 진정 내가 원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모두를 내 발 밑에 두고 내려다 볼 것이니. 허허허허~~”
[텔레포트]
자이로는 그들이 간 자리를 잠시 쳐다본 후 몸을 돌려 빛의 탑에서 빠져나갔다.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에 벌어졌다.
빛의 탑을 지탱하던 대현자들은 그렇게 퍼스와 애니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이로에게 구속이 되어 버렸다.
자이로마저 떠난 빛의 탑의 공간에는 희열에 가득 찬 자이로의 웃음소리만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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