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롬에 온 불청객
팟-
공간이 열리며 레온, 에리얼, 레이에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셋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어느 숲의 언저리였다.
“여긴 어디입니까?”
“흐음. 보자...”
레이에나가 허공에 몇 개의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 대륙의 지도가 보여지면서 그들이 있는 위치가 드러났다.
“아이쿠. 이런.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드워프 왕국 쪽으로 와버렸네요. 이걸 어쩌죠?"
화들짝 놀라는 레이에나.
레이에나가 실수를 했다는 듯 뺀질거리는 얼굴로 말을 했다.
-너 이 녀석... 일부러 이 곳으로 온 거 아냐?
"에이~ 그럴 리가요~ 정말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길이 헷갈린 거에요. 헷.갈.려.서. 에헤헤..."
이건 분명히 고의적인 행동이다.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 에리얼이 아니었다.
하긴 드래곤이 워프를 하는데 그걸 틀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어째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게 영 불안하긴 하지만 이왕 데리고 나온 것 이제 와서 물릴수도 없고...
"앗! 저기는 드워프 왕국의 수도인 브.롬. 이잖아요! 이럴 수가!"
레이에나의 손가락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은 레이에나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 곳에는 산 하나가 있었다.
레이에나는 이미 저 산만 보고도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뻔히 속이 보이는 레이에나의 행동이다.
-...저기로 가고 싶냐?
"아... 저야 에리얼 님이 바쁘시다는 건 알지만 잠시 목이나 축이면 어떨까...하네요~ 이것도 다 운명 아니겠어요?"
-...레온. 넌 어떠냐?
"후후. 레이에나 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잠시 들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아직 란테아의 봉인이 풀렸다는 소식은 없었다.
풀렸다면 분명 자신의 감에 란테아가 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 꺼림칙한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
-흠...
“그...그럼 브롬에 정말 잠깐만 들러서 목만 좀 축이고 가도 되지 않을까요? 에리얼 님~”
레이에나는 망설이는 에리얼에게 다급히 말을 이어갔다.
-너 뭔가 다른 속셈이 있냐?
“에헤헤. 에리얼 님. 그럴 리가요~ 정말 잠깐만 들렀다 가시죠~ 목만 축이고 얼른 가시죠~”
-할 일도 많은데 정말 말은 지지리도 듣지 않는구만.
“에이~ 에리어얼 니임~”
몸을 비비 꼬는 레이에나.
어쩌면 저렇게 표정이 바뀔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물끄러미 레이에나를 바라보는 레온.
그는 요즘 들어 가끔 드래곤이 과연 지상 최고의 생물이 맞는가라는 의구심이 들곤 했다.
모든 드래곤이 다 저런가 싶기도 하고 레이에나가 별종인가 싶기도 했다.
순간 상념을 깨는 에리얼의 한 마디.
-에라. 모르겠다. 바로 지척이니 금방 들렀다 가는 거다. 레온, 너는 괜찮으냐?
“네. 전 어차피 괜찮습니다. 드워프 왕국도 한번 가보고 싶긴 했구요.”
-그래. 이왕 여기까지 와버린 것. 도마뱀 녀석이 말한 대로 잠시 들렀다 가자.
“으흐흐. 에리얼 님. 그럼 조금만 빨리 가시죠~ 헤헷.”
레온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냐. 인간. 왜 웃는 거냐? 내가 웃기냐?”
레이에나는 눈을 부릅뜨며 레온을 획 째려보았다.
“아닙니다~ 얼른 가시죠. 하하.”
레이에나는 찝찝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도 잠시.
[블링크]
브롬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두 명의 호위병이 서 있었다.
키가 땅딸막하고 얼굴 전체에 수염이 가득한 드워프들이다.
나름 멋을 부린 듯 멋드러지게 수염이 꼬아져 있었다.
오고 가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성문 앞은 한적하기만 하다.
"크흐. 거슨. 교대하면 맥주 한 잔 어때?"
"벨프롬. 지난 번에도 그러다 만취해서 자네 부인에게 나까지 욕 먹었잖아!"
"그 때는 좀 많이 마셨고 오늘은 진짜 한 잔만 하세~ 으흐흐"
"...정말 한 잔이지? 괜히 또..."
"크흐흐. 당연하지~ 기분 좋게 마시고 딱 헤어지자고~"
오늘도 평화로운 드워프 왕국의 거슨과 벨프롬이다.
그런 그들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인간.
레온 일행이었다.
"휘유~ 굉장한데요?"
"그렇지? 얘네가 이런 걸 잘해. 의외로 쓸모가 많은 종족이라고. 성문부터 봐라. 아마 지하로 가면 더 깜짝 놀랄걸?"
"네? 지하에도 궁전이 있나요?"
"그 얘기 못 들어봤냐? 드워프 왕국을 알고 싶은 자 지하로 내려가라."
"아~ 그렇군요~ 처음 알았어요."
레이에나의 말은 레온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끽해야 2층 정도의 높이인 성문이었다.
규모가 생각보다 작아 내심 실망한 레온이었다.
하지만 성문에 조각되어 있는 문양이며 장식들은 장인의 한땀 한땀이 스며들어 있다고 할 만큼 완벽한 세공을 뽐내고 있었다.
“멈춰라!”
“누구냐! 너희들은! 어디에서 온 건지 밝혀라!”
갑작스레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수상한 인간 셋.
평소에는 딱히 방문자도 없는 이 곳에 지극히 수상해 보이는 자가 셋이라니.
두 명의 근위병들은 들고 있던 해머를 이용해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
-오랜만에 만나는군. 드워프들은.
“역시 못 생겼죠? 손재주에 비해 얼굴에 대한 미의식이 너무 부족한 것 같지 않아요? 역시 신도 이런 걸 보면 참 마냥 자애로우신 건 아닌가 봐요~ 에리얼 님.”
“호오... 전 드워프를 처음 봅니다.”
레온이 드워프들을 보며 말을 거들었다.
여전히 경계태세 중인 근위병들.
자신들을 앞에 두고 노닥거리는 것이 영 수상하다.
“보아하니 인간 같은데 이 곳까지는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상 즉결처분하겠다!”
순간 레이에나가 그들을 홱 노려보았다.
홱-
레이에나의 두 눈을 드워프들이 보았다.
그 눈의 깊은 곳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을 흉폭함과 광기가 여과없이 표출되고 있었다.
털썩-
그 눈을 본 거슨과 벨프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무의식 중에 다리에 힘이 풀린 듯했다.
지나온 세월이 그들의 뇌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감히 누구에게!”
드래곤 피어가 퍼져 나간다.
마나가 잔뜩 실린 듯 산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퍼져 나갔다.
우르르-
일순 지진이라도 온 양 아래위로 격하게 흔들리는 드워프 왕궁.
덜덜- 덜덜덜-
“위...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사...사...살려 주십시오... 제가.. 처자식이···5명입니다···.”
브롬의 성문을 지키던 2명의 근위병들은 그제야 레이에나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에리얼 님, 저렇게 보니 레이에나 님도 드래곤이 확실하군요.”
-훗. 우리한테 매일 까여서 그렇지. 쟤도 무서운 애야. 괜히 도마뱀이겠냐?
레온과 에리얼은 귓속말로 속닥거리며 레이에나를 바라보았다.
땡땡땡-
브롬 전체에 위급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슨 일이냐?!!!”
망루에서 상급자로 보이는 또다른 한 명의 드워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의 시선에는 땅바닥에 바싹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는 근위병이 보였다.
"저 녀석들 지키라는 문은 안 지키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네?
망루에 있던 드워프는 근위병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앞에는 세 명의 인간이 서있었다.
'고작 인간인데 근위병들이 왜 저러고 있지?'
약간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으로는 저 인간들은 분명히 적임에 틀림없었다.
“적이다!”
상급자의 외침에 모든 드워프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드워프의 왕인 에인돌프 또한 갑작스런 지진과 소리에 놀란 듯 신하들과 성벽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뭐냐! 뭔데 종이 울리는 것이냐?”
“저기를 보십시오! 폐하!”
성벽의 책임자의 손을 따라 이동한 에인돌프의 시선은 레이에나에게서 멈췄다.
허공에서 부딪히는 에인돌프와 레이에나의 시선.
둘은 정면으로 서로의 눈을 쳐다본다.
찌릿-
갑자기 에인돌프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룩 흐른다.
‘아... 설마...’
에인돌프는 질질 끌리는 망토를 손으로 잡은 채 성문으로 헐레벌떡 내려갔다.
"아이고~ 왜 그러십니까~ 전하~"
"전하~ 천천히 가십시오~ 넘어지십니다~"
영문도 모른 채 왕을 따라 내려가는 신하들.
잠시 후 성문 앞에 왕과 신하들이 레이에나의 앞에 도착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
“위...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왕은 내려가자마자 근위병들과 마찬가지로 땅에 넙죽 엎드렸다.
“미천한 것들.”
레이에나의 차가운 시선이 그대로 에인돌프에게 쏟아진다.
“죄...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제야 신하들도 왕이 왜 저런지 알아차렸다.
왕이 위대한 존재라 칭할 것은 오직 한 종족 뿐이다.
맙소사...
드래곤이라니...
성문 앞에 나온 드워프들은 모두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이런 썩을 드래곤 같으니...'
고개를 바싹 땅에 붙이고 있는 에인돌프의 얼굴이 잔뜩 찡그러졌다.
“이...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시지 않으십니까...”
“아아~ 긴 여정이지. 너희들이 그렇게 부탁을 하니 가서 목이나 좀 축이고 갈까? 인간 가자. 에리얼 님 들어가시지요.”
에인돌프의 귀에 에리얼 님이라는 단어가 쏙 박혀들었다.
‘응? 님? 에리얼 님? 저 오만한 드래곤이 님?’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깊게 할 시간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왕국이 오늘로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에인돌프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레이에나를 안내했다.
“얼른 이 분들을 안내해 드려라. 한치의 실수도 없어야 할 것이다.”
신하들은 에인돌프의 명에 따라 생애 최고의 속도로 뒤뚱뒤뚱 뛰어갔다.
잠시 후 레온 일행이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브롬의 알현실이었다.
"와... 이건 정말..."
-정말 대단하군.
레온은 입이 떡 벌어졌다.
드워프들의 모든 땀이 녹아들어 있는 듯한 알현실이었다.
궁중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 하나하나부터 알현실의 집기 하나까지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었다.
이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곳인지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이리로..."
에인돌프가 안내를 했다.
신하들은 눈도 못 마주치겠다는 듯 고개만 숙이고 있는 참이었다.
안내를 받은 레온 일행은 알현실의 중앙을 향해 걸어 들어가 멈춰섰다.
하지만 레이에나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대로 왕좌에 털썩 앉는 레이에나.
-하···
에리얼은 한숨을 푹 쉰 후 레이에나에게 자신에게 오라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저요?"
영문을 모른다는 듯 레이에나는 왕좌에서 내려가 에리얼에게 갔다.
딱-
순간 레이에나의 머리를 쥐어박는 에리얼.
에인돌프를 비롯한 모든 드워프들은 사색이 되었다.
저 인간은 도대체 뭐길래 드래곤에게 저런 짓을 한단 말인가!
'하아... 드래곤을 때리는 인간이라니...어째 아침부터 재수가 그렇게 좋더라니...'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에인돌프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악! 왜요...에리얼 님...”
-오만한 놈. 상대방을 존중하는 법 정도는 알아라.
“제가... 실수를 한 게... 있나요...?”
당연한 행동을 했는데 왜 그러냐는 듯한 레이에나의 표정이다.
에리얼은 진심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지끈 눌렀다.
-여하튼 저 자리는 네가 앉을 자리가 아니다. 내 옆에 서 있어라.
이들의 투닥거림을 지켜보던 에인돌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위대한 존재시여. 이 분들은···”
“이 분은 바람의 정령왕인 에리얼 님이시구요. 전 레온이이라고 합니다. 아~ 물론 전 인간입니다.”
레온이 레이에나 대신 얼른 대답을 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드워프들.
그들은 입이 떡 벌어진 채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저...정령왕이라니···”
“그...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저마다 떠들어 대는 드워프들.
하긴 정령왕을 지금껏 본 적이 없으니 놀랄 만도 하다.
믿을 수도 없지만 드래곤이 가만히 있는 이상 정령왕임에 틀림없다.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이라고 한다. 볼일이 있어 가는 중에 잠시 들렀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드워프 왕국의 왕 에인돌프입니다. 그래서 어쩐 연유로 이 곳까지···?”
레이에나가 앞으로 나서 말하려는 찰나.
에리얼이 손으로 레이에나를 저지했다.
괜히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목적지에 가는 중에 잠시 들렀을 뿐이다. 일이 끝나면 여유롭게 한번 들르도록 하마.
에리얼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뭘 또 온다고···.’
헙-
순간 자신의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에인돌프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 그러시군요... 에리얼 님. 더 계셔도 괜찮습니다만...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이 에인돌프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이미 에인돌프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괜찮다. 다음에 정식으로 들르겠다. 그럼 이만. 가자.
“네. 에리얼 님.”
레온은 에리얼의 말을 따랐다.
엑??????
레이에나의 표정만 완전 경악에 가득 차있었다.
“아···아니. 에리얼 님...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그래도 맥주 정도는···.”
부릅-
에리얼의 강력한 시선이 레이에나에게 쏟아졌다.
삐죽-
간만에 온 드워프 왕국을 이렇게 바로 떠나다니...
드워프의 맥주는 진미 중에 진민데......
하지만 에리얼의 말에 반항할 수 없는 레이에나였다.
레이에나는 풀이 죽은 채 곧장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셋.
사아아아-
그들이 사라진 곳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악...나 지금 살아있지?”
레온 일행이 사라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에인돌프.
“폐하~~”
“폐하~~”
십 년은 수명이 줄어든 듯하다.
십 년이 뭐냐? 한 20년은 사라진 듯했다.
몸이 축 늘어지는 게 일생의 운을 다 써버린 듯한 감각이었다.
에인돌프는 이제야 그들이 갔다는 것을 실감하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
‘...다시는 안 왔으면 좋겠는데···’
드래곤과 정령왕 그리고 같이 다니는 한 명의 인간이라.
뭔가 조합이 기묘하긴 했다.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역풍을 맞을까봐 물어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얼른 정리해라!"
괜히 부하들에게 성질을 버럭 내는 에인돌프.
그리고 그대로 알현실을 떠나갔다.
나머지 드워프들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왕궁을 정리하기 위해 부랴부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성문에 소금 뿌리는 것 잊지 마라!”
소심한 에인돌프의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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