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져가는 봉인
온통 어둠이 내려앉은 어느 숲 속 깊은 곳.
이 곳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리네갈 제국의 깊은 어느 곳이다.
주변에 인가라고는 단 1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이조차 없는 이 곳.
깊은 숲 속 공터 쪽에서 마치 주변의 어둠을 밀어내는 양 연신 짙은 녹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주위를 환하게 비춘 녹빛은 중심으로 갈수록 점점 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검은 색의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인원수는 50여 명.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슈오오오오-
짙은 녹빛의 풍경을 그려내는 자들은 그 곳에 모여 있는 검은 로브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각의 자리에 위치한 채 마법진이 그려진 눈앞의 작은 비석에 자신의 마나를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었다.
"커억..."
한 쪽에서 답답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 중 한 명이 마나가 고갈이 된 듯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이내 빈자리가 채워지고 작업은 멈춰지지 않았다.
보충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주변 사람이 쓰러지건 말건 계속 마나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들이 쉬지 않고 뿜어내는 녹빛의 마나에 반응이라도 하듯 비석에서는 지극히 어둡게 느껴지는 암회색의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걸 하지 않으면 곧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미친 듯이 마나를 뿜어대고 있는 그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비지땀에서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이 일에 매달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슈와악-
일순 그들의 뒷편에서 마나가 일렁거렸다.
열린 공간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소매 부분에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로브가 눈에 띈다.
흰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나이가 꽤 있어보이는 사람이었다.
"허허허~"
그의 얼굴은 자애로운 미소가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로 카이저 제국의 대마법사이자 빛의 탑의 수장인 대현자 자이로이다.
하지만 그가 왜 굳이 이런 곳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더군다나 리네갈 제국의 영토에.
그가 온 것을 알아챈 마법진의 총 책임자인 자이로의 수석제자 히도르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허허. 그래. 수고가 많구나. 그나저나 이 곳이냐?”
“그러합니다. 역시 저희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이미 봉인 해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흠. 좋아. 허허허."
만족스러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이로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 그리고 다크엘프 쪽은 확실히 행동을 지시해 두었습니다.”
"그래. 일은 시간을 끌면 안 되지. 그 일은 다크엘프들만이 할 수 있으니~ 허허."
"네. 끝나는 대로 그 곳으로 오라고 일러 두었습니다."
자이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테아를 봉인에서 푸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 말이야.”
“아무래도 신이 직접 한 봉인이다 보니...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
이것은 신의 봉인이었다.
필멸의 존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싸맸던 자이로가 선택한 것은 신의 봉인을 역이용하는 것이었다.
신의 봉인을 뿌리부터 흑마법으로 오염시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그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자이로가 찾아낸 방법은 대성공이었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리는 게 단점이었지만 봉인 해제는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리네갈 제국이나 다른 곳에서 눈치채기 전에 얼른 끝내야 한다. 리네갈 제국에서 꼬리가 붙지는 않았느냐?”
"안 그래도 게르도가 보낸 듯한 몇 명이 붙었습니다만, 마법을 걸어 다른 곳을 헤매게 해두었습니다."
"좋아. 늦어지게 되면 우리의 대업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 넌 봉인을 푸는 데에만 집중해라."
“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상황인지라...”
히도르가 말끝을 흐리며 비석 쪽의 흑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봉인이 봉인인만큼 거기에 드는 마나량이 어마어마했다.
이대로라면 대륙 전체의 흑마법사들을 다 불러 모아도 모자랄 듯했다.
일주일 정도 걸릴 것이라 말은 했지만 그것도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허허. 아무래도 봉인이 단순한 봉인이 아닌 탓일 게지. 그럴 줄 알고 내가 준비해 온 것이 있단다.”
자이로는 로브의 안쪽을 더듬더니 하나의 상자를 꺼냈다.
달칵-
열린 상자에는 구슬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이 구슬은 무엇입니까?”
“그런 게 있다. 이것이 지금 작업을 훨씬 수월하게 해 줄 것이야.”
자이로가 구슬을 집어들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일렁~
자이로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구슬로 마구 흘러 들어간다.
우우우웅-
구슬이 자이로의 마나에 반응을 하듯 공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구슬 전체를 검푸른 마나가 감쌌다.
“이 마나는 혹시... 제가 예상하는 그것입니까?”
“허허. 맞다. 이것을 이용하면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것이야~ 허허헛.”
“역시...과연 스승님이십니다.”
“받거라. 비석 앞에 두면 알아서 움직일 것이야.”
히도르가 마나가 일렁거리는 구슬을 조심히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비석 앞으로 다가가 앞에 구슬을 놓아두었다.
구슬에서 넘실거리던 검푸른 마나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마냥 기어가듯이 비석을 향해 다가가 비석을 감싸기 시작했다.
구슬의 마나가 비석을 전부 감싸는 순간 비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마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흑마법사들은 부담이 훨씬 덜어진 듯 일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헉헉-
"모두 숨을 좀 골라라~"
히도르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흑마법사들을 잠시 쉬게 했다.
자이로의 눈에 지쳐 있는 흑마법사들이 보였다.
그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차피 소모품들. 란테아여~ 얼른 잠에서 깨어나거라.'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뗀 자이로는 비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수염을 쓰다듬었다.
크으흐흐흐-
비석의 깊은 곳에서 란테아의 거친 흐느낌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소리는 마치 어둠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 자이로를 제외한 모두의 모골을 송연케 했다.
“들리느냐? 허허허. 저 소리. 역시 자신의 봉인이 약해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나 보구나.”
자이로의 목소리가 희열에 가득 차올랐다.
"소리가 아주 으스스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간 원한이 꽤나 깊을 테니. 허허허."
“아!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만 대현자 중 퍼스와 애니가 도망쳤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들은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훗. 퍼스와 애니? 그들은 이 대업에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장기말조차도 안 되는 녀석들을 굳이 뭐하러 신경을 쓰느냐. 우선은 이 일이 급선무다.”
자이로가 단호하게 말을 했다.
그에게서 제일 우선 순위는 오로지 란테아의 봉인을 푸는 것 밖에 없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 대륙을 손에 넣는 것이 저희의 목표 아니겠습니까?”
“저 란테아만 있으면 드래곤 또한 발 밑에 둘 수 있을 테지.“
“드래곤들말입니까? 그들이라면... 이 대륙에서 사라진 지 한참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드래곤들이 지금은 활동을 하고 있지 않지. 하지만 란테아가 풀리면 그들도 움직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 허허허.”
“점점 스승님의 목표에 접근하고 있군요. 스승님의 원대한 계획에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히도르는 진심으로 탄복한 듯한 얼굴을 한 채 자이로를 올려다 보았다.
“허허허허~”
자이로는 히도르의 말에 흡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명심해라. 방심은 금물이다. 얼마나 걸릴 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히도르는 자이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란테아. 마음껏 이용해 주지. 넌 나의 원대한 계획에 가장 튼실한 발판이 될 것이니.’
음하하하하하-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자이로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히도르가 그런 자이로를 쳐다 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돌려 비석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멀지 않았다.
곧 자신의 세상이 다가올 것이다.
리네갈 제국의 영토에서 자이로가 그려둔 큰 그림이 하나씩 퍼즐을 맞춰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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