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seomint
작품등록일 :
2020.06.23 19:26
최근연재일 :
2021.02.03 20:25
연재수 :
163 회
조회수 :
26,361
추천수 :
1,654
글자수 :
1,331,740

작성
20.12.24 19:48
조회
31
추천
3
글자
17쪽

왕위 계승 - 8

DUMMY

“나라의 부를 측정하는 기준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국고에 돈이 가득하다 하여 반드시 풍요롭다고 보기에는 힘들고, 지배하는 땅이 넓다 하여 꼭 강대국인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국고에 돈을 채워넣을 능력이 되니 부유한 것이며 방대한 대지를 온전히 자신의 지배 하에 둘 수 있기에 강대국이라 불리웁니다. 그러니 나라의 부유함을 올바르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조금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나는 잠자코 유만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만은 나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일까, 설명이 친절하다. 단계를 밟아가며 차분히 나아가준다. 나는 유만이 이끌어주는 대로 조용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유동인구와 무역량, 이를 조사하면 영지의 부를 대략적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영지에 얼마나 많은 상인이 오고 가느냐를 보면 그 영지의 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돈이 오고가는 상업은 철저히 실리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경제규모를 수치화할 수 있었던 것도 현대에 들어서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무역에는 부가 따라오는 법이다. 도시국가였던 베니스가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고작해야 도시 하나 규모의 나라가 함대를 꾸렸을 정도니 말이다.


“임의적으로 이를 기준으로 하여 저희 영지가 얼마나 부유했는지 대략적으로 추측해 보았습니다. 다만 미리 말씀드리건데 사료의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오차는 어느 정도일까요?”


“만약 누락된 정보가 있을 시에는 오차의 수준을 범어날 것이라 예측되옵니다.”


“감안하고 듣겠어요. 그렇게 사양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유만도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혹시 치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과거는 과거에 불과하다. 그것 때문에 내 명예가 더럽혀질 일도 없을 뿐더러, 도리어 좋지 않은가. 어려웠던 과거는 빛나는 현재를 더욱 찬란하게 비춰준다.


“선대 영주님께서 다스리던 영지의 무역량은 타 영지 대비 절반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추측하건대 풍요로운 영지의 이점을 살려 내수 중심으로 운영하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허나 군사력을 위해서는 철광석이, 영지민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식량이 필요합니다. 어느 쪽이든 충분하다면 타 영지에서 먼저 무역을 신청할 터입니다.


이를 보아 선대 영주님께서는 타 영지와의 교류를 최대한 피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유는 불명입니다. 다만 선대 영주님의 선견지명이 들어맞아, 덕분에 영지는 짐승의 사태에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연찮게 들어맞은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예견하여 행동한 것인가. 후자의 가능성이 더욱 높겠지.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모든 것들이 기묘하게 들어맞는다. 마치 미리 준비해둔 톱니바퀴처럼 하나가 또 다른 하나의 현상과 연결되어 거대한 기계를 움직인다.


유만이 강조했듯 사료의 정확도는 좋지 않다. 설마 정말로 암거래 내용을 영수증으로 남겨두기나 했겠는가.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무역량이 타 영지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유만은 그리 멍청한 사나이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는

타당한 근거를 함께 들고온다. 겉으로 드러난 영지의 무역량과 영지의 발전 상태가 얼추 들어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꺼낸 말이리라.


누락된 정보가 없다면... 유만 입장에서는 누락도 이런 누락이 없으리라. 장부 하나가 아예 사라진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저희 영지가 가난했다는 근거로서는 부족하지 않나요?”


“화폐 유통량과 무역량이 적으면 영지는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허나 이것이 꼭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실례로 선대 영주님께서는 영지를 순조로이 성장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괜히 변호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무역을 하지 않고서도 부유해질 수 있던 영지. 만약 무역을 했다면 대체 얼마나 돈을 끌어모을 수 있었을까? 부는 부를 창조한다. 있는 자들은 어떻게 굴러가도 돈이 벌리고, 없는 자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일정 수준 이상의 부를 쌓을 수 없다. 인간사회의 경제구조는 그렇게 되어있다.


여하튼간 우리 영지는 표면상 드러난 것 이상으로 벌어댔을 터다. 몰래 번 돈은 몰래 썼거나 모아뒀겠지. 영지 내에서 보물찾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다만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비밀의 재화를 찾으려면 영지를 거의 뒤집어 엎어야 한다. 시간상 힘들다. 그렇게 번 돈, 일부인지 전부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돈은 분명 얀 레페르코의 주머니에도 들어갔다. 어떤 형태로든, 그렇게 하여 환심을 샀을 것이다.


지금도 의심스러운 건 과연 얀 레페르코가 유형의 ‘돈’이란 가치를 무형의 ‘은혜’란 가치로 돌려줄만한 인간인가, 하는 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 밀수, 숨겨진 장부와 거래, 영지를 위해 살아갔다는 덕망 있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번 돈을, 단 한 푼도 영지를 위해 쓰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정보가 부족하다. 여기서부터는 신중하게 형태를 깎아나가야 한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털어내고 숨겨진 형태를 부상시켜야 한다.


“일단 더 조사해보죠. 아직도 서류는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말이에요.”


그리고 결론을 쥐어짜내기에는 이르다. 내 눈앞에 쌓여있는 정보를 정리하고 나서라도 늦지 않으리라. 유만은 내 앞에 쌓여있는 서류더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교육자로서 그다지 뛰어난 인물이 아니다. 경험이 많지도 않고, 머리가 비상하지도 않다. 아가씨는 내 성실함을 평가해주시고, 그건 기쁘다.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나은 부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내가, 그나마 다른 사람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성실해야만 했다.


경쟁... 다른 사람들은 영지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었겠지만, 나는 외부인이었다. 지금은 아가씨의 곁에서, 이곳이 자신의 고향인 양 행동하고 있지만 과거의 나는 타인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다. 돌아갈 곳도 없으니, 필사적이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 성실하게,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내 존재의의라 생각했다.


주위에 사람은 많으나, 오히려 많을수록 내 고독이 강조된다. 저 수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답답함에, 매일처럼 심장이 떨리듯 고동쳤다.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고민 따위는 사사롭게 느껴질 정도다. 나의 인생을 좌우하는 건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내 곁을 지켜주는 한 명의 사람이다.


왕자님에겐 라탄이 그런 존재가 아닐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단순히 왕자님을 모시는 하인의 태도는 아니다. 오랫동안 타인을 모시는 입장에 서있던 나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도 있다. 애착, 애정, 아니, 그보다도 조금 더...


“왕자님께 도움이 된다면 배워두겠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합니까?”


라탄은 문득 그리 질문해온다. 라탄의 표정에는 약간이나마 불만이 섞여있다.


나는 왕자님뿐만이 아니라 라탄도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리고 솔직한 왕자님의 교육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가르치면 가르친 대로 흡수하며, 의문을 표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어릴 때를 반면교사로 말하자면 절로 고개를 가로젓게 되는 방식이지만, 내 본분을 잊으면 곤란해지는 건 아가씨다. 선행은 아가씨께 폐를 끼치지 않는 선 안에서만 행해야 한다.


교육이라 하여도 단기간에 어떻게든 효과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무식하게 암기해야 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장기적으로 지식을 쌓고 싶다면 논리가 탄탄하게 받쳐줘야 하지만, 한 달이란 시간은 돌아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암기 작업은 어떻게 해도 내가 도와줄 수 없다. 그 사이 나는 라탄의 교육도 병행하

고 있었다. 이걸 교육이라 불러도 괜찮을지 의문도 든다. 가르친다는 의미에서는 매한가지긴 하다.


나는 지금 라탄의 머리카락을 빗어주고 있다. 라탄은 머리결부터 피부까지 거칠기 그지 없었다. 평민들 사이에 섞여있으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궁정 안에서는 어떨까. 당장 아가씨 곁에 서있으면 차이점이 극명히 드러난다.


왕자님의 하인에게도 격은 요구된다. 왕족을 모시는 자가 볼품이 없으면 주인의 품격마저 의심받기 마련이다. 나도 모자라나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몸 매무새에 신경을 쓰고 있다. 여자로서, 가 아니다. 아가씨의 시종으로서.


“물론이죠. 지금까지처럼 왕자님을 모시는 걸로는 불충분합니다.”


라탄도 기본 바탕은 좋다. 하지만 어떠한 원석도 닦지 않으면 빛나지 않는다. 좋은 머리결이 아깝다. 분명 관리하면 다른 귀족 못지 않게 아름다워질 수 있을 텐데. 이이서 내가 안대를 건드리자, 라탄은 황급히 놀라며 내 손을 막았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라탄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리 차가웠다. 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뒤로 돌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잠시 후, 라탄이 나를 다시 부른다. 얼굴 반쪽을 깔끔하게 안대로 가려두니 혐오감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흉터가 있다 하여 사람을 혐오하는 건 옳지 못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타인을 배려하는 건 아니고, 궁정이란 장소는 인상을 중요시한다. 아름다우면 좋지만, 적어도 깔끔하게는 보여야 한다. 다만 홀로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감을 수 있다는 건, 할 수 있으면서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다. 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일까?


괜히 탐색하지 말자. 나는 그리 마음먹었다.


“라탄님께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왕지님을 지켜왔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께 왕자님이 소중한 존재란 건 알 수 있습니다. 지키고픈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앞으로는 그래서는 안 돼요. 라탄님은 철저히 왕자님을 보좌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제 말투가 너무 험한가요?”


라탄은 내 질문에 가만히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종이란 너무 눈에 띄어서는 안 되나, 필요한 순간에는 그곳에 있어야 한다. 나는 속으로 자조했다. 잘난 듯 충고하기에는 나도 남말할 처지가 못 된다. 저도 모르게 아가씨께 잔소리를 해버리니.


“왕자님이 만약 허름한 옷을 입고 궁정으로 간다면 모두가 왕자님을 비웃겠죠. 라탄님은 왕자님의 얼굴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니 그만큼 외면에 신경을 써야합니다.”


라탄은 영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납득하지 못한 것일까, 하여 설득하려던 찰나 라탄이 입을 연다.


“그렇다면 차라리 당신이 왕자님의 시종으로서 같이 가면 되지 않습니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리 믿고 싶지만, 만약 라탄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가씨는 망설임없이 그렇게 하리라.


“당신은 아름다워요. 분명 왕자님도 당신과 함께하는 편이 더 든든할 겁니다. 요즘 사

이도 좋아보이잖습니까.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은데요?”


분명 왕자님과 사이는 나쁘지 않다. 좋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해도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어째서 그런 착각을 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저는 그저 왕자님을 교육하고 있을 뿐이에요. 사이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죠. 저는 왕자님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릅니다.”


“모르고서도 그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질투라 하여도 어쩐지 고집스럽다. 문득 단순한 질투로 치부하여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왕궁으로는 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파헤쳐도 될 이유는 아니다. 사적인 감정은 치워두어라, 그리 말하고 싶지만, 아가씨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른다. 아가씨는 ‘감정’을 추상적인 부산물로 치부하지 않으신다. 계획에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가능하다면 배제하려고 노력하신다.


배제. 어떻게?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왕자님의 시종은 당신이에요. 도저히 제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군요. 왕자님도 갑자기 시종이 바뀌어서야 제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들 거에요.”


라탄은 그 이상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라탄의 금발이 내 눈에 들어온다. 너무 길게 느껴진다. 장발이라 하더라도 관리만 잘하면 별 문제 없지만, 라탄의 경우에는 귀찮아서 자르지 않았다는 이미지가 강하게 풍겨온다. 거기에 나머지 반쪽에 머리카락이 거의 없다. 이발하거나 틀어올리는 편이 더 나을까. 나는 라탄의 머리카락을 재차 만졌다.


“왕자님은 제가 곁에 없기를 바라실 겁니다. 왕자님의 정신병은 분명 저에게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당신이 옆에 있을 때의 왕자님은 굉장히 평온해 보였습니다.”


“그럴 리가요. 잘못 보신 거겠죠.”


“오랫동안 왕자님을 모셔온 제가 말하는 겁니다.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정말로 그렇다면 어째서 왕자님이 당신을 곁에 두고 있겠어요?”


“죄책감 때문입니다.”


라탄은 그리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타인의 사생활을 파헤치고 싶지 않다. 나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라탄의 말이 사실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품게끔 만든 사건이 있었단 건 확실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있을 때의 왕자님이 정신병의 징후를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죄책감과 흉터. 멋대로 두 가지를 엮으려는 사고를 멈춘다. 나는 내 할 일에만 충실하면 된다. 아가씨는 왕자님을 인형이라 하였지만, 나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 그 정도면 만족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왕자님을 성실히 보필하셔야겠네요. 일단은 겉모습에서부터 바꾸는 거에요. 내일이면 아가씨가 왕자님을 테스트하기 위해 찾아오실 테니까요.”


내일, 왕자의 교육을 개시한 지 일주일되는 때다. 아가씨는 그동안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 업무를 보고 계셨지만, 오로지 왕자님 때문에 다시금 이곳을 찾아오는 것이다. 실망시킬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는 성공해야 한다. 일주일동안 시간을 낭비했다고 탄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반드시, 반드시.


테스트를 보는 건 왕자님과 라탄인데도 벌써부터 내가 긴장된다. 최선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왕자님은 내 교육을 기대 이상으로 잘 따라왔다. 준비했던 대로만 할 수 있다면 괜찮다.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도 안 돼요. 당신들은 일상으로 돌아오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겠죠.”


“선의의 거짓말입니까. 우습지도 않군요. 니카로프 공작님이 저희를 가만히 둘 것 같진 않아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 말을 믿고 싶습니다.”


라탄의 마지막 말이 내 죄책감을 찔렀다. 마냥 평화롭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에겐 이 영지, 올리치아령에서 한가로이 일상을 보내는 편이 더욱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괜스레 권력 싸움에 말려들어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보다는 훨씬.


왕족으로 태어난 숙명이라 위로해주고 싶지만, 그런 말이 도움이 되겠는가. 현실의 괴로움을 타고난 운명이라고 인정해버리는 순간, 도망갈 길을 틀어막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차라리 노력 여하에 따라 앞으로가 달라질 수 있다고 희망을 주는 편이 더 나으리라.


“...투덜거려 죄송합니다. 괜한 말을 했군요.”


라탄은 뒤늦게 그리 말하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렇지 않다고, 말하여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벼워지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됐어요. 어떤가요? 더 아름다워지지 않았나요?”


나는 손을 떼며 부드럽게 말했다.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틀어올리니 한 층 더 깔끔해 보였다. 원래 얼굴은 상당히 미인이니, 인상을 깔끔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부러 강조할 필요도 없다. 라탄은 거울을 들여다보더니 웃었다.


“저는 제 얼굴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 따위 한 번도 없습니다.”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시가 있는 말투였다.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너무 날이 선 반응이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괜한 말을 했나, 스스로의 언행을 되새겨본다.


왕자님도 왕자님대로 문제가 있지만, 라탄도 마찬가지다. 만약 아가씨가 이를 알게 된다면... 아니, 중요한 건 겉이다. 겉으로만 문제가 부각되지 않으면, 아가씨 또한 모른 채 해주시리라. 그런 세상으로 우리는 둘의 등을 떠밀고 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짐승들의 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중단합니다 +6 21.02.04 195 0 -
공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20.10.23 317 0 -
163 케펌 그레이드 - 2 21.02.03 58 0 17쪽
162 케펌 그레이드 - 1 21.02.02 41 0 16쪽
161 얀 레페르코 - 5 21.02.01 42 0 16쪽
160 얀 레페르코 - 4 21.01.29 58 0 17쪽
159 얀 레페르코 - 3 21.01.28 61 1 17쪽
158 얀 레페르코 - 2 +1 21.01.27 46 1 17쪽
157 얀 레페르코 - 1 21.01.26 52 1 18쪽
156 어머니 - 16 21.01.25 46 1 17쪽
155 어머니 - 15 21.01.22 41 1 17쪽
154 어머니 - 14 21.01.21 41 1 16쪽
153 어머니 - 13 21.01.20 35 1 17쪽
152 어머니 - 12 21.01.19 35 1 16쪽
151 어머니 - 11 21.01.18 65 1 17쪽
150 어머니 - 10 21.01.15 34 1 16쪽
149 어머니 - 9 21.01.14 37 1 16쪽
148 어머니 - 8 21.01.13 36 1 15쪽
147 어머니 - 7 +1 21.01.12 59 1 16쪽
146 어머니 - 6 +1 21.01.11 65 1 17쪽
145 어머니 - 5 21.01.08 42 2 17쪽
144 어머니 - 4 21.01.07 38 2 17쪽
143 어머니 - 3 21.01.06 57 2 18쪽
142 어머니 - 2 21.01.05 59 2 16쪽
141 어머니 - 1 21.01.04 71 2 17쪽
140 휴재입니다 21.01.01 60 0 1쪽
139 왕위 계승 - 13 +1 20.12.31 55 3 17쪽
138 왕위 계승 - 12 20.12.30 65 2 17쪽
137 왕위 계승 - 11 20.12.29 43 3 16쪽
136 왕위 계승 - 10 20.12.28 41 1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