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기사
흑석산은 곤륜산맥의 끝자락에 있는 전혀 유명하지 않은 산이었다. 사람이 아예 살지 않는 곳인데 가류와 천방기사라는 작자가 어떻게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비둘기로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치더라도 상대가 기른 비둘기를 가져와야 하는 수고가 있다. 비둘기는 어디로 가라고 알려주면 찾아가는 영리한 새가 아니다. 그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가는 능력이 뛰어날 뿐이다.
'방법을 모르니 직접 찾아가야겠지.'
무룡은 검 한 자루를 장만하고 은자와 재물을 넉넉히 챙겼다.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천방기사가 가류한테 보낸 편지들도 몸에 지닌 다음 혼자서 흑석산을 찾아 출발했다.
흑석산은 곤륜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어 중원에서 제작한 지도에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서역과 중원을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들도 지나지 않는 곳이어서 무룡은 늙은 교도들이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발품을 팔아 찾아내야 한다.
흑석산이 검은 바위로 이뤄진 산이어서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것처럼 어렵진 않지만, 곤륜산맥의 크기를 생각하면 마냥 쉬운 일도 아니다.
'흑혈초다.'
무룡은 독무곡을 떠나고 보름도 안 되어 준비한 음식을 다 소진했다.
다행히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희귀한 약초와 독초가 자주 눈에 띄었다. 무룡에겐 배를 불려주고 내공도 주는 훌륭한 먹거리였다.
무룡은 윗도리를 벗고 자하구를 명치에 댔다. 그간 자환신공의 경지가 오르면서 자하구를 단전 위치와 가까운 명치에 대야만 자하신공의 운기를 방해한다.
마환기공의 기초를 든든히 다지기 위해 무룡은 습관적으로 자하구를 이용해 자하신공을 억제했다.
그 작은 방심이 큰 화를 불렀다.
'구엽흑혈초였구나.'
흑혈초를 먹은 무룡은 몸이 마비되었다. 그저 흑혈초인 줄 알았는데 잎사귀를 아홉 개나 피운 구엽흑혈초였다.
'자하구를 떼야 한다.'
그러나 강렬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무룡의 몸은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이건 독이 강하고 약하고가 문제 아니다. 익숙한 강한 독보다 생소한 약한 독이 더 치명적이다. 자하신공의 도움을 받으면 생소한 독도 잘 대처할 수 있지만, 마환기공만으론 어렵다.
마비가 점점 심해져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면면불식 덕분에 내호흡으로 전환하며 몸에 지닌 내공이 숨이 되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마환기공은 흑혈초의 마비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신경독과 달리 흑혈초는 근육을 마비시키고 몸의 순환을 느리게 했다. 혈도들도 덩달아 둔감해지며 마환기공의 저항 능력이 약해졌다.
죽음의 공포가 절실하게 다가왔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줄기가 무룡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멍청한 놈. 물도 조심해 마셔야 할 놈이 무슨 실수를 한 거야.'
이미 흑혈초를 몇 번 복용했기에 자하신공의 도움이 없어도 된다고 오판했다. 마환기공의 경지에 큰 도움이 되는 흑혈초가 반가워서 잎의 개수를 세지 않았다.
노혼의 복수도 끝나지 않았고 친부모의 복수는 시작도 못 했다. 추영과 아이를 구해야 할 책임도 있고 계혼의 손이 멀쩡해지도록 도와야 할 의무도 있다.
자신을 믿고 오독교를 떠난 덕구가 독공을 제대로 익혀 독성이 되도록 도와줘야 한다.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귀한 흑혈초를 만났다는 데 정신이 팔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사부, 도와줘요.'
흑혈초를 복용하고 반나절이 지나 무룡의 내공도 간당간당했다. 흑혈초를 복용하지 않았다면 열흘도 숨을 안 쉬고 버틸 수 있는 어마어마한 내공인데, 흑혈초와 싸우느라 엄청 빠르게 소모되었다.
내공이 아예 소모되어 숨이 멈추려고 할 때 자하구가 밝은 빛을 뿜었다.
그리고 자하신공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미 기운이 고갈되었다고 느꼈던 혈도들에서 막대한 내공이 흘러나와 세차게 흘렀다.
'변했다.'
자하신공의 운기 경로가 조금 변했다. 단전에서 출발해 머리와 손발의 이백사십이 개 혈도를 경유해서 돌아오는 경로에 여섯 개 혈도가 추가되었다.
운기가 빨랐다면 무룡도 미처 몰랐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흑혈초의 복용으로 혈도들이 둔감해지며 내공의 흐름도 느려진 덕분에 무룡도 어렵게나마 혈도가 추가되었음을 알아챘다.
추가된 혈도는 각각 머리와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엉덩이 쪽에 분포되었다.
'살았다.'
무룡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서서히 조여오는 죽음의 공포는 다시 경험하고 싶은 생각이 절대 안 들 정도로 최악이었다.
무룡이 목숨을 구했다고 안도하는 사이 이변이 생겼다.
자하구가 꿈틀거리며 무룡의 손에서 벗어나 데구루루 굴러갔다. 뜻밖의 전개에 깜짝 놀란 무룡은 고개를 억지로 돌려 자하구의 행방을 주시했다.
자하구는 발이라도 달린 듯 경사가 높은 곳으로 굴렀다. 그러더니 봇짐을 헤쳐 무룡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고 온 흑백석을 먹어 치웠다.
흰 벽호와 검은 전갈을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흑백구는 조금씩 작아져 자하구에 흡수되었다. 흑백구를 흡수한 자하구는 오히려 부피가 줄었다. 대신 누가 봐도 나무가 분명해 보이던 외관이 조금 변해 돌인지 나무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자하구의 기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금 꿈틀거리더니 바로 붉은 뱀의 영역에서 발견한 세상에서 가장 동그란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구체를 흡수했다.
검은 돌을 흡수한 자하구가 더 작아졌다. 그리고 색도 새까맣게 변했다.
'설마.'
무룡의 예민한 귀에 트림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자하구가 입맛을 다시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자하신공의 도움을 받은 마환기공이 흑혈초의 독에 잘 대처하며 마비가 빠르게 풀려 호흡을 회복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자하구가 다시 움직였다. 푸른 섬여가 출몰하던 곳에서 찾은 푸른 보석을 꿀꺽 통째로 삼킨 자하구가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
'배가 부른데 내가 못 먹게 할까 봐 억지로 삼켰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무룡은 일순간 자하구의 생각을 읽었다. 어쩌면 자하구가 기쁜 나머지 속내를 겉으로 비쳤는지도 모른다.
'기생충인가?'
고蠱로 통칭하는 기생충은 다른 생물의 몸에 기생하는데 일부 지독한 놈들은 숙주를 통제하기까지 한다. 일례로 사마귀 같은 곤충을 죽이고 몸을 차지해 움직일 정도다.
피가 뜨거운 동물이나 인간처럼 사고 능력이 뛰어난 존재를 통제하는 고는 없다는 게 상식이지만, 자하구를 보니 그것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푸른 보석까지 삼킨 자하구가 데구루루 굴러와서 무룡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약간 과시하는 듯도 하고 애교를 부리는 느낌도 있었다.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니?"
어느새 마비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하구는 대답하지 않고 데구루루 굴러 봇짐 안으로 들어갔다.
'꼬박 하루를 허비했구나.'
엄연히 따지면 얻은 게 많은 하루다. 자하신공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며 마환기공의 수련도 괜찮은 성과가 있었다.
특히 자하구의 특별함을 발견한 건 큰 성과다.
그러나 추영과 아이를 구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무룡은 자신의 부주의로 하루를 허비했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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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구나.'
까만 바위만 보이는 자그마한 산이 보였다. 저놈의 이름이 흑석산이 아니라면 천하에 흑석산으로 불릴 자격을 갖춘 산이 없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무룡은 양손을 앞으로 모아 포권한 뒤 높이 외쳤다.
"독무곡 신임 곡주입니다. 천방기사를 뵈러 찾아왔습니다."
두 번 더 외쳤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자 무룡은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암계동이라고 했으니 동굴을 찾으면 되겠구나.'
"부득이하게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무룡은 흑석산의 검은 바위를 밟았다. 어지러운 느낌이 들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주변이 바뀌었다.
약 반 리 밖에 흑석산이 보였다.
'진법인가?'
천애고도에서도 그렇고 이 년 반 갇혀 살던 산에서도 그렇고. 진법의 신묘함은 충분히 확인한 무룡이다.
그러나 진법 안에서 술수를 부리는 게 아니라 진법 밖으로 사람을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조차 없다.
다시 흑석산 자락으로 간 무룡은 더 공손한 말투로 외쳤다.
"정말 중요한 일이니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한참 기다려도 아무 반응이 없자 무룡은 다시 흑석산의 검은 바위를 밟았다.
아까와 다른 방향이지만, 역시 흑석산과 반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동되었다.
'말이 안 된다.'
진법이 아무리 신묘하다고 해도 사람의 몸을 순식간에 반 리나 옮길 수는 없다.
'이 사람이라면 여의주 만드는 법을 확실히 알겠지.'
상대의 뛰어난 능력을 확인한 무룡은 오히려 희망의 불씨를 키웠다.
"후배의 진심을 헤아려 제발 대화해 주십시오."
꾹 인내하며 기다리던 무룡은 상대가 묵묵부답이자 다시 흑석산에 오르려 했다. 그리고 또 반 리 밖으로 이동되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오기가 불쑥 치민 무룡은 바로 달려서 흑석산으로 갔다. 그러나 검은 바위를 밟자마자 몸이 또 이동되었다.
'실제로 이동된 건 아닐 것이다.'
무룡은 눈을 감고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흑석산을 향해 기었다. 마찬가지로 어지러운 느낌이 들더니 조금 따듯한 느낌의 바위 대신 푸석푸석한 흙이 만져졌다.
'시각과 촉각을 속여도 후각은 못 속이겠지.'
코에 감각을 집중한 채 흑석산을 밟았다. 순식간에 반 리 밖으로 밀려난 무룡은 코를 강하게 자극하는 풀 내음에 살짝 당황했다.
"독무곡에서 왔습니다. 여기 당신이 내 사부한테 보낸 편지도 있습니다."
무룡은 봇짐을 열어 편지를 찾았다. 그런데 편지가 보이지 않았다. 편지뿐이 아니라 천방기사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한 재물들도 모조리 사라지고 자하구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네가 다 먹었니?"
자하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법을 이용한 눈속임인가?'
무룡은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었다.
'흑석산에 진법이 쳐진 게 아니라 이미 진법 안에 들어와 있구나.'
흑석산에서 반 리 거리에 있는 이곳도 진법에 포함된 게 분명하다.
잠깐 고민한 무룡은 다시 흑석산을 향해 걸었다. 어차피 진법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 꾸준히 산을 오르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다.
"포기 안 할 거야?"
약 삼 백 번을 밀려났을 때 문득 낯선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천방기사입니까?"
"그래, 내가 우주의 지혜를 꿰뚫고 삼라만상의 참모습을 파악한 천방기사다. 너는 누군데?"
"제자는 독무곡의 신임 곡주 무룡입니다."
"가류는 어떻게 되었지?"
"환골탈태역근세수비약을 저랑 반씩 나눠 마셨는데 저만 살았습니다."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룡은 미동도 하지 않고 상대가 반응하기를 기다렸다.
"좋다. 잠시 만나주지."
- 작가의말
고생한 당신, 기연 얻으러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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