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LL OF TEARS AND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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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빙
작품등록일 :
2020.07.0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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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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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은 술 취해 비틀거리고

DUMMY

저는 낡은 철모를 깊이 눌러쓰고 완전군장으로 100Km 야간행군을 하고 있었어요. 저녁 무렵부터 시작한 행군이었죠. 뭐, 연대훈련이라나 뭐라나. 밤을 새며 걸어 이동하는 훈련이었어요.

"아, 힘들다."

LMG 경기관총을 어깨에 멘 병사가 투덜거렸어요. 그는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군입대한 사람이었어요.

"야, 그게 힘들어?"

박격포 포신을 멘 병사가 말했어요. 그는 사법고시 준비생이었죠. 다들 자정까지는 그런대로 견딜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친 모습들이었어요.

"10분간 휴식!"


먼동이 틀 때쯤 되면 하얀 서리가 내려, 병사들의 철모와 소총개머리판 그리고 그들의 어깨가 하얗게 됐어요. 그러고도 졸면서 깨면서 걷고 또 걸었어요. 다음날 오전 10시경에 아침식사를 하고 야전 텐트에서 취침을 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잠에서 깨면 점심식사를 하고 또 다음 작전지역까지 걸어야했어요.


"너는 제대하면 뭐할 거니?"

소총을 가상의 적 부대를 향해 겨누며 김 병장이 물었어요.

"저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최 일병이 말했어요.

"그래? 악기는 뭐 다룰 수 있는데?"

김 병장이 물었어요.

"피아노를 칠 줄 압니다."

최 일병이 대답했어요.

"그래? 체르니 피아노연습곡을 쳐봤어?"

김 병장이 말했어요.

"예, 체르니 30까지 배우고 왔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최 일병이 말했어요.

"오, 대단한데... 너 노래 솜씨는 좋더라. 잘 해봐. 미리 사인을 받아놓을까?"

김 병장이 웃으며 말했어요.

"아, 아닙니다."

최 일병이 말했어요.


"유명한 가수가 아니더라도 관중들 앞에서 네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한다면 좋은 일이지. 작은 카페에서 사람들의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약간의 소음들이 나비처럼 떠다녀도 너는 네 노래를 부르는 거야."

"피아노로 전주곡을 먼저 경쾌하게 연주하고 너는 노래를 부르지. 그러면 술 취한 관중들은 술잔을 들고 서서히 시선을 너에게 줄 거야."


"어느 노신사는 젊은 시절을 떠올리고 상념에 빠지고

한 귀부인은 귀고리와 고급 팔찌를 휘두르며 뭇사내들의 관심끌기에 여념이 없고

중년 남자는 사업이 잘 안된다며 슬픔에 젖고

돈 많은 노인은 웨이트리스의 젖가슴과 엉덩이에 황홀해 하고

외출 나온 병사들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한 떼의 젊은이들은 소란스럽게 들어와 분위기를 흔들어 놓지."


"너는 더 크고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는 거야.

인생은 바람 같은 것, 노래를 부르는 거지."


김 병장이 길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들을 바라봤어요. 유난히 맑은 밤하늘에 별들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았어요. 적군을 향해 총을 겨누던 다른 병사들도 귀를 기울여 김 병장의 이야기, 상상 속으로 모두 함께 빠져들었어요.



드디어 금요일, 훈련을 마치고 본부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어요. 귀대하는 것도 그 먼 대대까지 또 걸어서 가야했죠. 그래도 발걸음은 가벼웠어요. 부대에 돌아와서 내무반을 다시 정리하고 주말을 맞았어요. 그리고 저는 가희의 편지를 전달 받았어요.


(사랑하는 오빠에게

오빠, 오늘 괜찮지?

오늘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어. 내가 동준이를 찾아가는 날이었어.

나는 버스에서 내려 많은 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어 강의실로 향했어. 먼저 수업을 듣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지.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한 강의였어.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물었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는 국가라는 제도를 두었는데, 그런 국가는 개인의 영혼과 같이 영혼을 갖고 있다. 그 영혼이 바로 정의이다. 결국 국가 없이 정의도 없는 것이고, 정의가 없는 국가는 죽은 시체와 같은 것이다."

교수님께서 또 말했어.

"만약 왕이나 대통령으로 불리거나, 권력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확실한 철학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국가에도 인류에도 불행한 일이야. 그래서 철학하는 사람이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주장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어. 빨리 점심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지.


드디어 점심시간, 차임벨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굴렁쇠가 되어 법학관으로 달려갔어. 그리고 그 현관 앞에 서서 나오는 학생들을 살펴봤지. 지나가는 남학생들이 모두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어.

알 수가 없었어. 내가 동준이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아니면 동준이가 나를 알아보던가...


조금 기다리다 내가 용기를 내어 지나가는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어.

"저기요..."

내가 수줍어하며 말했어.

"예? 저를 불렀어요?"

"아니, 저기요... 한동준 학생 지금 어딨어요?"

내가 말했어.

"아, 동준이요? 음, 그 친구가 저기 나오네요. 기다리세요. 야, 동준아! 누가 찾아왔어."

저는 고개를 들어 그 학생이 말하는 방향을 흘깃 본 후 얼른 다른 곳을 쳤다봤어. 그를 못 본 체하느라고.

"저기, 누구시더라... 혹시 가희?"

그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알아본 거야.

"응, 어떻게 지냈어?"

내가 살짝 웃으며 말했지.

"이거 몇 년 만이냐... 그동안 몰라보게 컸구나."

그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어.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어.

그런데 그가 그동안 보낸 편지와 같이 다정다감한 느낌이 안 들었어. 그동안 내게 보냈던 편지들을 그가 모르는 체하는 거야. 그는 정말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어.

그래서 나도 모르는 체하며 대화를 나눴지. 나는 조금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가 좀 쑥스러워서 그랬나봐. 그가 솔직하지 않았어. 호호호.

잘 지내.

사랑스런 가희로부터)


저는 그때 그런 편지를 받았어요.



2년 10개월 동안, 저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았어요. 이제 막 새싹들이 돋기 시작할 무렵 어느 봄날, 저는 예비군복을 받게 되었어요. 어떤 양복보다 더 값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국방부 시계가 선물한, 얼룩무늬의 예비군복을 수령하고선 저는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어요. 온 세상의 영웅이라도 된 것 같은, 무슨 큰일을 해낸 것 같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신고합니다. 병장 김오식외 4명은···. 제대를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5명의 제대 군인들이 대대장 앞에 나란히 서서 신고식을 했어요.


저희들 5명 모두 서울로 가는 직행버스에 올라탔어요.

"야, 너는 서울에서 대학교에 복학하면 되겠구나. 넌 좋겠다. 네 인생이 쫙 열리겠구나."

최 병장이 지난 총기사고를 냈던 한 병장에게 말했어요.

"그렇지. 가서 공부나 해야지. 취직 준비해야 돼. 너는 뭐할 건데?"

한 병장이 되물었어요.

"나야 뭐. 충주 집에 가서 아버지 도와 농사나 지어야지. 어디 취직이라도 할 수 있냐? 난 햇빛을 친구 삼아, 흙을 애인 삼아 농사를 짓는 수밖에 별수 없어. 농사일은 무척 힘들어. 젠장."

최 병장이 오른 손 주먹을 뻗으며 말했어요.

"나는 그림 공부를 다시 하려고해. 입대 전에는 대구에서 극장 간판을 그리다 왔는데 정말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어. 전문대라도 다시 들어가야겠어. 극장 간판만 그려서는 미래가 없어. 페인트 통 들고 배우들 얼굴을 커다랗게 그리는데 잘 그리기가 쉽지 않아. 김 병장, 너는 그래도 좋겠다. 넌 공장에 다시 복직할 수 있어서."

황 병장이 제 옆 자리에 앉아 말했어요.

"그래. 난 광주로 가서 다시 복직해야지. 공장일 밖에 아는 게 없어. 공장 기름때 묻히며 일하는 것도 즐거운 일은 아니야. 아무 낙이 없어. 기계처럼 일하다 보면 어떨 때는 미칠 것 같아."

제가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어요.

"나는 할 일이 없어. 부산 집에 가서 생각 좀 하다가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지. 생각 좀 하다가... 배나 탈까?"

강 병장이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어요.


버스는 덜컹거리며 포장도로를 달렸어요. 저희들은 그동안 지냈던 부대를 뒤로하고 서울로 갔어요. 이제는 다시 입대전의 세상으로 각자 돌아가는 것이었어요. 누구는 대학교 다녔던, 집에서 농사를 지었던, 간판을 그렸던, 공장에 다녔던, 아직 직장을 못 구했던... 각자의 세계로 모두 돌아가는 것이었죠.


돌이켜보면 쉽지만은 않은 기간이었어요. 누구는 오발사고로 손가락을 절단했고 누구는 발목지뢰를 밟아 다리를 절단했고 누구는 트럭이 전복되어 죽어야했어요.


버스는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지만 저 이름 없는 산속에선 아직도 수많은 병사들이 빈총을 메고 걷고 뛰고 넘어지며 산속에 허망하게 버려진 허수아비처럼 살아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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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나도 진실을 말하고 싶어 20.09.09 30 0 13쪽
33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박쥐 20.09.07 37 0 9쪽
32 하나의 작고 순결한 꽃송이를 20.09.04 27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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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창문으로 어둠이 기어들어오고 20.08.28 25 0 10쪽
28 정말 웃기는 일이었어요 20.08.26 27 0 17쪽
27 너는 가희만을 사랑해 20.08.24 34 0 15쪽
26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 20.08.21 31 0 11쪽
25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 20.08.19 31 0 11쪽
24 사람은 사랑을 먹으며 산다 20.08.17 49 0 9쪽
23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는가 20.08.14 25 0 9쪽
» 병사들은 술 취해 비틀거리고 20.08.12 26 0 9쪽
21 그녀의 모습을 한 내 어머니일까 20.08.10 29 0 8쪽
20 잘 가. 애인 대신이야 20.08.07 29 0 9쪽
19 누이의 꿈 20.08.05 26 0 11쪽
18 젊은 노동자들의 승리 20.08.03 41 0 9쪽
17 힘차게 휘날리는 깃발 20.07.31 42 0 8쪽
16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 20.07.29 58 0 10쪽
15 노동자를 위한 세상은 없다 20.07.27 38 0 11쪽
14 고귀한 그리움 20.07.26 25 0 8쪽
13 젊은이들의 죽음 20.07.25 25 0 12쪽
12 찔레꽃 20.07.24 27 0 12쪽
11 누군가 그리워 20.07.23 26 0 9쪽
10 천국의 문앞에서 20.07.22 33 0 8쪽
9 총소리 20.07.21 48 0 11쪽
8 우리들은 정의파 20.07.20 32 0 11쪽
7 사랑은 20.07.19 37 0 9쪽
6 도시의 요정 20.07.18 31 0 9쪽
5 크리스마스카드 20.07.17 46 0 12쪽
4 가희의슬픔 20.07.16 41 0 7쪽
3 무언가가 새로이자리 잡는 듯 20.07.15 39 0 12쪽
2 여동생 가희 20.07.14 5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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