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허수아비
제 1화 허수아비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늘은 당신이 떠나는 날입니다.
나는 우산을 들고 서있습니다.
비가 오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날
당신의 무너짐도 함께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나를 비껴 보며 아픔을 던질 때
눈물은 마음 속 저수지에 갇힙니다.
마음에 갇혀 큰 바다로 흐르지 못합니다.
사랑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만남이란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나뭇잎처럼 까르르 웃을 때
나를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보입니다.
슬픔과 안타까움, 쉬운 단념과 나태함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습니다.
나이가 들어 몸은 자라지 않더라도
마음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진심을 다해 말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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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그러니까 10살이다. 귀공자같이 잘생겼지만 멀대 같이 키가 크고 나약하게 보였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라면 틀림없이 왕따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율의 할아버지가 동네 유지였던 탓에 아무도 선율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지금은 쇠락해서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을 많이 돕기도 해서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선율은 할아버지 집에 얹혀살았다. 아버지 보현은 집안을 일으켜보겠다고 서울로 올라가 1년이면 서너 번 집에 올 뿐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키웠기 때문에 특별히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선율을 귀여워는 하셨지만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고 할머니는 하루에 세 번 “밥 먹어라!” 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선율이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금방 밥을 치워버렸기 때문에 혼자서 부엌을 뒤적거려야 할 때가 많았다. 선율은 기다려주지 않는 것에 대해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항의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또래의 아이들은 밤늦도록 붙잡혀 공부를 해야 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해서 매를 맞았는지 종아리가 퉁퉁 부은 채 학교에 오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공부하러 간다고 세 때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선율은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을 보고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또 혼자 남게 되었구나.” 순간 극심한 외로움이 엄습했다. 선율은 어두컴컴한 숲 언저리로 뛰어가며 힘껏 “야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바람이 일며 산짐승과 새들이 놀라 달아나자 마을 사람들은 “쯧쯧, 또 시작이군.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라고 투덜댔다. 하지만 나서서 야단치는 사람은 없었다. 선율은 산과 들에 나가 뛰어놀며 나무와 꽃들, 새들과 산짐승들의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선율의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운경이라는 여자아이가 전학을 온 것이었다. 어깨를 뒤덮는 긴 머리에 얼굴의 반을 차지할 것 같은 큰 눈을 가지고 있는 아주 예쁜 아이였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하얀 손을 흔들며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 선율은 이미 운경의 포로가 되었다. 선율은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다른 아이들을 비집고 운경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나 선율이야. 윤 선율.”
운경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설 운경이라고 해.”
반 친구들은 별로 말이 없던 선율이 먼저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선율 말고도 운경에게 호감을 품은 아이들이 있었는데 선율이 밀치자 옆으로 밀려나며 화를 내기도하였다.
하지만 부모님께 윤 영감의 손자에게는 함부로 굴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은 탓에 주먹만 꽉 쥐었다가 풀 뿐이었다. 선율은 눈에 힘을 주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운경을 귀찮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를 하는 듯했다.
운경은 부모님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시골로 내려왔다고 했다. 학교 근처의 빨간 벽돌집에 살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너무 늦은 밤에 들어오셔서 직접 본 일은 없었다.
서울의 학교에 비해 학급수도 적고 초라한 시골학교가 실망스러웠을 테지만 운경은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세수를 안 해 때 자국이 얼굴에 선명한 아이들이 냄새를 풍기며 다가와 말을 걸어도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선율은 그런 그녀가 매우 신기했다. 왕궁의 공주가 하층민들과 섞여서 노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끔 지저분한 손가락이 운경의 하얀 손등을 건들면 깜짝 놀라 움츠려 들기도 하는 것을 보고 선율은 운경이 몹시 싫었지만 체념하고 꾹 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율은 틈만 나면 운경을 데리고 마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있긴 하지만 부모님이 밤늦게 돌아오셨기 때문에 적어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운경 또한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선율은 그러한 운경의 처지가 더없이 고마웠다.
산과 들, 시냇물, 바람소리, 추수가 끝나 황량한 논 위로 몰려드는 해질 무렵의 석양은 선율이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이었다. 선율은 운경 앞에 서서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마치 자기 것인 양 당당하게 말했다.
“어때? 멋있지?”
“이런 것은 처음 봐.”
정말이지 운경은 선율이 가리키는 풍경을 보고 감탄을 했다. 그녀가 서울에서 본 것이라곤 자동차, 빌딩, 딱딱한 콘크리트 길, 가끔씩 구경 가던 놀이공원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예쁜 옷을 입고 뽐내기만 할 뿐이었고 얘깃거리라곤 엄마가 사온 명품 옷, 가방이나 연속극, 아이돌, 유명한 맛집에 관한 것뿐이었다. 선율처럼 자기에 대해 표현하고 나무며 풀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운경은 선율이 곁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 죽을 듯이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부모님이 야단을 치는 대신 사업이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으며 잘 풀리면 다시 돌아오자고 간곡히 말하는 탓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시골학교에 온 후 당초 까불까불하고 자기밖에 모르던 성격이 다소곳하고 온순하게 변했다. 낯설고 아는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부잣집 딸이 아니라는 생각에 풀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율을 만난 후 점차 명랑하고 활기찬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더러운 학교와 아이들, 무례한 선생님들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선율은 하늘과 땅과 바람을 자기가 지배하고 있다고 허풍을 쳤다. 하지만 왠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이 마을의 들판과 산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삵이 다리를 저는 이유는 너구리와 싸움을 하다가 다쳐서 그렇다는 얘기며, 부엉이가 족제비한테 목을 물린 후 울음소리가 갈라져 나온다는 얘기를 해서 운경을 웃기기도 하였다.
운경은 한참 웃은 후에 감탄 어린 눈으로 선율을 바라보았다. 보답으로 가끔씩 도시 이야기를 해주면 눈을 반짝거리며 이것저것 묻기도 하였지만 그다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날 선율은 운경을 추수가 끝난 논으로 데리고 갔다. 헐벗은 논 곳곳에 짚단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젖은 흙냄새를 풍기며 서늘한 바람이 쓸쓸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둘은 짧게 잘린 벼 밑동을 밟으며 논 가운데를 향해 달렸다.
그곳에는 키가 선율보다 세 배는 큰 허수아비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휘청거려 금방이라도 다리가 뚝 부러질 것 같았지만 용케 버티고 있었다. 옷은 낡아 너덜거리고 단추로 만든 눈은 금방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선율은 허수아비의 옆에 서서 말했다.
“나는 얘를 ‘허탕이’ 라고 불러. 참새를 하나도 쫓지 못하거든.”
운경은 허수아비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외로워 보여.”
선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아. 한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버글거렸는데 추수가 끝나자 아무도 오지 않아서 그래. 이제 볼 일을 다 봤다는 거지. 그래서 자주 와서 친구를 해줘야해. 안 그러면 푸르륵, 푸르륵 소리 내서 울거든. 밤중에 그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괴로운데. 나가볼 수도 없고 말이야. 대신 낮에 와서 놀아주면 밤에 울지를 않아.”
“그렇구나. 그러면 나도 친구해주러 와도 돼?”
“물론이야.”
운경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단추로 만든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눈은 왜 저래? 떨어질 것 같잖아.”
“그래서 준비를 해왔지.”
선율은 말하며 바늘과 실을 꺼내 흔들었다.
“어머. 바늘과 실이잖아!”
“그래. 내가 눈을 고쳐줄 거야. 좀 도와줘.”
선율과 운경은 허수아비를 힘껏 밀어 논바닥에 눕혔다. 선율은 큰 의식을 치르듯이 심각한 얼굴로 몇 번 실패를 거듭한 후에 간신히 바늘에 실을 꿰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운경을 향해 씩 웃어 보인 후 눈을 단단히 얼굴에 꿰매주었다. 운경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쩜, 너는 못하는 게 없네. 나는 아직 바느질을 배우지 못했는데.”
선율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할머니가 하는 것을 슬쩍 보았을 뿐이야. 사실 이런 것은 여자들이나 하는 거지만···, 허탕이를 위해서야. 자, 이제 똑바로 세우자.”
둘이 힘을 합쳐 허수아비를 꼿꼿이 세운 후 흙 구멍에 다리를 박고 돌과 흙으로 단단히 덮어주자 허수아비는 비로소 환하게 웃는 것 같았다. 선율은 허수아비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허탕아. 형님이 눈을 고쳐줬으니 나중에 꼭 은혜를 갚아야 한다.”
운경은 능청스러운 선율의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말했다.
“뭐야? 꼭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말하네.”
선율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가 돌멩이라도 살아있다고 믿으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어. 이름을 지어주고 어디서 왔는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보면 다가와 대답을 한다고 했어.
허탕이도 마찬가지야. 내가 이름을 불러주고 자꾸 얘기를 해야 허탕이는 살아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기억하지 못하면 죽는 거라고.”
운경은 감탄스럽게 선율을 바라보았다. 개구쟁이에 허풍쟁이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각이 깊었고 어른스러운 면이 느껴졌다. 운경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내 인형도 내가 말을 걸고 이름을 불러주니까 말을 했어. 내가 관심을 갖고 사랑해주면 생명이 생기는 거야. 너희 엄마는 참 좋은 분 같아. 그런데 한 번도 뵙지 못했는데 어디 계시니?”
선율은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힘없이 말했다.
“돌아가셨어.”
“어머, 미안해.”
선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마 엄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운경은 선율의 우울해진 모습이 자기 때문인 것 같아서 어쩔 줄 몰랐다. 선율의 얼굴을 빤히 보며 울먹울먹하는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았다.
그 때 허수아비의 옷깃이 바람에 살짝 펄럭이며 “고마워.” 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메아리처럼 웅웅 울리긴 하였지만 분명 사람의 말소리였다. 선율과 운경은 깜짝 놀라 허수아비를 바라보았다.
- 작가의말
글을 쓰면서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감상에 사로잡혀 시도 함께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쓴 시를 드문드문 함께 올렸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애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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