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어부와 마신
제 2화 어부와 마신
허수아비의 찢어진 옷 사이에서 까만 그림자가 유령처럼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림자인 듯싶었지만 점차 형체를 갖추며 허수아비와 분리되어 선율과 운경 앞에 우뚝 섰다. 선율은 무서워 몇 발짝 뒤로 물러났고 운경은 선율의 등 뒤에 머리를 묻고 숨었다.
그림자는 햇빛을 받자 밝아지며 머리와 몸통, 손발의 형태가 나타났고 머리가 하늘에 닿을 듯 쑥쑥 자랐다. 몸은 구름처럼 부풀어 뒤뚱뒤뚱했고 물컹거려서 건드리면 쑥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몸이 커지자 비눗방울처럼 흐릿해져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하지만 선율은 운경 앞에서 겁쟁이가 되기 싫어 앞으로 나와 크게 소리쳤다.
“너무 커져서 볼 수가 없어요.”
“그래? 그것 참 미안하구나.”
말을 마치자 그림자는 점점 작아져 선율만큼의 크기가 되었다. 이목구비도 점차 뚜렷해졌는데 그 모습은 얼굴이 주름으로 뒤덮인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씩 웃으며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선율의 뒤에 숨어있던 운경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어떻게 한 거예요?”
“별 거 아냐. 원한다면 가르쳐줄 수도 있어.”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즐거운 듯 깔깔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운경은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선율의 뒤에서 나와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음. 배우고 싶긴 하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하긴 싫어요.”
“사람이 없는데서 하면 되지.”
운경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잠시 생각을 한 후에 말했다.
“그러면 뭐 하러 배우겠어요.”
할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하-.” 하고 바람소리를 냈다.
“넌 재미있는 아이로구나. 배짱도 있고.”
운경은 조금 풀이 죽어서 얘기했다.
“그렇지 않아요. 재미있는 아이였다면 친구가 많았을 텐데 선율이 말고는 친구라고 할 만한 애들은 없어요.”
“그러면 내가 친구가 돼줄까?”
운경이 무어라 대답하려 하자 선율이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그림자는 허리를 쭉 펴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카렌시아라고 한단다.”
“허탕이가 아니란 말이에요?”
“허탕이는 허수아비 속에 있을 때의 이름이야. 네가 그렇게 불러줬기 때문에 내 이름이 된 거지. 누구든 자꾸 불러준다면 그것이 이름이 되는 거야.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존재가 없어지고 말지. 그런 점에서 나는 너에게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나의 본래의 이름은 카렌시아란다. 어떤 이는 나를 바람의 정령이라고도 부르지.”
선율은 눈이 동그래지며 말했다.
“바람의 정령이라고요? 그게 뭐죠?”
“바람의 정령은 바람에 깃들어 있는 영혼이란다.”
운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이란 말인가요?”
카렌시아는 운경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시선은 구름너머 먼 곳을 향해져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옛날 일을 더듬듯이 가볍게 몸을 흔들자 기이한 신음소리가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신기하게도 그가 신음소리를 낼 때마다 향긋한 바람이 불어 운경과 선율의 기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카렌시아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글쎄다. 나는 내가 사람인지 영혼인지 모르겠구나. 처음에는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형체가 없는 것처럼 사물을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게 됐어. 사람이라면 절대 그럴 수 없거든.
그래서 나는 영혼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은 만지면 느낄 수가 있는 것으로 봐서 영혼은 아닐 것이라고 행각해. 왜냐하면 영혼은 촉감이 없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일까?”
선율이 수수께끼를 풀 때처럼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말했다.
“바람에 깃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요? 영혼은 흩어져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들었는데 할아버지는 바람에 붙잡혀있는 거예요. 그래서 흩어지지도 않고 사람도 아니고 영혼도 아닌 것이죠.”
카렌시아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옳다구나. 네 말이 맞아. 나는 바람에 붙잡혀있는 거야. 선율은 참 똑똑하구나. 아이 같지가 않아. 선율아. 너는 내가 몇 살인지 아니?”
“우리 할아버지도 나이가 꽤 많은데 할아버지는 그 보다 얼굴에 주름이 더 많으니까 백 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카렌시아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 할아버지라면 가끔 이곳을 지나다니는 윤 영감을 말하는 거구나. 나는 윤 영감을 갓난아기 때부터 봤단다.”
카렌시아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이어서 말했다.
“나는 2천년을 넘게 살았지.”
선율과 운경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말도 안 돼.” 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렌시아는 못들은 척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참 길고 지겨운 시간이지. 나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바람 속에 머물게 될지 몰랐어. 허수아비 속에 숨어서 허탕이가 된 것도 너무 지루해서야. 처음에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았어.
휭 하고 바람을 일으켜 참새가 놀라 달아나는 것을 보는 것도 쏠쏠히 재미있었지. 너희들도 그 때 참새의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수십 년이 지나자 그것도 시들해졌어. 이제는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어.”
운경은 카렌시아가 자꾸 한 숨을 쉬며 괴로워하자 다가가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2천년을 살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어요.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은 인정할 게요. 그러니 그렇게 슬퍼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렇게 지루하다면 바람에게서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면 되잖아요.”
카렌시아는 가볍게 운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란다. 바람의 정령이 없어진다면 아무도 바람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단다. 제멋대로 폭풍이 일고 돌개바람이 들이닥쳐 세상은 엉망이 될 거야. 기차에 기관사가 없다고 생각해보렴. 그래서 내가 이 바람에게서 벗어나려면 후임자가 있어야 하는 거야. 후임자를 만들어야 벗어날 수 있단다.”
“후임자를 만들면 되잖아요.”
“그래. 말 잘했다. 네가 내 후임자가 되지 않겠니? 이래 뵈도 아주 멋진 직업이란다. 세상 구석구석까지 가볼 수 있고 나쁜 놈들을 혼내줄 수도 있지. 세상에서 바람의 정령보다 힘이 센 것은 없어.”
운경이 머뭇거리자 선율이 운경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바람은 제멋대로잖아요. 살살 불다가도 세게 먼지를 날려서 눈을 아프게도 하고요. 바람은 절대 말을 듣지 않아요.”
“그래. 바람은 제멋대로지. 하지만 나는 바람이 다니는 길을 알고 있어.”
“바람이 다니는 길이요? 그건 뭔가요?”
“바람이 다니는 길은 예전에는 죽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고 불렀어. 죽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정확한 말도 아니지. 그 길은 말 그대로 바람이 다니는 길이야.
강한 바람이나 부드러운 바람이나 모두 바람의 날갯짓에 불과해. 바람의 감정의 표현일 뿐이야. 화가 나면 바람이 거세지고 기분이 좋으면 부드러운 바람이 된단다. 바람은 그 길을 다니며, 세상을 지켜보고 감정을 표현하는 거야.”
“그러면 할아버지가 화가 나면 폭풍이 부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그러면 할아버지는 왜 그만두려고 해요?”
“지겨워서 그렇다고 했잖아.”
“그렇게 지겨운 일을 운경이 하도록 해요?”
“처음부터 지겨운 일은 아니었어. 너무 오래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운경도 지겨워지면 어떻게 하죠?”
“그 땐 나처럼 후임자를 만들면 되지.”
선율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운경은 학교도 가야하고 취직도 해야 하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아야 한다. 어머니는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나도 못하고 늙은 카렌시아처럼 바람이 다니는 길에 붙잡혀 있어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선율은 소리쳤다.
“하지만 운경은 너무 어려요. 바람의 정령이 되는 것은 어른이 된 다음 생각해봐도 늦지 않아요.”
카렌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운경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그것도 약속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생각해보겠다는 거지?”
선율은 지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카렌시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선율이 기가 막혔다. 한 주먹도 안돼 보이는 꼬마가 눈을 부라리며 카렌시아를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카렌시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길게 숨을 쉬며 말했다.
「내 얘기를 들어보렴. 아주 오래 전 얘기란다. 내가 바람이 다니는 길에 오르기도 전의 이야기지. 옛날에 아주 가난한 어부가 살았단다. 어부는 매일 아침 바다에 그물을 던졌지.
재수 좋게 물고기가 걸리면 그것을 팔아 가족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지만 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하루 종일 꼼짝없이 굶어야 했지. 그래서 어부는 별들이 사라지기도 전인 깜깜한 새벽에 바다로 나가 정성을 다해 기도했단다.
“바다의 신이시여!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 그물에 고기가 가득 들어 나의 아내와 자식들이 굶지 않게 해주십시오.”
기도가 통했는지 어느 날 두툼한 무엇인가가 걸렸어. 그것은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호리병이었어. 어부는 깜짝 놀랐지. 그 호리병만 팔아도 가족들이 평생 먹고 살 만큼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또 궁금해졌어. 호리병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거지. 이렇게 값비싼 호리병이라면 병 속에는 더 귀한 것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어부는 살며시 호리병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단다. 그런데 뚜껑이 열리자마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병 속에서 쏟아져 나와 하늘 끝까지 치솟는 거야. 하늘은 어두컴컴해지고 한동안 천둥과 벼락이 치며 세상을 뒤흔들었단다. 어부는 너무 놀라서 부들부들 떨었지.
잠시 후 구름은 호리병 주위로 모여 마신의 모습이 되었단다. 눈에서는 빨간 불이 뿜어져 나왔고 말을 할 때마다 귀가 쩌렁쩌렁 울려서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야 했어. 안 그러면 고막이 터질 것 같았거든. 어부는 두려움에 떨며 간신히 소리 내어 물었어.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마신(魔神)이니라?”
“그런데 왜 그렇게 노여워하십니까?”
“이제 너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단다.
“나는 호리병에 갇힌 당신을 구해주었는데 왜 나를 죽이려 하십니까?”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