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엄마의 거울
제 4화 엄마의 거울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무는
고개를 숙이더이다.
나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나는 나무보다 더 나무입니다.
멀고 험한 길을 걷다가 힘들면
나를 잘라 의자를 만드세요.
카펫처럼 빨간 피가 흘러도
울지 않을 겁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작은 배가 떠나갑니다.
당신이 있는 걸까요?
당신에 대한 그리움은
멀어질수록 점점 더 커지는군요.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아무런 약속도 하지 마세요.
마음껏 방황하고 노래하세요.
당신이 즐겁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행여 외로워 눈물이 나거든
망설이지 말고 돌아오세요.
나는 나무이므로
당신이 쉴 수 있도록
하늘에 닿을 만큼 성장해서
기다릴 겁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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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운경은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뱃속에 있는 데비툼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가 자라 코와 눈, 귀로 쏟아져 나오고, 카렌시아에게 붙잡혀 하늘 높이 끌려가기도 했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덜덜 떨었지만 주위에는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너무 무서워 불을 켜고 집안을 돌아다녀보았지만 달려와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바빠서 밤늦게 돌아오거나 새벽 일찍 일하러 나갔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잠을 잘 못자니 식욕이 떨어지고 점점 말라갔다. 커다란 눈은 쑥 들어가고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부모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운경은 새벽이나 늦은 밤에 스치듯이 지나치는 부모님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어머니는 얘기했다.
“운경아.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해서야. 너를 대학도 보내고 좋은 집에 시집을 보내려면 많이 벌어야 해. 금방 자리를 잡을 것 같으니까 조금만 참으렴.”
그러나 운경이 점점 변하고 있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뱃속의 데비툼이 꿈틀거리며 점점 그녀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누가 내 연필을 가져갔어?”
운경의 사나운 외침에 아이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그러나 곧 운경의 눈에서 파란 불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자 아이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운경은 아이들의 책상을 훑어보다 선영이 자기의 연필을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노란색 몸통에 엄지 모양의 고무가 달려 있는, 시골에서는 살 수 없는 연필이었다. 운경은 달려가 연필을 확 빼앗으며 말했다.
“이 도둑년. 누가 내 연필을 쓰라고 했어? 선생님께 이를 거야.”
선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말했다.
“잠깐 써보고 돌려주려고 한 거야. 훔친 게 아냐.”
운경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선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말도 안 하고 가져갔는데 훔친 게 아니라고? 어디 선생님께 물어보자. 선생님이 훔친 게 아니라고 하신다면 나도 믿을게.”
그러자 선영은 눈물을 쏟으며 사정했다.
“미안해. 한 번만 용서해줘.”
그러나 운경은 단호하게 선영의 손을 잡고 교무실로 끌고 가려고 하였다. 그 때 뒷자리에 앉아있던 형철이 일어나서 말했다.
“그만해라. 잘못했다고 하잖아.”
형철은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서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운경은 지지 않고 소리쳤다.
“네가 뭔데 참견이야. 관심 끄고 네 할 일이나 해!”
“뭐야? 서울에서 왔다고 뵈는 게 없냐?”
형철은 달려가서 운경의 뺨을 때렸다. 운경은 철썩 소리와 함께 쓰러졌지만 곧바로 일어나 형철에게 덤벼들었다. 정강이를 걷어차고 귀를 물어뜯었고 선영이 가져갔던 엄지 모양의 연필로 마구 찔렀다. 마치 악귀 같은 모습이었다. 형철은 비명을 지르다가 뿌리치고 도망쳤고 운경은 쫓아가려하였다. 선율은 놀라서 운경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운경아. 정신 차려.”
운경이 뿌리치며 덤벼들려고 하자 선율은 운경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나지막이 얘기했다.
“이 건 네가 아냐. 데비툼을 생각해.”
데비툼이라는 말에 운경은 움찔하며 선율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친구들이 놀라서 웅성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들의 벌레를 본 듯한 표정과 마주치자 지독한 후회가 몰려왔다. 가슴이 철렁 거리고 뱃속에 든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정신이 들자 손 등에 따가운 통증이 느껴져 짧게 비명을 질렀다. 내려다보니 여러 개의 생채기가 나있었고 생채기 마다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선율은 운경을 수돗가로 데리고 가서 손을 씻기고 손수건으로 살살 묶어주었다. 운경은 울면서 말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가끔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선율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괜찮아. 다 좋아질 거야.”
“거짓말 마. 내 심장에 데비툼의 씨앗이 자라고 있어. 카렌시아는 내가 평생 불행해질 거라고 말했어.”
선율은 운경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 잘못이야. 내가 데비툼을 먹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카렌시아를 만나서 사정해봐야겠어.”
“그를 어디서 만나? 허탕이도 없어졌잖아.”
“내가 바람의 정령이 되겠다고 하면 만나줄 거야.”
운경은 감격하여 선율의 손을 꼭 잡고 얼굴에 대었다. 선율은 운경의 얼굴을 가슴으로 안으며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 내가 꼭 지켜줄 게.”
하지만 운경은 시간이 흐를수록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성격이 변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무슨 말을 하던지 상냥하게 웃으면서 귀를 기울였지만 지금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트집을 잡고 반박을 하였다. 선율과도 다시 안 만날 것처럼 대판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선율은 꾹 참고 운경을 달래려고 하였지만 싸우는 일이 반복되자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별로 말을 거는 일도 없었고 예전처럼 손잡고 들판을 뛰노는 일도 없어졌다.
몇 번이나 운경의 집 앞에서 서성이며 문을 두드리려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길게 한숨을 쉬며 운경의 집 앞에서 등을 돌렸다. 운경은 창가에서 선율을 보고 있었지만 차마 부르지 못했다. 눈에서는 언뜻 눈물이 비쳤다.
운경도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에서 주체할 수 없이 사나운 말이 쏟아졌고 별 일도 없는데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해 신경질을 부렸다. 마치 사나운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운경은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운경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뜻밖에 엄마 희영이 와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지만 아직 엄마가 올 시간은 아니었다. 운경은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으나 얼굴은 생각과는 반대로 짜증스럽게 변했다. 운경은 무뚝뚝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무슨 일이긴? 내 딸 보러왔지.”
희영은 살갑게 말하며 운경의 얼굴을 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쪄서 귀여웠던 두 뺨은 쑥 들어가 볼품없이 변했고 손과 다리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나 있어서 막 길거리를 헤매다 온 아이 같았다. 돈을 버느라 운경을 돌보지 못한 사이에 아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희영이 시간을 내서 일찍 들어온 이유는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운경이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괴롭히며 심지어는 아무 때나 소리를 질러 수업을 방해한다고 했다. 희영은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선생님에게 강하게 부인했다. 수줍어하고 예쁘게 웃기만 하던 운경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희영은 운경을 보자 자기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경은 보살핌을 받지 못한 들 고양이 같은 아이로 변해 있었다. 희영은 다가가 운경을 꼭 껴안았으나 비쩍 말라 가느다란 뼈만 만져지자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운경아, 미안해.”
그러나 운경은 희영을 밀치며 말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희영은 눈물을 흘리며 껴안으려는 자세 그대로 멈춰서 운경을 보았다. 독기로 가득한 눈을 치켜뜨고 쏘아보는 게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하는 듯했다. 희영은 머리로 피가 확 몰리는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운경이 답지 않게.”
“나 다운 게 뭔데. 얼마나 나를 봤다고 그런 말을 해?”
희영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철렁했다. 운경의 말이 맞았다. 일을 한다는 핑계로 운경을 본 시간은 하루에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애가 이렇게 될 때까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마음 가득히 밀려오는 후회를 삭이며 희영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엄마한테 말을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냐?”
“심한 말? 이게 심한 말이라고? 더 심한 말 해줄까?”
운경의 태도는 생각 밖으로 심상치 않았다. 희영은 돌봐주지 못한 엄마에 대한 증오감이 커져 마음의 병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화를 내지 못했다. 희영은 눈이 그렁그렁해져 입술을 꽉 깨물며, 운경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운경은 뿌리치려했지만 희영은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네게 줄 것이 있으니까 잠자코 따라와.”
희영은 운경을 앉혀놓고,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반쯤 감긴 눈 위로 달빛이 머물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운경은 발이 저리고 짜증이 났지만 희영의 엄숙한 모습에 빠져들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희영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고 지루한 것과 다리가 아픈 것도 잊고 있었다.
어느 순간 희영은 길게 숨을 내쉬고 일어나 운경을 보았다. 운경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주무르며 희영을 바라보았다. 희영은 작은 소리로 탄식을 하더니 장롱 깊숙한 곳에서 황금빛 보자기로 곱게 싼 무언가를 꺼냈다. 회한에 잠긴 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보자기를 어루만지다가 품에 꼭 안았다. 그것은 희영의 어머니가 희영에게 주신 보통 크기의 손거울이었다.
희영은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했다. 무슨 잘못을 해도 야단치지 않고 보듬어 주었으며, 희영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랑하던 어머니였다. 희영은 그런 어머니가 너무 좋았다.
희영도 지금의 운경처럼 방황하며 부모님의 속을 썩이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오래된 손거울을 내밀며 말했었다.
“이건 아주 오래된 손거울이야. 할머니가 나에게 주신 거란다. 할머니의 어머니, 아니 더 오래 전부터 물려왔던 게 틀림없어. 화가 나고 마음이 진정이 안 될 때는 이 거울을 보거라. 맑은 거울에 네 모습을 비추다보면 착한 감정이 생길 거야.”
희영은 어머니의 말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어머니가 사랑해준 예쁜 모습이 나타나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이 가라앉고 즐거운 마음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이었다.
희영은 운경이 이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처럼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거울에는 어머니의 어머니, 그 위의 조상님들의 마음이 담겨있으므로 틀림없이 운경을 도와줄 거야.’ 희영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운경은 희영을 보며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하는 거야? 화장실도 못 가게 이게 뭐야?”
희영은 화를 낼 법도 하련만 안색을 바꾸지 않고 황금빛 비단으로 곱게 싼 것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할머니께서 엄마에게 물려준 손거울이야. 좀 더 있다가 줄려고 했는데 이제 너에게 물려주고 싶어.”
운경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비단을 펼쳤다. 나무로 된 테두리에 파도 모양의 홈이 파진 손거울이 나타났다. 거울은 운경의 얼굴만큼 컸다. 얼핏 봐도 아주 오래된 것이었는데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쑥 빨려들 것처럼 굉장히 맑았다. 아주 깨끗한 호수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분노가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희영이 거울을 창문 쪽으로 돌려놓자 달빛이 반사되어 방 안으로 하늘이 들어온 것 같았다. 운경은 갑자기 춤추고 싶어서 발레리나 모양 뱅글뱅글 돌다가 엄마를 꼭 껴안았다. 거울은 운경이 기대했던 선물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꼭 들었다. 희영은 운경이 마음에 들어 하자 기뻐하며 운경을 안은 채 말했다.
“운경아, 이 거울은 할머니께서 엄마에게 물려주신 거란다. 너는 뵌 적이 없지만 살아 계셨으면 너를 아주 예뻐하셨을 거야. 할머니가 엄마에게 물려주신 것처럼 나도 이제 이 거울을 사랑하는 딸에게 물려주는 거니까 항상 반짝거리도록 자주 닦아줘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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