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화 후회
제 14화 후회
다음 날 아침 선율은 박 화백을 찾아갔다. 박 화백은 운경의 그림을 앞에 놓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선율은 박 화백이 운경의 그림 앞에서 넋을 잃고 있는 모습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운경에게서 그가 운경의 그림을 매우 폄하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선율은 가볍게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박 화백님.”
박 화백은 깜짝 놀라며 선율을 돌아보았다.
“아, 윤 기자. 언제 왔나?”
“지금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그림인데 사람이 옆에 왔는데도 못 알아채고 몰두해 있습니까?”
박 화백은 그림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내 제자의 그림이야. 어때, 대단하지 않아?”
“아주 인상적인 그림입니다.”
박 화백은 손을 휘저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것을 보게. 여기 바람을 묘사한 것을 봐. 바람은 외부에서 불어오는 게 아니라 나무, 돌, 풀 같은 사물에서 흘러나오고 있어. 그런 바람을 물결무늬 모양의 힘찬 곡선으로 표현했어. 사물은 그 바람에 말려 일그러지고 뭉쳐지지. 사물에 숨어있던 슬픔, 환희, 분노, 기쁨이 경계를 뚫고 공간으로 튀어 오르고 있는 거야.
바람은 반복되는 굵은 터치로 생동감 있고 입체적으로 표현했고 때로는 가늘어지며 가슴을 콕콕 찌르기도 하지. 하지만 시끄럽거나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은 아니야. 인생을 다 짊어진 듯이 무거워 발자국이 깊게 새겨지는 그런 바람 같아.”
선율은 그림 앞에서 물끄러미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이 그림을 압니다. 운경이 그린 그림이죠?”
박 화백은 깜짝 놀라 선율을 쳐다봤다.
“자네가 운경을 어떻게 아나?”
“운경은 아주 오래된 친구입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다시 만났을 때 아주 신기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신기한 일들? 나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운경을 다시 만난 곳은 파주 평화누리공원의 바람개비 동산에서였습니다. 나는 그 때 공간이동을 하듯이 그곳에 갑자기 나타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운경이 있었던 겁니다.”
박 화백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신기한 일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화백님이 믿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어쨌든 그곳에서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나는 처음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화백님이 느끼는 것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보자마자 나는 그림 내부에 감춰져 있는 생명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잠깐 사이에 공감과 감동을 일으키는 그림은 본 적이 없습니다. 맹세코 운경은 사물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 분명히 그래. 그것은 나도 알 수 있네.”
선율은 가만히 박 화백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진심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율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사실 오늘 화백님을 찾아온 것은 운경 때문입니다.”
“운경이 왜?”
“제가 운경에게 듣기로는 화백님이 운경의 그림을 혹독하게 비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찬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의아합니다.”
“그것은 운경이 좀 더 정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네. 지나친 칭찬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법이야. 운경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대 화가가 될 수 있어. 나는 그녀를 꼭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어.”
“박 화백님은 그림은 잘 그리시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나 봅니다. 제자들에게 항상 그런 식으로 대하십니까?”
“무슨 말을 하는 겐가? 나의 교습법이 문제가 있다는 건가?”
선율은 박 화백의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말하는 모습에 점점 흥분을 했다. 얼굴이 벌게지고 언성이 높아졌다.
“그렇습니다. 격려가 필요한 때가 있고 비판이 필요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옛날에 무조건 두들겨 패면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죠. 덕분에 선생에게 질려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분야의 일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게 됐습니다. 요즘에는 안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선생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박 화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경 뒤 미간에 주름이 잡힌 채 눈까풀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입 닥쳐! 어디서 나를 모욕하는 거야. 그렇게 다루지 않으면 나태해져서 오히려 높은 경지까지 오르지 못하는 거야. 평범한 화가가 되려면 평범한 선생에게 가면 돼. 하지만 대 화가가 되려면 내 밑에서 내 비평을 견뎌야 해. 문화부 기자 따위가 무엇을 안다고 간섭을 하는 거야?”
“비난만이 대 화가를 만든다고요? 때로는 격려가 필요한 법입니다. 화백님. 주위를 둘러보세요. 제자가 누가 있습니까? 다 떠나고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내게는 아직 운경이 있어. 그녀를 꼭 대 화가로 만들 거야.”
“운경이 있다고요? 그녀가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박 화백은 선율의 일그러진 표정과 눈물이 쏟아질 듯 촉촉하게 젖은 눈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뜨끔해졌다.
“운경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선율은 운경의 상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바람이 다니는 길에서 본 자살하려던 모습도 이야기했다. 박 화백은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운경아······.”
선율은 고개를 숙인 채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는 박 화백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박 화백의 화실을 나오며 쾅 소리 나도록 힘껏 문을 닫았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견딜 수 없었다.
선율이 기억하는 박 화백은 한없이 너그럽고 훌륭한 인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아껴줘야 할 제자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더군다나 그 제자는 다름 아닌 운경이란 말이다. 운경이 잘못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언젠가 그는 한 전시회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었다. 작품을 전시한 화가는 명문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외국에서 공부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외국에서부터 호평을 받았고 그의 그림에 대한 평론가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화단에서는 그가 정식 코스를 밟지 않았고 제대로 사사받은 스승이 없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그의 작품을 깎아내리려고 하였다. 밑도 끝도 없이 그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전시회는 하루 종일 여남은 명의 사람들만 관람했을 정도로 썰렁했다.
그런데 박 화백은 남들이 다 비아냥거리는 작품 앞에 서서 꿋꿋이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이 화가는 여자 문제가 복잡하고 평판도 나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의 그림 앞에서 감탄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박 화백은 딱하다는 듯이 한참 동안 그 사람을 바라본 후에 말했다.
“나는 그림을 볼 때 그림만 봅니다. 그 사람의 소문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그림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 더 하자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말하는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림에 담겨있는 순수함을 믿습니다.”
훗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화가는 대성통곡을 한 후 박 화백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물론 선율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운경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대한단 말인가?
격려를 하면 나태해 진다고? 그건 사람마다 다 다른 거야. 어떤 사람에게는 격려가 독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겐 미래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어.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 특히 운경에게는 말이야.
너무 화가 나서 한동안 무작정 걷기만 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주위를 맴돌아 머리가 뒤죽박죽 했다. 선율은 고개를 숙이고 걸었기 때문에 지나는 사람들과 수시로 어깨를 부딪고 욕을 먹기도 했다.
갑자기 취하고 싶어졌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선율은 포장마차로 들어가 소주와 어묵을 주문했다.
잠시 후 한 쌍의 커플이 들어왔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선율은 ‘아직 성냥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다 있다니.’ 라고 생각하다가 호기심이 생겨 그들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성냥개비 4개를 꺼내 정사각형을 만든 후 여자에게 말했다.
“안주를 기다리며 하는 게임이야. 여기 있는 성냥개비 중 한 개만 움직여서 다른 글자나 부호를 만들어봐. 번갈아서 하다가 만들지 못하면 지는 거야. 지는 사람은 꿀밤 한 대야. 알았지?”
여자는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라는 거야. 잘 모르겠어.”
남자는 성냥개비 한 개를 움직여서 ‘ㅁ’을 만들며 말했다.
“자, 이렇게 하면 ‘ㅁ’이 되잖아. 그리고 이 성냥개비를 아래로 살짝 움직이면 ‘ㅂ’이 되지.”
“아, 그렇게? 알았어.”
두 사람은 한참동안 성냥개비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결국 남자가 꿀밤을 맞았다.
“야, 너무 세게 때리는 거 아냐?”
남자가 머리를 문지르며 엄살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선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 행복은 저렇게 작고 소소한 것에 있는데 무슨 욕심들이 그렇게 많을까?’ 선율의 귓가에 운경을 대 화가로 만들겠다는 박 화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한편 박 화백은 선율의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운경의 그림 앞에 앉아서 초점을 잃은 눈으로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 화백은 자신이 그림을 배울 때를 생각했다.
틈만 나면 선배들이 불러다가 매질을 했었다. 선생님이 던진 팔레트에 맞아 이마가 찢어진 적도 있었다. 단상에 세워놓고 인민재판을 하듯이 여러 사람들이 혹독하게 비판을 했고 손가락질을 하며 놀리기도 했다.
수치스러워 죽고 싶었지만 박 화백은 이를 악 물고 버텼다. 박 화백은 자신이 이만한 위치에 오른 것은 그 시절의 혹독한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도 제자에게 혹독하게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을 수상한 후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지만 대부분 1년도 견디지 못하고 떠나고 말았다. 그들 중에는 “언젠가 당신을 꼭 파멸시키겠어.” 라고 저주의 말을 퍼붓고 떠나간 제자도 있었다.
박 화백은 운경의 이름을 부르며 괴로워했다. 운경은 그의 마지막 남은 제자였다. 그녀가 잘못되면 그 주위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 것이다.
그는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해 혼자였다. 가족들과도 소식을 끊고 지낸 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대 화가를 키워내겠다는 삶의 목적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박 화백은 극심한 공허감에 몸서리쳤다.
그러고 보니 운경이 어떻게 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오직 그녀의 그림만 알 뿐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선생으로서 그가 그녀에게 해준 것은 혹독한 비평뿐이었다. 박 화백은 선율이 적어준 운경의 주소를 손에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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