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화 양심
제 19화 양심
종각역에서
무더운 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녀가 웃고 있었다.
낡은 옷과 거북한 향수 냄새
조금 창백한 얼굴과 거친 손
아침 햇살처럼 반짝이던 모습은 아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뛰어다니며
밥을 사달라던 호기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 선물한 목걸이는
추억에 매달려 여전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지하철이 달려오고
출입문이 열릴 때까지 그녀를 응시하였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망설이던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기차를 탔다.
나는 결정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몇 번이나 이별하고 돌아선다.
땀인지 눈물인지
우울은 장마철 습기처럼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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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은 가만히 눈을 감고 구봉 스님의 말을 마음에 각인시켰다. 스님은 그런 선율을 힐끗 보고 말을 이었다.
“입구는 그곳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찾는 사람의 인연이 닿는다면 그런 곳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 말이 도움이 되셨습니까?”
“알듯 말듯 애매합니다. 아무 것도 모를 때는 그냥 찾아가면 될 줄 알았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어렵고 두렵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발이 땅을 밟을 때 비록 직접 밟는 곳은 작지만 밟지 않은 땅이 있음을 믿어야 비로소 널리 마음대로 걸을 수 있다. 사람의 지식이란 작지만 그가 알 수 없는 넓은 지식이 있음을 믿어야 비로소 천도(天道)의 자연을 갈 수 있다.’
믿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지금 디디고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낭떠러지 같습니다. 그래서야 어디 한 걸음이라도 나가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선율의 눈에서 짧게 빛이 반짝였다. 아직 혼란스럽고 막막하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앞에 길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선율은 짧게 탄식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선율은 구봉 스님을 뒤로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여전히 관광객들이 많았지만 선율은 아무도 없는 듯 다섯 개의 징후와 스님이 가르쳐준 지명을 소리 내어 외웠다. 산나물 파는 할머니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다. 주차한 관광버스 뒤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선율의 눈에 더 이상 그런 모습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고요, 평화, 안식, 소망, 용기라는 다섯 가지 징후가 가슴에 박혀 보석처럼 반짝였다.
선율은 취재여행을 떠난 후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풀다가 무심코 벽에 걸린 황금빛 테를 두른 액자를 바라보았다. 액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수많은 나뭇잎이 떨어져
단 하나의 뿌리를 살찌우게 하듯이
수많은 인생의 영광을
단 하나의 양심을 위해 썩히리라.」
선율이 독립해서 나간다고 하자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아버지는 저 글을 벽에 걸어주면서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다고 당부했다.
평소에는 거의 보지 않고 지나갔었는데 유난히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선율은 한참 동안 액자의 글을 바라보았다. 양심이란 단어가 칼로 도려내듯이 가슴을 쓰리고 아프게 했다.
이 글은 아버지의 집 안방에도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자마자 저 글을 한 번씩 되뇐다고 했다. 불현 듯 바람이 다니는 길에서 본 아버지의 영상이 떠올랐다. 과연 아버지가 장 기자가 말한 정 동수의 자살과 관련이 있을까?
선율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버지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관련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선율은 액자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팔에 소름이 돋았고 답답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가슴이 울컥해져 숨을 쉬기 어려웠다. 선율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 저 선율이에요.”
“그래 취재여행을 갔다더니 벌써 돌아왔냐?”
“잠깐 돌아온 거예요. 또 가야해요.”
“몸이 회복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리하지 마라.”
“예, 아버지. 그런데 뭐 좀 물어봐도 되요?”
“그래, 말해라.”
“아버지는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지는 않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누가 이 아비가 못된 짓을 하고 다닌대?”
“그런 게 아니라 나쁜 꿈을 꿨어요.”
“이상하구나. 얼마 전에는 정 동수란 사람을 아느냐고 묻더니 이번에는 내가 나쁜 사람 아니냐고 묻고 있잖아.”
“아니에요.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걱정 마라. 절대로 그런 일이 없으니 안심해라. 날 믿어. 별 일 없으면 이만 끊자. 바쁘다.”
“예, 아버지.”
“그리고 인혜에게 전화 좀 해라. 네가 전화를 받지 않아 난리를 친다고 하는구나.”
선율은 조금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솔직히 나는 인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왜 그래? 예전에는 곧잘 만나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
선율은 가슴이 뜨끔하여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인혜와 연락을 자주하지 않은 것은 운경을 만난 뒤로부터였다. 애당초 별 애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죄의식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 번 인혜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불편했으나 선율은 한 번도 아버지의 말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선율은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사고가 난 후 정신이 없었잖아요.”
“그렇구나. 그렇더라도 인혜에게 잘 해줘라. 누가 뭐래도 한 정호 의원의 딸 아니냐. 한 정호 의원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알겠어요.”
“그럼 이만 끊자. 바쁜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겠다.”
선율은 잠시 생각하다가 인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보현은 선율과 통화를 마치고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언제부터 선율이 자신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얼마 전 정 동수가 죽은 것에 대해 얘기했었고 지금은 내가 사람들을 못 살게 굴지는 않는지 의심을 하고 있다.
보현은 선율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선율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우건설의 상임 변호사가 된 것도 아들을 위해서였다. 아들에게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위해서 조금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죄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보현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차갑고 냉정한 얼굴이 되었다. 결코 가족들에게는 보여준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능력 없는 자들이 하는 소리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을 어찌 괴롭힌다고 하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일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야. 게으름 피우다 나락에 떨어지는 것이 나쁜 거지. 가족들을 가난에 빠뜨리는 무능한 것들이 잘못이지.”
보현은 중얼거리다 시계를 보았다. 저녁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우건설 조 영광 회장과 국회의원 한 정호를 만나기로 한 중요한 약속이었다. 보현은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했다.
고급 음식점에 도착했을 때 아직 약속시간 30분 전이었다. 보현은 약속을 하면 꼭 30분 전에 약속장소로 갔다. 사람들이 시간이 남아도느냐고 놀려도 그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야. 하지만 30분의 여유는 모든 것을 다 커버할 수가 있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절대로 약속시간에 늦지 않는다는 거야.”
그의 말처럼 그는 한 번도 약속시간에 늦은 적이 없었다. 음식점에 들어서자 중년의 여인이 가볍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오늘도 제일 먼저 오셨네요.”
“초심을 잃으면 안 되지.”
보현은 웃으며 중년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 크지 않은 홀에 탁자가 몇 개 놓여있었지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손님은 받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홀을 지나자 긴 복도를 따라 백합, 장미 같은 팻말이 달린 방이 여럿 나타났다. 중년 여인은 그 중에 아무런 팻말도 붙어있지 않은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는 탁자가 하나 놓여있었고 4명의 자리가 세팅되어 있었다.
잠시 후 약속시간이 다 돼서 조 회장과 권 용남 검사가 왔고 5분 정도 뒤에 한 정호 의원이 들어오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오늘도 내가 제일 늦었습니다.”
조 회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정활동을 하느라 바쁘실 텐데 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지요.”
한 의원은 제일 상석에 앉았고 마주보는 자리에는 조 회장이, 그리고 문가 자리에는 보현이 앉았다. 보현은 음식을 주문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음식과 술이 나와 책상에 올려졌다. 한참 동안 음식을 먹고 술을 돌리며 잡스러운 농담을 하다가 조 회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모이자고 한 것은 미르타워 진행상황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토지매입과 인허가도 완료됐고 다음달 1일 착공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한 의원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벌써요? 이거 축하드려야겠네요. 자, 우리 다 같이 건배합시다.”
술을 한 잔씩 마신 후 다시 조 회장이 입을 열었다.
“각종 인허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 위원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한 의원님이 아니었으면 언제 시작할지 기약도 없을 뻔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공사기간은 3년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권 검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법률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특히 공무원들이 시비를 걸면 바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조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사실은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겨서 권 검사님께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윤 변호사가 말씀해주세요.”
보현은 서류를 한 장 꺼내 권 검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납품기업이 가격을 터무니없이 부풀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바꿀 수도 없는 일이고요. 뒷조사를 해보니 많은 비리가 쏟아져 나오더군요. 검사님은 그저 비리를 조사하는 척만 해주세요. 우리는 그걸 무마해주는 대가로 건설비용을 적정 가격으로 다시 협의할 생각입니다.”
윤 검사는 보현의 자료를 대충 훑어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모든 일은 공정해야하는데 아직도 이런 자들이 있군요.”
조 회장은 한 의원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이제 미르타워 건설도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갔습니다. 제 다음 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속 깊은 회장님의 꿈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조 회장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우리 한 의원님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자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한 의원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는 그런 그릇이 못됩니다.”
“의원님이 안 되면 누가 된단 말입니까? 거사를 하는 마당에 리더는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됩니다. 당당하게 말하십시오. 나를 따르라.”
“하하, 그럴까요?”
한 의원은 술잔을 들고 외쳤다.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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