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화 염원
제 25화 염원
야근
어둠은 커튼처럼 창문을 가리고 있다.
시계바늘은 자정을 넘어가고
여자 친구는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낯선 발자국 소리가 복도 끝에서 부터
다가오나 보다.
무서워요. 무서워 죽겠어요.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 뭉텅이가
입을 꽉 다물고 노려본다.
가위 바위 보나 할까? 보자기를 내밀자
호치키스가 망상처럼 손가락을 찍었다.
깊고 진득한 내 비명소리는
고독에 묻혀 벌레 소리보다 작았다.
나는 텅 빈 사무실
책상 위로 올라가 눈물이 마를 때까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애처롭게 내 얼굴을 응시하던 나의 꿈은
캄캄한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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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은 그 선을 가리키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저게 무엇이죠?”
옆 사람은 망원경을 들어 선율이 가리킨 지점을 보면서 말했다.
“어디죠?”
“막 별똥별이 지나간 곳입니다. 가로로 하얀 선이 보이지 않나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잘못 본 것 아닙니까?”
그러나 선율의 눈에는 여전히 하얀 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옆 사람이 선율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동안 하얀 선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전망대로 회오리바람이 몰아닥쳤다. 일출전망대를 사정없이 휩쓸며 내달리는 바람에 텐트가 뒤집혔고 카메라도 몇 개 전망대 밑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사람들은 나무 기둥을 붙잡고 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선율은 전망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어떻게든 하늘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순간 하얀 선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밤과 별의 색과는 확연히 다른, 투명한 비눗방울로 만든 아주 긴 띠 같은 것이었다.
선율은 그 하얀 선을 잡아보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비눗방울이 터지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선율은 안타까운 마음에 “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
선율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바람이 가라앉고 주변에는 텐트와 카메라 장비를 챙기며 투덜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했지만 선율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여명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기만 하던 하늘에 주황색 빛이 나타나 세상을 하늘과 땅으로 갈라놓았다. 먼 하늘부터 차차 밝고 푸른빛이 밀려와 산등성이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황색 빛은 노랗게 변한 뒤 무엇에 떠밀리듯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그 밑으로 밝고 동그란 빛 덩어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일출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만 솟아오르는 태양의 춤사위에 박자를 맞추는 듯 했다. 선율은 창졸간에 연거푸 격동을 받은 탓에 눈이 뿌예지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장면이었다. 하루의 시작이라는 말로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찬란했다. 무한한 기대와 소망, 염원이 빛 덩어리로 뭉쳐있었다. 원래 시작이란 이토록 영광스러운 것일까? 항상 시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이러한 찬연한 기쁨을 매일같이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자 빛이 가운데로 모이면서 태양의 윤곽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빛줄기는 눈을 마주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렬해졌다. 산등성이부터 황토색 고랭지 밭까지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수확이 끝난 고랭지 밭의 황량함을 몰아내고 따스한 온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시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물건들을 싸매느라 분주했다. 선율은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미다가 문득 멍에전망대 돌담 위의 자그마한 돌탑이 궁금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돌탑이었다. 이미 쓰러졌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일단 머리에 떠오르자 확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조바심이 났다.
선율은 고정 줄에 매달려 들썩거리는 텐트를 바라보았다. 로프는 팽팽하게 당겨져 움찔움찔하고 있었지만 얼마간은 지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난간에 묶여있는 고정 줄의 매듭을 한번 당겨본 후 멍에전망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한결 밝아져 도로의 굴곡과 잔돌들도 훤히 볼 수 있었다.
한걸음에 내달렸다고 생각했지만 한 20분은 걸린 것 같았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로 들어와 마른기침이 나왔다. 일출전망대 못지않게 강풍이 휩쓸고 있었다. 조그만 돌탑 따위가 견딜 수 있는 바람이 아니었다.
선율은 그래도 반신반의하며 멍에전망대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강풍이 갑자기 위에서 아래로 몰아쳤기 때문에 날려가지 않도록 돌계단을 꽉 붙잡고 웅크렸다. 한걸음 떼기가 껄떡고개를 오를 때보다 더 힘들었다.
간신히 오른 후 거의 탈진이 되어 한참동안 숨을 헐떡였다. 이어 돌탑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일으켰다. 황토색 개량한복을 입은 한 할머니가 돌탑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구봉 할머니였다. 선율은 놀라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할머니! 구봉 할머니 맞으시죠?”
할머니는 선율의 물음을 무시하고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늦다니요?”
“오래 기다렸어.”
“저를요?”
“그래.”
선율은 이유를 물으려다가 할머니 앞에 놓여있는 돌탑을 보았다. 강풍 속에서도 부스러기 하나 떨어뜨리지 않은 채 고스란히 서있었다. 선율은 감탄했다.
“아, 이렇게 신기한 일이 또 있을까?”
할머니는 선율을 힐끗 보며 말했다.
“자네가 이 돌탑을 알아?”
“어제 저녁에 보았던 것입니다. 너무나 작고 약해 보여 강풍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있습니다. 정말 경이롭습니다.”
할머니는 돌탑 앞에서 합장하며 말했다.
“얼마나 염원이 깊었으면 이런 세찬 바람에도 꿈쩍하지 않누?”
“이 조그만 돌탑에도 소망이 깃들 수 있습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소망이 깃들어있지. 조그만 것, 큰 것 할 것 없이 말이야. 단지 보려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야.”
선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누가 이 돌탑을 쌓았을까요?”
“이 돌탑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주 강한 염(念)이야. 간절하게 소망하는 마음이란 말이야. 염이 깊어지면 단단한 결계가 생겨 바람이나 외부의 이물이 침입하지 못하게 되지. 이런 강풍도 돌탑을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니 돌탑 주인의 염원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알겠어.”
선율은 할머니가 상념에 잠긴 것을 눈치 채고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했다.
“구봉 스님이 바람이 다니는 길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다섯 가지 징후, 즉 고요, 평화, 안식, 소망, 용기가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할머니께서 말해준 거라고 했죠. 그렇다면 이 돌탑이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징후 중의 하나인 소망이 맞습니까?”
할머니는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를 보이며 말했다.
“자네가 바람이 다니는 길을 어찌 알아?”
“저는 바람이 다니는 길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저에게 이야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는 선율을 뚫어지게 보더니 돌탑 앞에서처럼 합장을 했다.
“기차 사고 때 공덕을 쌓았던 사람이었군. 자네는 좋은 사람이야. 자네의 앞일은 바람 같아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 내가 아는 것은 아주 하찮은 것이라 얘기를 해주고 말고 할 것도 없어.”
할머니가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러다가 바람이 다니는 길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선율은 목에 힘을 주고 강하게 말했다.
“돌탑이 다섯 가지 징후의 하나인 소망이 맞습니까?”
“그래. 돌탑은 소망의 정화지.”
“바람이 다니는 길이란 무엇입니까?”
“그 길은 하늘로 가는 길이야. 나도 아들을 따라가려고 방방곡곡 그 길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지. 바람이 다니는 길이라는 말도 그 때 들은 거야.”
선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점점 허무하고 공허한 기운이 마음을 가득 메워 견디기 힘들었다. 할머니는 선율을 따라 하늘을 보며 이어서 말을 하는 듯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맑고 높게 변하고 있었다. 소리는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리에서 저절로 울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다니는 길은 죽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야. 죽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지. 그래서 예전에는 죽은 자의 길로 불리기도 했어. 윈더들은 천국으로 가는 영혼들을 볼 수 있지. 바람이 다니는 길에 오른다는 것은 죽은 자들과 가까이한다는 것이야. 앞일을 알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선율은 가엽게도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죽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얘기를 듣자 두려움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윈더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선율은 두리번거리다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멀리 할머니가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율은 있는 힘을 다해 쫓아갔다. 그러나 거리는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선율은 할머니의 뒤에다가 소리쳤다.
“나머지 용기의 징후는 무엇입니까? 바람이 다니는 길은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그러나 선율의 목소리는 황토밭 위에서 쓸쓸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할머니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선율은 긴 한숨을 토하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일출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선율의 천막은 바람에 날려 도로 위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 짐을 챙기느라 남의 텐트까지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 선율은 달려가 텐트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중요한 물건은 없어지지 않았다. 옆에 있던 사람이 미안해하며 말을 했다.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바람이 워낙 세서 우리도 물건을 많이 잃어버렸어요.”
“괜찮습니다. 마음 써줘서 고맙습니다.”
선율은 텐트를 접고 꼼꼼히 짐을 쌌다. 그 동안 사람들은 하나 둘 뿔뿔이 흩어져 떠나갔고 일출전망대에는 선율만 남게 되었다. 그는 배낭을 짊어지고 내려가다가 멍에전망대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구봉 할머니가 그 자리에서 부르는 것 같아 좀체 발을 돌릴 수 없었다. 바람은 이제 선선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이중인격자처럼 조금 전과는 아주 다른 얼굴을 하고 부드럽게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선율은 줄에 묶여 끌려가듯 멍에전망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안반데기 카페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박 교수였다. 선율은 귀찮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박 교수는 서슴없이 다가와서 빨갛게 충혈 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날 밤을 새웠더니 피곤하군요. 선율 씨도 보았겠죠?”
“은하수나 일출이라면 잘 보았습니다.”
“아니 그것 말고요. 바람이 다니는 길 말입니다.”
선율은 깜짝 놀라며 박 교수를 보았다. 바람이 다니는 길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율은 의심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바람이 다니는 길이라뇨?”
박 교수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하하하. 왜 그러십니까? 지금 바람이 다니는 길을 찾고 있는 것 아닙니까? 또 머리를 식히러 왔다고 할 생각입니까? 나는 새벽에 별무리를 가로로 나누며 하얀 길이 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율 씨도 보았을 겁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선율은 목소리를 낮게 갈고 박 교수를 응시하며 재차 물었다.
“바람이 다니는 길은 어떻게 안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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