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화 데비툼의 향기
제 28화 데비툼의 향기
귀머거리
양아치 새끼한테
까닭 없이 두들겨 맞은 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괜찮다. 그저 괜찮다.
선생님의 말씀
머리가 깨진 친구가
빨간 피 소리를 내어도
듣지 못한다.
지나가는 노인의 기침소리
주인을 찾아 헤매는 고양이 소리
듣지 못한다.
나의 귀는 닫힌 것일까?
이렇게 커서 어른이 되었는데.
거울을 들고 동굴 같은 귓구멍을 바라본다.
한 마리 벌레가 고막을 두드리며 울부짖지만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나는 원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소리는 갈 곳을 일러주고
소리를 따라 움직여야하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내가 사라진 것일까?
소리가 사라진 것일까?
더 이상 듣지 못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
가장 슬픈 일은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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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경은 정화가 어머니를 들먹이자 숨이 탁 막히고 피가 머리로 몰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인내심이 거의 바닥이 나 폭발할 지경이었다.
정화는 어머니의 오랜 친구라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운경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정화는 어머니의 친구라는 명목으로 운경에게 접근을 해서 전시회 비용을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다. 어머니의 친구라고 하지 않았다면 계약서를 세세히 읽어봤을 테고 절대로 그런 계약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와서 전시회를 취소할 수는 없었다. 운경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허탈한 표정으로 선홍을 바라보았다. 선홍은 그 모습을 보고 무엇에 홀린 듯 손을 뻗어 운경을 만지려 했다. 운경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피했다. 하지만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무래도 오늘은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설 화백! 설 화백!”
운경은 정화의 만류해도 불구하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벌떡 일어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홱 돌려 뛰다시피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모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하는 짓이야? 왜 다된 밥에 코 빠트리는 짓을 하는 거야.”
“미안해, 엄마.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별로 예뻐 보이지도 않은데, 너는 꼭 저 여자야만 하겠니?”
“반드시, 꼭, 꼭, 꼭이야. 운경이 아니면 나는 죽어버릴 거야.”
“쯧쯧. 바보 같은 녀석. 좋아, 어디 두고 보자. 전시회는 천천히 망가뜨리면 돼. 절대 내 돈을 갚지 못하도록 말이야. 호호호. 빚을 독촉하면서 천천히 너에게 엮어주면 되겠지.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예의를 지키고.”
“알았어. 엄마.”
운경은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입술을 깨물며 꾹 참았다. 문득 불어온 바람이 운경의 머리카락을 하늘 높이 말아 올리자 촉촉이 적셔진 두 눈이 드러났다.
전시회가 열리는 날은 하늘이 매우 맑았다. 더하지도 않게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햇빛은 구르는 낙엽들과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운경은 전시회장 입구에서 푸른색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서 있었다. 그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하늘과 구름, 바람과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운경은 여신처럼 미소를 짓고 쉴 새 없이 인사를 했다. 그러나 가슴이 쿵쿵 뛰고 땀이 흘러내려 손수건을 움켜쥐고 계속 땀을 닦아야 했다.
눈에 띄게 허둥대며 몸을 움찔움찔했고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떨리는 것을 막아보려고 손등을 꼬집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박 화백이 다가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운경아, 무슨 일 있어? 몸이 많이 불편해 보여.”
“아니에요. 너무 긴장해서 그래요.”
운경은 박 화백을 보자 비로소 두근거림이 진정 되었다. 운경은 고맙다는 표시로 가볍게 인사를 했다. 운경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눈을 고정시킬 틈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갈 때였다.
“운경아! 잠깐 이리와 봐.”
성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희는 시간을 내어 전시회 일을 도와주고 있는 운경의 친구였다. 운경은 박 화백에게 양해를 구하고 성희에게 갔다.
성희 옆에는 30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신사가 카키색 정장에 주황색 넥타이를 하고 서 있었다. 특이한 옷차림이었지만 의외로 잘 어울렸다. 운경의 시선은 주황색 넥타이에 꽂혔다. 어둠 속에 감춰져 있는 열정일까? 그 때 성희가 운경의 상념을 끊고 말을 했다.
“이 분이 이 그림에 대해 물어보고 싶대.”
젊은 신사는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명 화성이라고 합니다. 조그맣게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명함에는 화성기획 대표라고 적혀 있었다. 운경은 놀라서 명 화성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화성기업의 대표라기에는 너무 젊었기 때문이었다.
화성기업은 그림이나 도자기 등 예술품 경매로 유명한 회사였다. 그 화성기획의 대표라면 예술계에서는 꽤 입지가 탄탄한 거물이었다. 그런데 화성은 거만한 기색이 전혀 없이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은 채 운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경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밝은 톤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설 운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군요. 그림을 보면 오랫동안 세상을 경험한 명인의 흔적이 역력한데 화가님이 이렇게 젊은 분이라니요.”
운경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과찬입니다.”
화성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한 그림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다른 그림들도 훌륭하지만 유난히 이 그림에 눈이 끌립니다. 그림 제목은 ‘생각하는 사람’으로 하셨군요. 그런데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밑에 바람개비는 돌아가는데 풀과 나뭇잎은 꼿꼿이 서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화성이 가리킨 그림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박 화백이 꼭 전시하라고 당부했던 작품이었다. 운경은 미완성이라고 생각해서 전시할지 말지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의외로 사람들은 자꾸 그 그림 앞에 몰려들었다. 화성도 마찬가지였다.
운경은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지 그림을 다시 훑어보았다. 붓 터치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고 무엇을 생각하며 그렸는지도 다 생각이 났다. 큰 애착은 있었지만 그다지 뛰어난 그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운경은 고개를 갸우뚱 한 후 턱을 들고 다소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기 전에 어떻게 느껴지는지 얘기해 주세요. 제가 무슨 생각으로 그렸든 중요한 것은 그림을 보는 사람의 느낌이에요.”
화성은 가볍게 웃었다. 조금 건방지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말을 꺼내기가 한결 쉬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성 같은 사람에게 질문을 받는 경우에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림에 대해 잘 꾸며서 설명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운경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화성은 운경의 솔직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내 느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 화백의 생각도 꼭 알고 싶군요. 음, 그러면 이렇게 하죠. 먼저 내 느낌을 말씀드릴 테니까 다음에 설 화백의 생각을 얘기해 주세요. 어때요?”
운경은 화성의 눈빛에 전혀 악의가 없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 번 말씀해 보세요.”
화성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동양화의 표현법 중 홍운탁월(烘雲托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직접 그리지 않고 주변의 구름을 이용해 마치 달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서양화와는 달리 동양화에서는 달을 직접 그리지 않습니다. 단지 주변 사실로 달이 있음을 표현할 뿐입니다. 다른 것을 빌려서 돋보이려는 대상을 한층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지요.
설 화백은 서양화를 그리면서 동양화의 기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없지만 있기도 하고 바람은 불지 않지만 바람개비는 돌아갑니다. 보이는 것에 의해 세상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까요?”
운경은 손으로 가만히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이론화해서 말씀하지 마세요. 그렇게 대단한 작품은 아니랍니다. 그냥 느낌을 얘기해 주세요.”
화성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아는 척 하려다가 들키고 말았군요. 사실 나는 그저 평온함을 느꼈습니다. 너무 평온해서 한숨 자야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작가의 생각이 궁금했던 겁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려야 이런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의도를 갖고 그리지 않아요. 순간순간 스쳐가는 생각을 잡아둔다는 마음으로 그립니다. 내 생각을 대상에 입히고 거기서 나오는 의미를 표현하려는 겁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공원에서 사람들과 풍경을 바라보며 그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지만 표정은 어두웠습니다. 겉은 풍요롭지만 내면은 황폐합니다. 물질적으로 지나치게 발전했기 때문일까요? 물질적인 풍요를 정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풍요로움의 노예가 되어 진정한 행복을 잃어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규범과 규칙에 억눌린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자신의 모습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이 없습니다. 굵은 외곽선은 사람의 외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안에 나무도 있고 들풀도 있고 강물, 장벽도 있습니다.
바람은 불지 않지만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기운으로 바람개비가 돌아갑니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또는 천천히 돌기도 합니다.
나뭇잎은 바람이 불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나무의 기운이 다해서 떨어지는 겁니다.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것도 바람이 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피폐해졌던 정신이 몸을 일으키고 생명을 갖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화성은 운경의 말을 듣고 다시 그림을 보았다. 그림의 의미가 명확해지며 터치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다. 아울러 운경의 모습이 그림과 동화되며, 눈부시게 반짝거려 마음을 뒤흔들었다.
화성은 운경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화성은 이토록 한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유망한 기업을 운영하는 젊은 대표에다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수많은 아름다운 여자가 그를 유혹했지만 화성은 코웃음 치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도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운경은 달랐다. 보면 볼수록 정신없이 빨려드는 것 같았다. 마법에 걸린 것일까? 더군다나 운경의 몸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향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운경은 익숙해져서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데비툼의 향기였다. 큐피드의 화살처럼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온갖 고뇌와 근심을 잊게 만드는 사랑의 묘약이었다. 그 향기에 취하면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데비툼은 이제 열매를 맺고 크게 자라났으며 운경의 몸의 일부가 된 듯했다. 본래의 운경의 매력에 더해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끌려들어갔다. 김 인준 교수도 그렇고 박 선홍도 그랬다. 이제 명 화성도 그 중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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