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화 장 기자의 위기
제 43화 장 기자의 위기
이사 가는 날
이사 가는 날이다.
소주박스 어깨로 나르던 아버지
오십견이 왔단다.
더 이상 짐을 지지 못한단다.
그래서 이사 간다.
오래된 책, 귀한 LP판, 전축,
그리고 자존심
다 버리고
절망한 나의 넋을 주워
박스에 담는다.
==============================================================
한편 선율은 바람이 다니는 길에서 내려온 후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낯선 어느 아파트의 놀이터에서였다. 기차 사고가 있던 때처럼 순천 송광사에서 한순간 서울로 날아온 것이다.
하지만 선율은 그런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으로 극심한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낙엽이 떨어져 단 하나의 뿌리를 살찌우게 하듯이, 수많은 인생의 영광을 단 하나의 양심을 위해 썩히리라.’
아버지가 만들어 주었던 액자의 글귀를 되뇌어 보았다. 그 어디에 아버지의 냉정하고 비열한 모습이 들어있단 말인가? 선율은 지금껏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진면목을 본 순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믿음이 컸던 만큼 절망은 분노로 바뀌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예전에 아버지가 죄를 지면 어떻게 할 건지 선율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분명히 대답했다. 아버지가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선율은 사무실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선율은 노크도 안 하고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직원들은 다 퇴근하고 보현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선율이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보현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노크도 없이.”
선율은 깜짝 놀라는 아버지를 보며 더 의심이 들었다. ‘혹시 나쁜 일을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는 것이 아닐까?’ 선율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가까이 다가갔다. 보현은 한숨을 내쉬고 선율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리 앉아라. 그런데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오다니.”
“지나가다가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어서 올라와봤어요. 여전히 열심히 일하시네요.”
“너는 취재여행 간다고 하지 않았니? 벌써 올라온 거야?”
“피곤해서 조금 쉬려고 올라왔어요. 날씨가 추워지니까 쉽지 않아요.”
“맞아. 일단 건강을 먼저 생각해야지.”
보현은 몹시 초조해보였다. 예전과 같이 느긋한 모습은 없고 긴장해서 자꾸 선율의 눈치를 보았다. 선율은 신문사 일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버지. 인우건설의 정 소장이라고 아세요?”
보현은 깜짝 놀라 눈이 크게 떠졌다.
“네가 정 소장을 어떻게 아는 거야?”
“저는 신문사 기자에요.”
“장 기자에게 들었냐?”
“장 기자 말고도 들을 곳은 많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렇게 변하셨어요?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아요.”
보현은 물끄러미 선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냐?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
선율은 ‘아버지, 나는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라 직접 보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보현의 얼굴은 말을 하면 할수록 평온해졌다. 선율이 직접 보지 못했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선율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정 소장에게 작업명령서와 다른 자재를 사용하도록 종용하지 않았습니까?”
순간 보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 모호한 표정으로 선율을 바라보다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장 기자는 나쁜 놈이구나. 어떻게 그렇게 모함을 할 수 있냐?”
“아버지. 전에 내가 드린 말 기억하죠? 아버지가 잘못된 일을 하면 끝까지 막겠다고 한 말을요. 오늘 온 것은 사실을 확인하러 온 게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온 겁니다.”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선율은 대답 대신 보현을 사납게 쏘아봤다. 순간 보현은 조 회장이 구렁이 박 봉근을 부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상황으로 보아 그는 장 기자를 처리하기 위한 킬러가 분명했다. 장 기자는 미르타워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언론에 공표하려고 했기 때문에 표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선율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직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있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장 기자처럼 미르타워를 조사한다면 어떻게 될까? 장 기자처럼 표적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조 회장의 성격으로 보아 보현의 아들이라고 해서 봐주지는 않을 것이다. 보현은 전신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져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선율이 잘못된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어떻게든 선율을 막아야한다. 선율이 일어나려고 하자 보현은 선율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선율아. 제발 모르는 척 할 수 없겠냐?”
선율은 선 채로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아버지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음을 인정하세요.”
“그래, 인정하마. 내가 잘못했다.”
“그리고 정 소장에게 사과하시고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미르타워는······”
보현이 말을 잇지 못하자 선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선율이 문 앞까지 이르렀을 때 보현은 말했다.
“알겠다. 네 말대로 하마.”
보현은 말을 내뱉고 크게 탄식을 했다. 일단 선율의 말대로 하자. 선율을 내버려둔다면 표적이 되어 죽을 수도 있다. 보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선율이 죽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기 싫었다. 선율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애처롭게 말하는 보현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한 번은 기다리겠습니다.”
방을 나오며 선율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선율은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비수를 꽂듯이 차가운 말을 던진 것에 대해 극심한 후회가 몰려왔다. 선율은 중얼거렸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선율이 보현을 만난 지 3일 후 장 기자는 저녁 늦게 신문사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미르타워 관련 자료는 모두 수집했고 사무실에서 정리를 한 후 다음 날 공표할 생각이었다.
장 기자는 멀리서 신문사 사옥이 보이자 걸음을 빨리했다. 기자실의 불은 이미 모두 꺼졌고 편집실의 창문 몇 개에서만 밝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높은 빌딩 사이에 끼인 작은 건물이어서 가까이 가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장 기자는 길이 몹시 미끄러워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심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얼른 일어나 길을 건넜지만 이상한 느낌이 들어 멈칫했다. 넘어지는 순간 어디선가 ‘앗!’ 소리를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장 기자는 길을 건넌 후 두리번거렸지만 누가 소리를 질렀는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잘못 들은 듯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걸어갔지만 그 불편한 느낌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분명 누군가 감시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가끔씩 뒤를 돌아보아도 길거리에는 흩어진 눈발만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장 기자는 옷깃을 여미고 뛰다시피 신문사로 달려갔지만 알 수 없는 시선은 목덜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장 기자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을 보고 경비원이 말했다.
“장 기자님.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기자실은 모두 퇴근했는데요.”
“야근 좀 하려고요.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뭐, 특종이라도 건졌습니까?”
장 기자는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5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러나 옷을 벗고 컴퓨터를 켜는 순간에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카락이 쭈삣 섰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장 기자는 미르타워에 관한 자료를 모두 선율에게 전송했다. 전송이 완료되자 비로소 안심이 되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가 잘못돼도 증거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박 봉근은 신문사 사옥 길 건너 구석진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서 있었다. 날씨가 몹시 추웠기 때문에 발이 시릴만한데도 꿈쩍하지 않았다. 흰 눈이 내리는 겨울에 까만 양복과 까만 선글라스를 착용한 특이한 모습이었고, 피부가 눈처럼 하얘 머리카락이 유난히 검게 보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의 눈에도 쉽게 띌 만한 특이한 모양의 그를 그대로 지나치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벽에 걸린 포스터 앞을 지나듯 눈길 한 번 주지도 않았다. 봉근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 때 장 기자가 나타났다. 봉근은 처음으로 고개를 움직여 그를 바라보았다. 장 기자는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크게 넘어졌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봉근은 ‘훗!’ 하고 웃었다. 장 기자가 들은 소리는 ‘앗!’이 아니라 ‘훗!’하는 웃음소리였다.
봉근은 천천히 장 기자를 따라갔다. 건물 밑에서 잠시 기다리자 5층 사무실 한 곳에서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봉근은 목표를 정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허리를 굽힌 채 정문 경비원의 뒤쪽으로 빠르게 움직이자 경비원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치 유령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건물 안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보자 그는 머리를 숙이고 옷으로 몸을 감싸며 느리게 움직였다. 흰 색은 감춰지고 검은 그림자만 불빛을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봉근은 감시 카메라가 없는 비상계단으로 올라갔다.
5층 계단 문을 열고 복도로 걸어갔다. 사무실 창을 통해 장 기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봉근은 문을 열고 천천히 다가갔다. 장 기자는 한기를 느꼈는지 몸을 움츠렸지만 사신이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봉근이 거의 다가왔을 때 장 기자는 컴퓨터 모니터에 낯선 얼굴이 비춰지는 것을 보았다. 검정 옷 색깔과 하얀 얼굴이 혼합되어 더 없이 끔찍하게 보이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장 기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다가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의자가 강하게 봉근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봉근이 찡그리며 발을 어루만지는 순간 장 기자는 재빨리 일어나 봉근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괴기한 모습이었다. 전혀 사람 같지 않았다. 장 기자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있는 힘껏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력으로 문 앞까지 달려가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장 기자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봉근이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장 기자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흔들어 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먹으로 내리치고 몸으로 부딪쳐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순간 봉근이 미리 문을 잠가두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 기자는 거의 이성을 잃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먹을 쥐고 방어하려했으니 전신에 힘이 풀리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봉근은 이미 눈앞까지 다가와 장 기자의 풀린 눈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