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화 교살
제 44화 교살
장 기자는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슬로모션처럼 느렸고 아무 힘도 없었다. 봉근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얼굴로 맞받았다. 쇠뭉치를 후려친 듯 극심한 통증이 일어, 장 기자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봉근은 팔목을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장 기자의 뒤로 돌아가 가볍게 오금을 걷어찼다. 장 기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봉근은 가느다란 등산용 로프를 꺼내 장기자의 목을 두 겹으로 감았다.
목이 강하게 조여지자 정신이 번쩍 든 장 기자는 로프를 힘껏 벌리려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봉근이 한쪽 발을 장 기자의 등에 받치고 힘껏 잡아당기자 장 기자의 얼굴은 금방 멜론색으로 변했고,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빨갛게 물들었다.
잠시 후 버둥거리던 장 기자는 축 늘어져 버렸다. 봉근은 장 기자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장 기자의 컴퓨터로 가서 저장된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미르타워 비리에 대한 증거자료가 주르르 화면에 나타났다.
봉근은 다시 인터넷 메일자료를 살펴보았고, 누군가의 홈페이지로 자료가 전송된 것을 확인했다. 봉근은 그 내용을 촬영한 후 장 기자의 하드디스크를 그가 가져온 하드디스크와 바꿔치기했다.
그리고 책상에 올라가 천정 보드를 뜯어낸 후 드러난 천정 틀에 로프의 한 쪽 끝을 걸고 다른 한 쪽에는 장 기자의 목을 묶었다. 그리고 책상 옆으로 시체를 밀자 대롱대롱 매달린 것이 영락없는 자살한 모양이었다.
봉근은 예술품을 감상하듯 빙긋 웃으며 바라본 후 하드디스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봉근의 동작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사람들이 왜 그를 구렁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선율은 그 무렵 영암 월출산의 억새밭 길을 걷고 있었다. 억새풀은 세찬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시달려 생기를 잃은 노인 같았는데, 생기가 없기는 선율도 마찬가지였다. 어깨를 움츠리고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지만 몇 번이나 길 없는 곳으로 가기도 해서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선율은 잠시 멈춰서 정상 방향을 바라보았다. 암벽과 바위들이 대부분이었고 볕이 잘 안 드는 곳에는 여전히 흰 눈이 쌓여있었다. 선율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며 온갖 근심을 깨끗이 씻어 내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심정과 운경에 대한 그리움이 한결 덜해졌다. 선율은 두 팔을 벌리고 크게 소리 질렀다. “야호!”
그 때 상념을 깨트리며 전화벨이 울렸다. 방 국장이었다. 방 국장이 직접 전화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선율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화를 받았다. 방 국장은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짧게 말했다.
“거기 어디야?”
선율은 방 국장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긴장해서 대답했다.
“여기는 영암 월출산입니다.”
“그럼 오늘 저녁에야 도착하겠네. 빨리 돌아와.”
“무슨 일입니까?”
“장 기자가 사망했어?”
“뭐라고요?”
선율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바꿔 쥐느라 억새풀에 손 등을 깊게 베었다. 하지만 조금 쓰라린 느낌이 들었을 뿐 상처가 생긴 지도 몰랐다. 방 국장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했다.
“장 기자가 사망했다고.”
“어떻게요. 누가 죽였습니까?”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어.”
“장 기자는 절대 자살할 리가 없습니다.”
“어쨌든 빨리 돌아와.”
선율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한 걸음도 걷기 힘들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놀라서 선율을 부축했다. 선율은 고맙다고 얘기한 후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신문사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그러나 아무도 퇴근하지 않고 모두 사무실에 모여 있었다. 선율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로 국장실로 들어갔다.
방 국장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떨이에는 이미 수십 개의 담배꽁초가 가득 담겨있었다. 선율과 눈이 마주치자 “왔어?” 라고 말하며 다시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들이켰다. 선율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담긴 채 방 국장 앞에 앉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방 국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선율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 경찰에서 연락이 왔는데 자살 같대.”
선율은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
“말도 안 됩니다. 장 기자는 절대로 자살할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 발견했을 때 등산 로프를 목에 걸고 천정에 매달린 상태였어. 아무도 들어온 흔적은 없었고.”
“아닙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경찰의 말만 믿고 자살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우린 기자이고 이 사건은 기자실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철저히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건 기자로서 직무유기입니다. 명예를 더럽히는 겁니다.”
방 국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국과수에서 부검을 하고 있으니까 모래쯤 결과가 나올 거야. 기다려 보자.”
선율은 문득 장 기자가 미르타워에 대해 조사를 하던 것이 생각나서 물었다.
“장 기자의 컴퓨터를 보셨나요? 장 기자가 조사하던 자료가 있을 겁니다.”
“이미 다 조사해봤어. 하지만 아무 것도 나온 게 없어.”
선율은 방 국장의 말을 듣자마자 장 기자의 책상 앞으로 뛰쳐나갔다. 동료들의 의아해하는 눈길을 뒤로하고 장 기자의 컴퓨터를 켰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케팅 자료 같은 쓸모없는 것들만 가득했고 사건 자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선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미르타워의 자료가 없다면 다른 자료라도 있어야 했다. 이 컴퓨터는 도저히 기자의 컴퓨터라고 할 수 없었다. 선율은 퇴근하려고 옷을 입고 있는 선배 기자에게 물었다.
“선배님. 이거 장 기자 컴퓨터가 맞습니까?”
“틀림없어. IP 주소가 장 기자의 것이야.”
선율은 잡다한 데이터 목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이 데이터를 보십시오. 기자의 컴퓨터에 이런 내용이 담겨있을 수 있습니까?”
선배 기자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모르겠어. 장 기자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본 사람이 없으니까 뭐라고 할 수 없어.”
선율의 머리는 의혹으로 가득차서 터질 것 같았다. 직원들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하나 둘씩 퇴근을 하고 있었다. 선율도 방 국장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막 등산을 다녀온 터라 몸이 개운하지 않았지만 샤워를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겉옷만 벗고 침대에 누웠으나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잠이 오지 않았다. 장 기자에 대한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뱅뱅 맴돌았다.
장 기자는 죽기 직전까지 미르타워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르타워와 관련이 있을까? 선율은 장 기자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가 그리워져 눈물을 펑펑 쏟았다.
눈물이 그치자 이번에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송곳처럼 머리를 푹푹 찔렀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일어났다 누웠다하기를 되풀이 했고 누워서도 이리저리 뒤척였다. 몸은 솜처럼 축 늘어지고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다음 날 다시 신문사로 갔을 때 방 국장이 가만히 선율을 불렀다.
“부검 결과가 나왔는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어.”
“예? 벌써 공표가 됐습니까?”
“그건 아니야. 사실 국과수 부검의 중에 내 친구가 있어. 그가 나에게 미리 알려준 거야.”
“자살이랍니까?”
방 국장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다 목에 걸렸는지 몇 번 콜록거린 후 물을 한 컵 들이켰다. 방 국장은 잠시 선율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윤 기자. 이게 무슨 일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왜 그러십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부검의가 말하기를 표피박탈이 심하게 나타났대.”
“표피박탈이요?”
“그래. 피해자가 저항을 할 때는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목에 살 표면이 벗겨지는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표피박탈이라고 해. 자살이라면 그렇게 심하게 나타날 수가 없다는 거지.
그리고 목의 앞부분뿐만 아니라 뒷부분에도 강하게 조인 흔적이 나타났어. 로프 자국 같다고 하는데 만약 자살이라면 뒷부분에는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또 등 한가운데 발로 짓눌린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등에 발을 대고 로프를 조이며 잡아당긴 것 같다는 거야.”
방 국장은 말을 마치자 한동안 침묵하며 선율을 바라보았다. 선율은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 등허리를 타고 숨이 멎을 정도로 끔찍한 공포가 흘러내려 선율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방 국장은 다시 말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윤 기자는 장 기자와 가장 친했으니까 알고 있는 게 있을 텐데?”
선율은 머리를 세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
“죽기 직전까지 미르타워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미르타워라면 조 회장이 짓고 있는 88층짜리 건물을 말하는 거야?”
“예. 그래서 어제 제가 장 기자의 컴퓨터를 뒤져봤던 겁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데이터에 저장된 자료들은 절대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바꿔치기 한 겁니다.”
“그렇다면 조 회장 측에서 벌인 일이다?”
방 국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심하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러나 상대가 조 회장이라면 어렵겠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냐.”
“무슨 소리입니까?”
“조 회장의 뒤에는 한 정호 의원이 있어. 한 의원은 대통령의 친구고. 그림이 그려지지? 우리가 조사를 하면 여럿이 다치게 될 거야.”
선율은 피가 머리로 확 몰리는 느낌이 들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이미 기자가 하나 죽었습니다. 누가 더 다친다는 겁니까?”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봐. 감정적으로 대처할 문제가 아냐.”
선율은 흥분해서 방 국장에게 따졌으나 방 국장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꿈적도 안 했다. 참다못한 선율은 문을 쿵, 소리 나게 닫고 밖으로 나갔다.
선율은 전산실 기사를 불러 장 기자의 컴퓨터를 뜯어보라고 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하드디스크는 기존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장 기자를 죽이고 자료를 없애기 위해 하드디스크를 바꿔친 것이 확실했다. 선율은 분노가 들끓어 술 먹은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오후 2시 경 국과수에서 장 기자의 사인을 발표했다. 국과수 부검의란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 몇 번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는데, 놀랍게도 장 기자의 죽음에 대해 타살로 인정할 만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율은 눈이 휘둥그레져 놀라 자빠질 뻔했다. 방 국장은 직원들 뒤에서 텔레비전을 지켜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구나. 벌써 손을 썼구나.’ 선율은 그제야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과수 부검의가 거짓을 말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선율은 초조하고 불안한 나머지 등과 가슴으로 비 오듯 땀을 흘렸다. 동료들은 그런 선율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선율은 한동안 서성이다가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선율은 씻지도 않고 자리에 앉은 후 컴퓨터를 켰다. 여행을 간 뒤로 많은 메일이 와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며 하나하나 열어보던 선율은 한 메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장 기자가 보낸 메일이었다.
보낸 시간은 사망 시간 바로 직전이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메일을 열어보자 미르타워에 대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선율은 장탄식을 했다. 장 기자의 자료에는 자금 횡령, 협박, 인허가 압력, 금품 살포 등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범죄가 망라되어 있었다. 자료 하나하나에 증거가 첨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검찰에 제출됐다면 꼼짝없이 얽혀 들어갔을 것이다.
선율은 자료를 자세히 읽어보다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현에 대한 자료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자료가 사실이라면 보현은 종범이 아니라 주범인 것이다. 선율의 얼굴은 울음이 터질듯 일그러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료가 공개된다면 보현도 감옥에 갈 수 있다. 선율은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었다. 서둘러 USB 메모리에 자료를 옮긴 후 보현의 사무실을 향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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