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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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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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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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1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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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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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닿은 손

DUMMY

들켰다.


라고 판단하는 건 섣부르지 않을까.


하지만 저 남자의 시선이 나에게 향한 이유가 우연히였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나의 정체에 있을 거다.


들려온 정보를 기억했다.


사간회. 경매간부. 구르게스.



'잭은 알려주지 않았는데···!'


역시 함정이었던 건가.


잭이 건네준 지도에는 백화라는 암살자가 자리를 비운 상태라는 것과 경매장에 들어오는 귀족들의 명부, 경비가 허술한 장소밖에 없었다.


정보가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에 손을 떼었어야 했는데.


그런 식으로 후회해봤자 늦은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돌아갈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나의 생명력이 무한하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죽을 위기에 처하고, 꽃잎이 타오르면 재가 되어 귀환한다.


꽃잎의 개수는 정해져있다.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꽃잎이 바닥나면 진짜로 죽는다.


여기까지도 추측에 불과하다. 사실은 아니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


확정되지 않은 기적에 생명을 맡긴다는 것은 어리석다.



'그렇다고 해서.'


아루아를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도 어리석다.


여기서 도망치면 그때부터는 손쓸 도리조차 없어진다.


적어도 누가 아루아를 구매하는지.


그것만 알면 희박하게나마 시간이 생겨난다.


재도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자신을 구르게스라 소개한 남성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에 응하여 쓴웃음을 섞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우연히 시선이 향했다는 형편 좋은 일은 아닌듯했다.


저 자는 틀린그림 찾기의 정답으로 나를 지적했다.


그러나 정답을 알아냈다고 해서 나를 잡아내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있다. 그들의 면전이다.

이곳에서 침입자를 검거해내는 것은 경비의 허술함을 자기 입으로 토로하는 것과 같다. 신뢰도가 떨어지겠지.


저 귀족들의 눈이 닿는 곳에 있는 한은 내 안전이 보장될 것이다.


조용함이 유지되었다.


고객들의 짧은 인내심을 고려한 경매간부는 손뼉을 치며 적막을 걷어냈다.



짝.



경쾌한 박수소리가 연회장을 떠나갔다.



드드드드드드.



땅이 진동했다.

연회장의 분수대가 움직였다.


지하로 이어지는 두 갈래의 계단이 모습을 들어냈다.


수군거리며 내려가는 귀족들의 뒤에 달라붙듯이 따라내려갔다.


등뒤가 서늘했다.


한 남성에 손수건을 든 채로 나에게 접근했다.


안경을 벗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앞사람의 어깨를 톡톡 쳤다.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혹시 이 안경의 주인되십니까?"

"흥! 그런 천박한 디자인이 나에게 어울릴 것 같나?"

"하하, 죄송합니다. 아닐 줄 알면서도 여쭈어본 무례를 용서해주십쇼."

"이제 됐다."

"드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타이밍 좋게 마지막 계단이 끝났다.


따라오던 남자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물러섰다.



"휴우···"


옷깃으로 식은땀을 닦아내었다.


안심하긴 이르다.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강렬한 한 줄기의 빛만을 남겨놓은 단상. 그 앞으로는 고급진 좌석들이. 좌석의 곁, 작은 테이블의 위에는 금색 띠를 두른 망원경과 숫자가 적힌 황금판이 놓여져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 벽에는 레드와인색의 커튼이 달려있었다.


저 커튼을 달아놓은 이유는 뭘까.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가리기 위해서겠지.


그리고 이러한 밀폐된 장소에서 그런 물건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문이다.


고민해야 한다면 왼쪽이냐 오른쪽이냐겠지.



철컥.



작은 해제음이 왼쪽 고막을 간질였다.


계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소리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수는 다섯을 넘는다.


저런 숫자로 덤비면 눈에 띄는 저항도 못해보고 죽는다.



'하는 수 없나.'


가능하다면 누가 아루아를 낙찰하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 상품과 고객의 정보를 순순히 넘겨줄 녀석들이 아니었다.


조직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커튼을 향해 다가갔다.


가슴 주머니에서 대거를 꺼내쥐었다.



챠락.



커튼을 가능한만큼 성대하게 개봉했다.


왼쪽 벽과 가까운 귀족들의 호기심과 불만섞인 시선들까지 나에게로 몰렸다.


이 정도의 소란은 피워도 괜찮다.


이 점만은 내가 유리하다.


보여지기를 서슴치 않고 문을 열었다.


누군가가 문을 붙잡고 닫기를 방해했다.


문고리를 확인했다. 열쇠로 잠그는 구조. 닫아봤자 별 의미가 없다.


힘겨루기를 유도하다가 상대의 힘이 강해졌을 때에 놓았다.


왼쪽으로 향하는 길. 그리고 오른쪽으로 향하는 길.


가운데에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이다.'


귀족들을 따라 계단을 내려오면서 기억에 새긴 단상을 떠올렸다.


그곳의 중앙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틈새가 보였다.


아마도 리프트겠지. 사람 하나를 가둘만한 우리를 올린다면 딱 맞는 크기였다.


내가 들어온 문의 크기, 단상의 위치를 고려하면 답은 명확해졌다.


계단 위로 발을 내디뎠다.


빠르게 달려서 내려갔다.


누군가를 스쳐지나갔다.


아랫층의 인원들은 상황을 전달받지 못한 모양이다.


3층에 도달했다.


그곳에서부터는 분위기가 돌변했다.

고급스런 대리석이 사라지고, 울퉁불퉁한 돌벽과 바닥이 보였다.


드높은 천장.


커다란 원통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하늘에는 천장을 향해 올라가는 리프트와 우리 안에 갇힌 알몸의 여성이 떠있었다.


붉은 머리카락.


슬픈 느낌이 들면서도 아루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뭐지···?'


뒤따라오던 남자들은 계단을 내려오지 않고 몸으로 막고만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불길함을 느끼며 몸을 움직였다.


나를 여기에 가둬둔다고 해서 저들이 좋을 건 없을 텐데.


차라리 빠르게 달려와서 처리하는 편이 나을 거다.


다른 일행들이 합류할 시간을 기다리는 건가.


아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곳의 남자들에게 나를 붙잡으라고 외치면 그만이다.


철창을 나르는 남자들의 수만 해도 스물은 거뜬히 넘는다.


감독관들까지 합치면 서른이다.


고작 한 명을 경계할 이유라곤 없다.


이런 숫자를 감당할 정도로 강했더라면 차라리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난장판을 만들었겠지.


상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백화, 라고 했던가.


콜로세움에서 만났던 그녀를 경계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는 걸까.


저들의 눈에는 내가 백화보단 약하지만 못지 않은 강함을 지니고 있으리라 판단한 건가.


그것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반에 분수대의 밑으로 내려올 때에 따라붙은 두 명의 행동이 해설되지 않는다.



'수상해.'


그러나 수상하다고 여겨봤자 알 방법이 없다.


정보가 부족하다.


의문을 접어두고 아루아를 찾는데에 집념했다.


바퀴가 달린 철창들이 세 개씩은 지나다닐 넓이의 복도를 뛰어다니고, 원통형의 공간에서 하늘색을 찾아다녔다.


이 공간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까.


숨이 차도록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달라붙는다.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하는 건가.'


어째서, 라는 질문이 생겨났다.


하나로는 모자라서 횟수를 늘려갔다.


그래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양문(兩門) 하나가 나왔다.


철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


문에는 쇠사슬이 휘감겨 있었으나, 자물쇠가 걸려있지 않았다.


쇠사슬을 뿌리치고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아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가가 뜨겁게 젖어들었지만 소매로 닦아냈다.


그녀가 보였다.


그토록 찾아헤맸던 그녀가.


맑고도 옅은 하늘색의 머리카락.


그녀가 맞다.


아루아가 맞다.


아루아다.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아루아가.


살아있어주었다.



"아루아!"


달려들어 철창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잠겨있다는 개념을 잊어버리고,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아루아! 아루아!"


답은 없었다.


그녀는 몸을 구석에 웅크린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째서···?'


다가가서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가 나를 보도록 만들었다.


그제서야 아루아를 들을 수 있었다.



"아···?"


짧은 탄성.


그러나 그마저도 나에겐 희망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꺼내줄"


턱.



말이 끊겼다.


의도한게 아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조였다.


가죽 장갑의 촉감이 목을 쥐어 터뜨리려 들었다.



"으, 으으윽!"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목을 조르는 손목을 붙잡고, 손톱을 세웠다.



드득.



딱딱하다. 사람의 피부가 아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잭이 보낸 것치고는 싱겁군요. 이건 배신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어요."


숨이 막힌다.


죽는다.


눈앞에 아루아가 있는데.


손을 맞잡고 있는데도.


멀어져간다.


아루아가 멀어져간다.



"끅, 끄으으으!"


꽃잎들이 아른거린다.


다섯 개.


하나가 타올랐다.


아루아와 맞잡은 손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반드시, 반드시 너를 구해내겠어···!'


눈앞이 어둠을 맞이했다.



...



'돌아왔다.'


이제는 내가 죽지 않았다는걸 직감할 수 있다.


눈을 뜨면 앞이 보인다는 것도.


이번에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도.


좌절감과 함께 사무치게 깨닫는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예전의 나는 이 풍경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나보다.


따사로운 햇볕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호수. 그곳을 둘러싼 형형색색의 꽃들은 바람에 살랑였다.


한결같이 노닐다가 날아오르던 참새 한 쌍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나 할까.


그곳에는 새까만 갑주를 입고 새까만 검을 쥔 기사가 서있었다.


놀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잘 모르겠다.


과거의 나는 어떻게 놀랐던 거지.


그녀와 만났던 시간보다도 그녀를 그려왔던 시간이 더욱 길었기 때문일까.


찰나의 만남은 줄어든 희망에 대한 갈증을 유발했다.



『잭이 보낸 것치고는 싱겁군요. 이건 배신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어요.』


구르게스의 말을 떠올렸다.


나를 조롱하는 내용이었지만, 중요한 정보를 담고있었다.


잭이 보냈다.


즉, 그는 잭이 나를 보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구르게스는 잭을 알고 있고, 잭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다.


경매간부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경매장을 총괄하는 녀석이겠지.


마지막 계단에서 조직원들이 나를 덮치지 않은 이유.


그것은 잭이 보낸 내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아내기 위해.


잭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기 위함이겠지.


나는 잭의 목적에 포함되어있고, 구르게스는 잭이 나를 보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잭은 백화와 교전을 펼쳤고, 백화는 구르게스의 수하였다.


나의 목적은 '아루아를 구한다.'

잭은 나의 목적을 알고 있다.


퍼즐이 서서히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면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칠 수 있을 거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기억들을 합쳐라.


머지않았다.


머리를 쥐어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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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녹빛의 검은 백화(白花)를 피워낸다. 21.05.04 62 0 12쪽
117 재생 21.04.28 8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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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정보상과 의사 21.04.25 74 0 17쪽
114 상실 21.04.24 62 0 9쪽
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63 0 11쪽
112 낙마 21.04.14 61 1 13쪽
111 구역질 21.04.12 79 0 11쪽
110 발자국 21.04.09 108 1 12쪽
109 발을 들이다 21.04.07 93 0 11쪽
108 아침에는 가재 21.04.03 103 1 11쪽
107 별들에게 호소하는 밤 21.03.27 73 1 13쪽
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71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76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80 1 11쪽
103 잭이라는 화제 21.03.19 80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67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5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1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5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79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72 0 13쪽
96 촉수 21.02.08 99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17 0 12쪽
94 탄로 21.02.06 7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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