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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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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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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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심

DUMMY

유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인형을 끌어안은 채로 잠든 유리아의 모습은 다른 평범한 소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만이 조금 다를 뿐이지, 겉으로나 속으로나 육안으로 보기에는 그저 어린 소녀.

그런 유리아를 죽여야 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유리아를 찾아내기 전, 가방 안에 무언가가 적힌 종이들을 넣어두었던 걸 기억해냈다.

유리아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은 그곳에 적혀있을 거다.

그 가방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자신의 반쪽처럼 가지고 다녔던 녹슨 검도, 전부. 혈관 속에 파묻혔을 때에 잃어버린 모양이다.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제법 답답하다. 유리아를 데리고 떠나겠다고 한다면, 백화가 납득해줄까.

애초에 유리아를 발견한 것도, 구해낸 것도 나이지만. 애석하게도, 이 세상은 약육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힘이 없으면,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빼앗긴다.


‘그래도 일단 대화는 해봐야겠지.’


어제의 그녀는 내가 여태껏 생각해왔던 비인도적인 학살자가 아니었다. 그것이 꾸며낸 태도일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거짓은 통하지 않고, 힘으로 이길 수도 없다.

어차피 내게 가능한 수단은 진솔한 대화만이 유일하다.

그 대화에 이점을 가지고 오기 위해서는 유리아에 대한 많은 이해도가 필요하지만, 가방을 잃어버린 이상은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그나마,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는 건. 유리아가 나를 루드라고 불렀다는 것.

그런 유리아에게 무언가를 물어본다면, 중요한 사실 한두 개쯤은 건질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백화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지만···

곤히 자는 유리아를 깨우고 싶지는 않다. 만일, 이 소녀가 죽어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져 있다면. 그 전까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이것은 나의 바람이 아닌, 루드의 바람이겠지.

영혼이 뒤섞일 때마다 기억과 감정들이 흘러 들어와서 그런지, 예전의 나처럼 행동하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나의 기억과 감정을 잃어버렸으니까.

이제는 리시스라는 청년을 연기하는 것도 아슬아슬할 지경이다.


“이제 와서 이래봤자···”


위선밖에 되지 않는다.

이용해먹을 생각으로 데려와 놓고 행복해주었으면 한다던가.

스스로가 생각해도 형편 좋은 도피라고 여겨지는 쓰레기 같은 발상이었다.


“하아···”


역시 교섭은 관두는 게 좋겠다. 유리아를 넘겨줄 마음이 좀처럼 들지를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마신의 부활이고, 그 부활에 유리아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유리아만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아루아까지 노리고 있고, 때문에 사간회로부터 아루아를 뺏어오고자 안달인 것이니까.

그리고 최악의 경우, 나마저도 마신의 부활을 위한 제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신들의 계획에 협조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유리아를 넘기며 파고들어 아루아를 몰래 빼온다는 작전이 불가능하다.

교섭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거다.

심지어는 부단장인 사레이스까지 죽였으니, 그마저도 들통나는 날에는 희망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쉽게 버릴 수 없는 가능성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 가능성을 들고 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원하는 때에 시행하기 위해서는 ‘재의 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재의 귀인···’


그건, 아마 루드의 또다른 이름이겠지. 그렇다면, 루드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나저나, 그럴 마음이 들고서야 변명을 찾는 버릇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있구나.

아직 나다운 일면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다소 안심했다.

확실한 단점이지만, 단점만큼 사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없다. 나다운 단점이 남아있다는 건, 나를 나라고 표현할 구실이 남아있는 거니까.

아마, 한 번쯤은 괜찮을 거다. 버텨낼 수 있겠지.

스스로를 격려하며, 눈을 감았다. 기억을 되짚었다.

루드의 기억이 상당량 흘러들어온 지금이라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익숙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재가 흩날린다. 녹슨 검이 파고든다. 시체가 된 영웅이 웃으며, 감사를 표한다. 고마웠다고, 수고했다고. 다음에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뛰어놀자고. 근거 없는 기약을 나누며···》


-투둑!


무언가가 신발을 두드렸다. 시야가 일그러져있었다. 뺨이 뜨거웠다.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슬픔이 모든 것을 휩쓸었다.


“뭐야, 이거···”


옷깃으로 눈물을 닦았다. 제정신으로 버틸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낭떠러지를 향해 발을 내딛는 감각. 그곳에는 끝이 있고, 보이는 풍경이 있다. 끝도 없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 끝이 보이는 곳에서 떨어지는 것. 보이지 않는 게 아닌, 보이기 때문에 더욱 두렵다.


“루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잠에서 깬 유리아가 걱정스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중하게 안고 자던 인형마저 내버려두고, 침대를 박차며 달려왔다.

작은 충격이 허리를 감쌌다.

유리아에 대해서도 알아내고 싶지만, 당분간 루드의 기억에 손을 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불과 3초 남짓한 시간동안, 나 자신이 완전히 지워졌다. 삶과 죽음의 틀에서 벗어난, 이치에 해당하지 않는 외딴 곳에 내던져져있었다.

다시 한 번 건드렸을 때, 나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


“왜 울어···?”

“우는 거 아니야.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그럼 이리 와봐.”


유리아의 주먹이 윗옷을 잡아당겼다.

그대로 힘의 방향을 따라 몸을 수그렸다. 눈높이가 맞자, 유리아가 눈에 대고 후후 바람을 불어주었다.


“됐어?”

“응, 됐어. 고마워.”


지금 말하고 있는 건, 내가 맞을까.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이 나로부터 조금씩 빗겨나고 있었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없게 되는 게 필연이라면, 차라리 넘겨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요즘 들어 강해지고 있었다.

루드에게 앞으로의 일들을 맡겨두고, 리시스란 이름을 지닌 청년은 이곳에서 퇴장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아루아를 구해내는 사람이, 무조건 나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내가 그녀를 구하건, 루드가 그녀를 구하건. 아루아가 구해진다는 데에 별 차이점은 없다. 그녀가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문제라곤 없다.

누가 구하건 상관없는 거다.

나라는 사람 하나가 쓸데없는 이기적인 책임감과 쓸데없는 자존심,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기만 한다면···

고개를 저었다.

유리아가 의문을 가지고 올려다보았다. 혼자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니, 왜 그러는지 호기심을 품어도 이상하진 않겠지.

만일, 내가 루드에게 몸을 넘겨주고 소멸하기를 택한다면. 루드는 아루아를 구해줄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마 이 세상의 산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내가 사라지면, 루드는 반드시 아루아를 구해준다.

하지만, 그 전에 루드한테 얻어맞겠지. 그리고 그건 이제까지 해왔던 일들을 배신하는 셈이다. 내가 저질러온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거다.

이 이상은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다.

영혼한테 주먹으로 얻어맞는 감각은 꽤나 아팠다. 아프지는 않지만, 아픈.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충격.

맞으면 한동안 울렁거려서 걷는 데에도 애를 먹어야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

무엇보다, 그렇게 포기한 나의 영혼을 순순히 잡아먹어줄 것 같지가 않다.

그가 나를 위해 아루아를 구해주는 건, 내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그녀에게 다다르지 못했을 때겠지.

스르륵. 작은 마찰이 배를 간질였다. 커다란 인형에게 안기듯 배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유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의 고개도, 유리아를 따라 돌아갔다.

그곳에는 활짝 열린 문이 있었고, 고개만 내민 백화가 유리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밥!”


먹기 위해 살아가는듯한 유리아가 나를 팽개치고 식탁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용돈보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저녁메뉴 정하기를 선호했던 옛날이 그리워졌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만날 수가 없다면. 너는 그 사람을 포기할 수 있나?』

『렌은, 포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도, 포기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생명의 신께서 하사해주신 기적으로도 죽은 사람은 살려낼 수 없어요. 그게 세상의 이치에요.』


수많은 말들이 지나갔다.


『이제, 그녀를 풀어줘···』


늦어도 한참 늦은 생각. 알고 있다.

지금까지의 나는 아들로서 실격일 정도로, 멍청하고 이기적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제 와서 변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백화 씨.”

“···무슨 일이지?”

“제가 희생하면, 렌의 아버지는 살아나는 건가요? 지금까지 죽어왔던, 수많은, 죽어선 안 되었던 수많은 생명들이. 저희 어머니가, 살아나는 건가요?”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물었다.

한 사람만을 위한 희생은 하기 싫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어머니가 되살아날 수 있다면.

그걸로 아루아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죽음은 없지만,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살아가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 다음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갔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더했다가는,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사지를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끼익끼익. 마루가 거칠게 소리쳤다. 어금니를 깨물고 다가오는 그녀의 눈에 이성은 비치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직감에 그녀를 밀쳐내고자 손을 뻗었지만, 도리어 백화의 손에 붙잡혔다.

달려드는 그녀의 힘이 온몸을 밀치고, 짓눌렀다.

저항다운 행동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못한 채로, 그녀에게 밀려 넘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버린 등이 부서질 듯 아파왔다.

그녀의 무릎에 눌린 명치가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땅으로 꺼질뻔한 정신을 붙잡으며, 수차례 기침했다.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이 사방에서 나를 가두었다. 그녀의 부릅뜬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머릿결의 사이로 움켜쥔 주먹이 보였다.

영문도 모른 채로 위축되어버린 나는 눈을 감았다.

백화의 거친 숨결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말을 할 용기가 있으면, 왜 그러는지 묻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통증이 전해지지 않자,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용기가 생기고, 눈을 떴다.

그곳에는 여전히 백화가 있었다. 나의 위에 올라서서, 주먹을 쥐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무슨 변덕이 분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살기를 담고 있던 눈빛이 변해있었다.

무너질 것 같은 표정.

울어도 괜찮다고 한다면, 거절하지 않고 울어버릴 듯한. 한심스러운 내가 많이 지어보였던 표정이었다.


“···죽고 싶은 거면 나한테 말해. 그게 아니면,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그녀는 주먹을 거두었다. 나의 위에서 비켜서는 그녀는 스러질듯 휘청이다 중심을 잡고, 거실로 돌아갔다.

유리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에게 물어봤고, 백화는 비밀이라며 시치미를 떼는.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어깨와 목을 몇 번 돌려서 뻐근함을 해결하고, 방금 비춰진 그녀의 표정을 가능한 만큼 잊어버리기로 했다.

거실로 나오자, 얼른 오라는 유리아가 파닥파닥 손짓했다.

잠시 백화에게로 시선을 옮겨,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 자신도, 없었던 일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루드! 빨리!”


식탁으로 다가가 앉았다. 접시를 내려다보니, 거의 식어버린 카레가 보였다.


“유리아, 카레 좋아하는구나.”

“그건 아닌데, 백화가 이것밖에 못 만든데!”


쿨럭쿨럭. 기도를 마치고 첫 스푼을 삼키던 백화가 고개를 돌리고 기침했다.

그런 백화에게 무안함을 느꼈는지, 유리아가 재빠르게 변명을 시도했다.


“그, 그래도 백화가 만든 카레는 맛있어서 좋아해! 그치? 루드.”


빨리 답해달라고 손가락으로 쿡쿡 재촉하는 유리아였다.

뭐라고 해줘야할까.

카레를 내려다보며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서, 가장 적절한 말을 고르기로 했다.


“···싫어하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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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63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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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71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76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80 1 11쪽
103 잭이라는 화제 21.03.19 80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67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5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1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5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79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72 0 13쪽
96 촉수 21.02.08 99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17 0 12쪽
94 탄로 21.02.06 7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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