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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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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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3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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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DUMMY

잠에서 깼다. 침대의 푹신한 감촉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배에 작은 무게감이 실려있었다. 오른쪽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따스함에 고개를 돌리니, 유리아가 자고 있었다. 조그마한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쥔 모습에, 망설임이 태어났다.


“루드···?”


되도록 얌전히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유리아가 졸린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옷에서 떼어낸 유리아의 손을 내려놓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더 자.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우웅··· 아게써···”


몽롱한 혀로 알겠다고 답하며, 유리아는 졸음에게 패배를 선언했다. 베개 위로 풀썩 스러지고, 다시 눈을 감았다.

금방 오겠다고는 했지만, 금방이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아이에게까지 비겁하게 구는구나, 나는.’


세르나리아에서 평화롭게 지냈을 적에도 이랬던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에는 더 시끄럽고 활기찬 꼬맹이가 하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무얼 하고 살았더라.

내 직업은 뭐였지.

떠오르지 않아서,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뭘···”


방을 나왔다. 백화가 턱을 괴며 책을 읽고 있었다. 제목이 보이지 않아서 내용을 유추하기는 힘들었지만, 일상적인 회화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걸어보았다.


“무슨 책입니까?”

“영혼으로 발생한 열한 가지의 역사적 참상에 대하여.”

“유리아한테 읽어줄 만한 책은 아니군요.”

“읽어주려고 샀을 거라 생각했나?”


백화는 책을 덮었다. 곁에 있던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이고, 금방 저녁을 차려주겠다며 앞치마를 둘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유리아가 잠든 방에 들어갔다 돌아왔다.

방에서 나온 그녀의 손에는 검은 줄 같은 게 삐져나와있었다.


“오다 주웠다.”


짧게 툭 내뱉으며, 백화는 쥐고 있던 물건을 나에게로 던졌다.

나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그것을 붙잡았다.

안대였다.


“유리아가 무섭다더군, 가리고 다녀라.”


그녀의 말대로 오다 주운 것이라기에는 티 하나 묻지 않은 상태였다. 소재가 된 가죽과 천은 보는 눈이 없더라도 좋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게는 느껴지지 않고, 착용감도 좋았다. 묶는 순간, 피부와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거친 움직임에도 거치적거리지 않는 안정감.


“···잘 쓰겠습니다.”


마음에 무게가 늘었다.

닫힌 입술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떼어낼 수가 없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갈색 풍경에 카레가 올라왔다.

곧바로 스푼을 들었지만, 오늘따라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느렸다.

먹을 때는 먹을 것에 집중하라는 그녀의 싫지 않은 잔소리를 듣고서야, 복스럽게 먹어치웠다.

맛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맛있다는 감상이 생겨났다.

이곳을 떠나면 계속 그리워하지 않을까. 그런 염려마저 당연스럽게 들어버릴 정도로 인상에 남는 맛이다.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턱을 괴며 나를 바라보는 백화가 있었다.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에 담긴 그리움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는 회상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은, 하지만 돌아갈 수 없기에 하나의 추억으로 곱씹는 과거.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던 걸까. 활짝 펴놓은 책 한 권이 변명거리로만 보였다.


“저어···”

“알겠다.”


내가 말을 꺼내기보다, 그녀의 몸이 앞섰다.

백화가 앞의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곧바로 따라붙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배가 불러서요.”

“그런가. 그럼 디저트를 먹지. 낮에 케이크를 사왔다.”

“케이크도 좋기는 합니다만···”

“쇼콜라랑 딸기 생크림 중에 뭐를 좋아하지? 결정을 못하겠다면 둘 다도 괜찮다. 음료는 코코아면 되나? 커피는 내릴 수 있지만, 그다지 자신은 못하겠군.”

“아뇨, 그 전에 할 얘기가···”


백화는 손을 뿌리쳤다. 다정했던 표정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고, 차가운 목소리가 가슴을 얼렸다.


“듣기 싫다.”


입을 다물었다.

주방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윽고 백화가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케이크 두 조각과 코코아가 들려있었다.

케이크는 달았고, 코코아도 달았다.

디저트를 먹는 동안 백화는 침실로 들어갔다. 유리아와 대화를 나누다가 잠에 드는 그녀였다.

코코아의 밑바닥에 쌓인 설탕을 모조리 긁어먹은 다음, 빈 접시들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리아와 백화의 것까지 함께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와 핏자국이 짙은 외투를 걸쳤다.

거실을 한 차례 둘러보다, 높은 곳에 놓인 천 덩어리를 찾았다. 의자를 발판삼아 올라서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천을 들춰냈다. 빼앗아온 무기들이 쌓여있었다.

검을 차고, 창을 맨다. 단도들이 매달린 벨트를 두르고, 도끼를 품속에 넣는다. 그 외에도 석궁이라던가, 할버드라던가. 사용법을 알고 있는 무기들을 모조리 주렁주렁 온몸에 치장한다.

마지막으로 총 한 자루가 남았다. 총알과 화약 모두 없으니, 사용은 못하겠지만.

위력은 증명되어있다. 그리고, 그 위력을 모르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수두룩하다.

총알과 화약을 구할 수만 있다면, 내가 지닌 어떤 무기보다 치명적일 것이다.


‘낭비만 안 했어도···’


시체에 대고 전부 쏟아부었던 탄약이 아까웠다. 이성적이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후회는 언제나 하고 있기에, 생각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기들의 손잡이를 한 번씩 어루만졌다. 모든 무기를 부드럽게 뽑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침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나에게 감정을 드러냈던 걸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관련이 없어도 해보고 싶었던 질문들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럴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사사로운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내가 느끼기에, 사사로운 것으로 전락해버린다.

어쩔 수 없다. 감정들이 나의 것이기를 택했으니까.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데도 차오르는 거니까.

가소롭게 여겨도 나의 잘못이 아니다.


“떠나가는구나···”


백화의 혼잣말을 듣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문을 열고, 문을 닫았다.

가을의 찬바람이 머릿결을 차갑게 식히며 스쳐갔다.

렌을 만날 수만 있다면, 확신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었겠지만. 가설이 들어맞는다면, 렌을 만나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단테를 배신했을 거다. 종적을 감추고, 어딘가로 멀리 도망을 쳤겠지.

이 사건의 전말을 완전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각성의 탑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를 도서관에 데려가고 싶은 걸.』

『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적어내려가는 신의 역사서지. 너의 이야기도 그곳에 적히고 있을 거야.』


그곳에서 하레니아를 만나, ‘도서관’으로 갈 수만 있다면. 아루아의 위치, 사간회의 목적과 같은 정보들을 여과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루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겠지. 그렇다면,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만들어질 거다. 단테의 계획을 보다 철저하게 망쳐놓는게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건···’


최후에 도달하기 직전의 수단. 각성의 탑까지 가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위험은 늘 나의 목을 노리고 있지만, 각성의 탑까지 간다는 건 아루아를 구한다는 목적만을 놓고 보았을 때에 낭비가 많다.

예전에는 사건 자체를 해결함으로서 아루아가 안전해지도록 하려고 했지만, 관여된 인물들과 그들이 써놓은 시나리오의 양을 알고서 판단이 섰다.

해결 가능한 악몽이 아니다. 누군가가 죽어야지만 끝나는 이야기다.

나, 혹은 유리아, 아루아가 죽지 않는 한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 하나 죽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역이 된 이상은 해피엔딩으로 이끌겠다. 그러니, 결말에는 내가 아니더라도 내가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아루아는 살아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불행을 겪는 시간이 1초라도 적어야 한다. 그러니까,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구해야 한다.

아루아가 나를 어떻게 여길지는 몰라도, 지금이라면 그나마 자신할 수 있다. 해결은 못해도, 도망치는 건 가능하다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해결이 아닌 구출을 위해 움직인다.

불안정하지만 초석은 쌓아놨다. 얼마 전 습격했던 인류창고의 생존자에게 또다른 창고의 위치를 들어놨다.


『사일레르! 사일레르의 구스타프 상인연합 물류창고! 거기 말고는 나도 몰라! 진짜야! 믿어달라고!』


자세히는 몰라도 위치 정도는 알고 있다. 북서쪽 관문에 위치한 휴양지구 르셀에서 조금 떨어진 곳.

사람을 납치해서 경매장까지 운반한다는 목적을 생각하면, 부자연스럽지 않은 위치다.

문제라고 한다면, 거리가 상당하다는 것.

걸어서 하루이틀에 도착할 장소가 아니다. 마차를 구하던가 해야 하지만, 현상금수배서가 땅을 기어다니는 지금 정상적인 방법으로 구하기는 어렵겠지. 그렇다고 돈으로 매수할 수도 없다.

현재의 나는 말 그대로 무일푼. 무기를 팔아서 돈을 마련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전에 대장장이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 기겁하겠지.

범죄자의 신분이고, 거리의 순찰병들에게 지지 않는 전투력을 지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협박과 약탈이다.

주위를 둘러봤다. 마음은 먹었지만, 실행할 대상이 보이질 않았다.

밤이라는 시간에 마차는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도둑질이라도 하는 편이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길을 걷던 도중, 빠르게 다가오는 불빛이 보였다. 흔들림이 크지 않은 걸로 보아,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이 서있는 곳은 도로이고, 때문에 바로 알아챘다.


‘마차다.’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놓치면 다음이 언제일지 모른다. 체력이 남아도는 지금 붙잡아야 한다.

도로 위로 올라섰다. 달려오는 불빛을 향해 창을 뽑아 겨누었다.

마른 침이 몹시 따가웠다.

치이면 죽는다. 그러니, 그 전에 멈추어야 한다.

창을 겨눈 그대로 대거를 꺼내들었다. 말발굽 소리로 보건대, 쌍두마차. 말이 두 마리이고, 마부가 한 명이라 가정했을 때.

정면에서 살짝 빗겨난 위치. 칼끝으로 피가 쏠리는 감각. 하나의 실이 있고, 그 실이 목표까지 이어진다.

그 실을 끊어내듯, 손목을 휘두른다.


“으아아악!!”

“히히힝!”


마부가 소리쳤다. 불빛이 강하게 요동치며, 말의 그림자가 우뚝 섰다 내려앉았다.

긴장의 끈을 조였다.

석궁에 살을 매기고, 불빛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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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불사를 베어내는 검-3 21.05.31 52 0 10쪽
120 불사를 베어내는 검-2 21.05.08 64 0 11쪽
119 불사를 베어내는 검-1 21.05.06 49 0 11쪽
118 녹빛의 검은 백화(白花)를 피워낸다. 21.05.04 62 0 12쪽
117 재생 21.04.28 85 0 12쪽
116 이뤄주지 못할 소원 21.04.27 98 0 11쪽
115 정보상과 의사 21.04.25 74 0 17쪽
114 상실 21.04.24 62 0 9쪽
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63 0 11쪽
112 낙마 21.04.14 61 1 13쪽
111 구역질 21.04.12 79 0 11쪽
110 발자국 21.04.09 108 1 12쪽
109 발을 들이다 21.04.07 93 0 11쪽
108 아침에는 가재 21.04.03 103 1 11쪽
107 별들에게 호소하는 밤 21.03.27 73 1 13쪽
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71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76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80 1 11쪽
103 잭이라는 화제 21.03.19 80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67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5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1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5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79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72 0 13쪽
96 촉수 21.02.08 99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17 0 12쪽
94 탄로 21.02.06 7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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