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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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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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1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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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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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은 이유

DUMMY

마차가 드러났다.

그것을 이끄는 두 마리의 말은 마치 거대한 성채였다. 말들이 차고 있는 갑옷은 널린 금속으로는 흉내 내지 못할 독특한 광택을 띄고 있었고, 웅장한 산맥을 담아놓은 수려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있던 집사는 허리춤의 검을 빼들고, 곧장 내려 앞을 막아섰다.


“이 앞은,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냉정하고도 위협적이다. 동시에, 차분하기까지 했던 그의 자세와 어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버릴 정도로 살인적인 기세였다. 싸울 대상이 아닌, 이미 죽은 시체를 바라보는 눈빛.

그것이 허세임을 알 수 있었던 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이어지는 기나긴 신경전의 도중이었다.

그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은 거친 세월의 풍파가 남겨놓은 후유증도, 이름을 듣지 못한 병세의 영향도 아니었다.

두려운 대상을 앞에 두었지만, 물러나고 싶지 않은. 집사가 느끼는 감정이 뚜렷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 두려움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도 같이 깨달았다.

그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아닌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였기에, 그가 느끼는 감정들을 헤아릴 수 있었다.

마신전쟁에서 활약했던, 알려지지 못한 영웅. 영웅들의 서사시에 마침표를 찍었던, 한 명의 조연.

루드의 실력이 검에 깃들어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휘둘러서 죽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아도 그의 검술과 기운을 계승당하고 있다.

덕분에 여기까지 죽지 않고, 죽이는 자의 입장에 서있을 수 있었지만. 완벽한 구현은 의도하더라도 해낼 수가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를 팔과 손의 감각으로 알 수는 있어도 기술이라 부를 정도의 완성도는 내지 못하는 게 지금의 상태이다.

그의 얼굴에서는 설령 이곳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를 끌고 가겠다는 결사가 엿보이지만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할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말과 마차의 상태만 봐도 여간한 신분으로는 형용조차 되지 않을 인물이 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사의 주인은 아마 공작이나, 혹은 그 이상에 해당하는 인물. 그런 인물을 단신으로 호위하는 사람이 보통내기일 리가 없다.

검술을 배우고, 어느 정도 단련했을 뿐인 자가 아닌 남들에게 인정받고도 남을 재능과 노력을 쌓아왔으리라.

못 이기는 싸움이다.

역시 도망치는 게 옳은 판단이겠지. 허세를 부려서 역으로 위협하는 수단이 통할 상대인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도망치는 사람을 죽일 때까지 쫓아오는 상대 또한 아니다. 대충 적당히 둘러대고, 거리를 벌리면 갈 길을 가주지 않을까.

힘의 차이에 대한 오해가 역력하니까. 싸웠을 경우 죽는 것은 자신이라고, 그 또한 직감하고 있을 거다.


“경께서 소리를 지르다니, 여간한 일이 아니군. 얌전히 있어보려 했지만, 흥미가 돋았노라.”


신경전이 지속되던 와중, 누군가가 마차에서 내렸다.

중저음의 탁하고도 깊은, 소녀의 목소리. 그곳에서 내린 것은 비단으로 만든 특이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였다.

맑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등불의 빛에 찬란히 빛났지만, 머리칼의 빼어난 윤기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보다 화려하게 빛나던 물건을 목격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강철로 만들어진 왕관. 눈에 띄는 보석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보석 자체가 박혀있지 않다. 그것을 화려하게 만드는 건, 등불의 빛도 아니었다. 드워프라는 종족 말고는 흉내내지도 못할 아름다운 금속세공.

그것이 왕관을 장식한 모든 것이었다.


“전하, 위험합니다. 도망치시지요.”

“오호··· 2대 검성이라 불리기까지 했던 자네가 짐에게 도망을 권장할 정도로 위험한 자란 말인가?”

“이 노옹이 최대한 시간을 끌겠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남자의 검이 흔들림을 멈추었다. 발끝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숨결을 거두었다. 목이 떨어지고도 덤벼들겠다고, 그의 살기 담긴 시선이 넌지시 선고했다.

전신을 맴돌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검이 드리우기도 전에 심장이 죽음을 인지했다. 뇌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이 막히고, 포기한 손이 창을 떨어뜨렸다.

바로 그 때, 남자가 날아왔다.

아니, 나타났다.

내딛은 땅에서 부서진 파편들이 뒤늦게 솟아올랐다. 형태를 이룬 칼바람이 잔상을 남기며 남자의 뒤를 따라왔다.

땅에서부터 불쑥 솟아난 검이, 목을 베어냈다.

죽었다.

첫 번째로 생각한 그것은 착각이었다.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깨달음이었다.

살아있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곧 죽는다.

검은 여전히 다가온다.

두 번째 죽음이 눈에 비친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며, 변하지 않을 미래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거다.


《흘리고, 붙잡고, 퍼붓는다. 그것이 모든 무술의 기본.》


검은 여전히 빠르게, 죽이기 위한 일격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몸이 움직였다. 극한에 달한, 혹은 극한을 넘어선 경지의 반응속도가 몸을 짓눌렀다.

굽혀진 무릎. 머리 위로 지나갈 것만 같던 검날의 각도가 틀어진다. 우에서 좌로 휘두르던 횡베기가 회피를 목격함과 동시에 내려치는 동작으로 탈바꿈했다.

검날이 매서운 기세로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진다.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즈음에는 움직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움직인 오른손이 검의 옆면을 살포시 감쌌다.

가지런히 모은 손가락과 바닥이 맞닿자, 검이 부러졌다.

무릎을 피며 나아간 의수가 남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오른손의 끝이 남자의 복부를 찌른다. 가락의 마디들이 충격을 이용하여 부드럽게 접힌다. 주먹이 만들어지고, 주먹이 다시 한 번 똑같은 장소를 타격한다.

투명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잔잔한 연못의 물에 손을 담그는 감촉. 사람을 때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파쇄격(波碎擊).”


무언가를 말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제서야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회피동작의 의미를 깨달았다.

처음의 회피동작에서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파캉!


검의 파열음이 들려온 것은 남자가 소녀의 앞으로 물러선 뒤였다.

소녀의 호흡이 들숨에서 날숨으로 바뀌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의아했다.

이러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번 놀랍다.

하지만, 지금은 그 놀라움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빌려온 힘을 자신의 것인 양 허세를 부려야만 한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몇 번인가 반복했다. 움직이는 것에 지장은 없었다.

바위를 부서뜨릴 것만 같은 기술을 사용하고도 반동 하나 없다니.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두어 번 기침을 하고서는 부러진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기술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걸까. 의심했으나, 정통으로 들어가는 감촉을 손끝이 기억하고 있다.

아무래도 위력이 낮은 기술이었나. 이 또한 의심했으나, 예비동작만으로 검을 부서뜨릴 파괴력을 지닌 공격의 위력이 낮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맞고서도 반응이 없는 건 상대의 강함 때문이고, 기술의 반동이 없는 것은 신체의 부담을 고려한 특유의 움직임 때문인가.

아무래도 좋다.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음이 오지 않도록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한다. 말을 꺼내서, 이 상황을 끝내야만 한다.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싸울 생각도 그렇고요.”

“예, 방금 잘 알았습니다. 이 노옹이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군요. 대단히 면구하옵니다.”


그가 자신의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살포시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해칠 생각이 아니라, 함은 어찌하여 짐의 마차를 멈춰 세운 것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소녀가 집사의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소녀, 라고는 해도 드워프의 왕임이 확실했다. 그녀가 쓴 왕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 대화를 나눠도 괜찮을 인물이 아니다. 이 상황 자체가 분에 넘치고, 황공해하며, 송구스러워야 하는 상황.

그래서인지 심장이 터질듯 요동쳤다. 심장을 감싼 살점이 없었다면, 지금쯤 진즉에 터져있었겠지.

온몸이 긴장으로 후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빳빳하게 근육들이 굳어졌다.

노인은 그런 나의 변화를 알아봤는지, 뒤에서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차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악한 마음을 품고 협박하려 했습니다.”

“그대 정도 되는 인간이? 사정이 있어서 그렇다는 건 듣지 않아도 알겠지마는, 그 사정이 좀처럼 가늠되질 않는구나.”


소녀가 다가왔다. 걸음걸이 하나조차 오차가 없었다. 자신이 향할 곳을 정하고, 그곳을 향해 몇 걸음을 어느 정도의 거리로 내딛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를 고려하고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티 없이 자연스러운 완벽한 발걸음.

왕의 기품이 눈앞까지 걸어오자, 무릎이 절로 굽혀졌다. 이성으로 숙여지는 허리를 들추고, 반쯤 굽혀지던 무릎이 무색하지 않도록 쿡쿡 신발 끝을 바닥에 찧었다.


“방금 건?”

“신발이 조금 불편해서···”

“그렇구나. 잘 아는 구두 장인을 소개해줄 수도 있다마는, 어떤가?”

“괜찮습니다. 무례를 저지른 몸이니, 무언가를 바랄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말을 끝내며, 돌이키지 못할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사무치게 깨달았다.

바랄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됐다. 애시당체 협박을 해서 마차를 빼앗을 심산이었다고 해놓고, 바랄 마음은 없다니.


“모순이구나.”


소녀가 말했다.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왕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 나라의 왕. 나라의 모든 것을 가진 이에게 바라는 게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웃어 보일 수 있었던 건, 뒤에 선 남자의 오해가 나에게 우위를 쥐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데려온 유일한 호위보다 강한 자에게 공공연히 적의와 분노를 드러낼 수는 없을 테니까.


“저는 그저, 마차를 얻어 타는 걸로 족하니까요.”

“흐음···”


소녀는 검지로 턱을 받치며 무언가를 고심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마쳤는지, “만져도 되겠는가?”하고 물어왔다. 딱히 해가 될 행동은 당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괜찮다고 답해주었다.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나의 손을 잡아챘고, 그대로 마차를 향해 질질 끌고 나아갔다.


“좋다, 그대의 염원을 들어주도록 하마. 협박을 생각 할 정도니, 어지간히 타고 싶었나보지? 마침, 이야기 상대가 필요했는데 잘 됐구나.”


작가의말

 한동안 슬럼프였습니다만, 조금 빠져나온 느낌이 듭니다.

 이대로 탈출! 하면 좋겠지만... 쉽지는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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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녹빛의 검은 백화(白花)를 피워낸다. 21.05.04 62 0 12쪽
117 재생 21.04.28 8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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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정보상과 의사 21.04.25 74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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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63 0 11쪽
112 낙마 21.04.14 6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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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5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1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5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79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72 0 13쪽
96 촉수 21.02.08 99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17 0 12쪽
94 탄로 21.02.06 7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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