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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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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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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1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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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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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DUMMY

그것은 사랑이 아닌 상냥함일 것이다. 잃고 싶지 않다는 고집. 무언가를 지켜낼 수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리시스는 하렐을 구해주었다. 하렐은 리시스의 ‘지키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그 사실만으로 기쁘고도 행복해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지켜줘서 고마워요···”


손끝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감정은 행복. 무척이나 희박하고, 때문에 소중한 삶의 찬란함.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은 사라졌고, 꿈이라고 부르지 못할 바람은 기억에만 남아있다. 그러니, 이제 미소는 남아있지 않다. 전해야 하는 말과 해야만 하는 일을 기억하고, 그저 움직일 뿐이었다.


“당신 덕분에,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이 생겼어요.”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귓등으로 넘겼다.

그 자세로 오랫동안 바라봤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자상이 보였다. 손을 가져가, 미미한 기적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하렐의 입꼬리는 아직까지도 살짝 올라가있었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이었으리라 추측하고는, 감정이 남아있을 적의 작은 심술을 이행했다.


“이제 여한은 없으려나요···”




...


의식이 돌아왔다. 반사적으로 열린 눈동자가 주위를 살폈다.

깊게 내려앉은 칠흑의 밤.

그 속에서 푸른색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렐···?”


이름을 불러도 답은 없다. 포근한 촉감도, 따스한 손길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사라졌다.

깨닫고는 서성였다. 완치된 몸으로 한껏 체력을 낭비했다. 발치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달렸다. 그녀가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웠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 상처는 사라졌다. 피로도 가셨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다리가 떨렸다.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꿈속을 거니는 감각. 실체 없는 물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다. 상실감이 심장에 들어찼다. 혈류를 타고, 온몸으로 뻗어나갔다.


“하렐···!”


어째서 이토록 찾아 헤매는가.

문득 의문이 들었을 때에는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던 걸까.

나의 앞에서 사라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릎이 접혔다.

거대한 손자국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다.


‘설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아니야···’


그럼에도 결국 부정했다.

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광경을 목격했다. 무척이나 빠르고, 위력적이었다. 한 번의 일격으로 수십 마리를 구제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베어져나가는 푸른 불꽃과 그녀의 잔상뿐이었다.

엄청나게 강했다.

그런 그녀가 살해당했으리라고는, 잡아먹혔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무리 마물이라고는 해도 그건 도가 지나치다.


“후우···”


심호흡을 거듭했다. 지금의 내게 가능한 최선을 모색했다. 최악에 대비할 방도를 떠올렸다. 이곳에 남아봤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리를 움직였다. 남은 무기는 없었다. 의수는 고장 났고, 의지할 것이라고는 옷가지조차 두르지 못한 오른손 하나. 한 뼘 앞의 어둠조차 내다보지 못하는 시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호흡을 바꾸었다. 느슨하게, 그리고 답답하게. 몸을 살며시 숙이고, 무릎을 약간 접었다. 몸의 가장자리가 빳빳하게 곤두서는 감각.

의식이 점차 가라앉는다. 발끝으로 흘러내려가, 지면과 맞닿는다. 그곳에서부터 퍼져나간다. 뿌리를 내리고, 진동을 감지한다.


‘무언가 있어···’


자그마한 떨림이 느껴졌다.

제법 떨어진 곳. 멈춰있다. 호흡은 아직까지 느껴지지 않는다. 기척은 있으나, 구분을 지을 수는 없다. 마물일지도 모르고,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렐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다.

그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빛이 없는 장소. 어떠한 형상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너무 짙었다.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하렐일지도 모르는 기척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설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무시하고 돌아설 것인가.

무기는 남아있지 않다. 할버드는 부러졌고, 검은 부서졌다. 대거는 진즉에 소진됐고, 도끼도 창도 버려졌다.

저곳에 존재하는 기척이 하렐이 아닌 마물이라면.

하지만, 그 반대로 하렐이라면.

망설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어떠한 선택지도 고르지 않았다. 두 가지를 섞었고, 애매한 용기를 내어 그곳으로 다가갔다. 도망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목소리가 닿도록 입을 열었다.


“하렐, 맞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앞꿈치를 따라 작은 진동이 전해졌다. 뇌리에 둥그스럼한 형태의 발자국이 그려졌다. 그 순간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들켰다는 사실을 인지한 무언가가 뒤쫓아왔다. 멀어지기는커녕 점차 가까워졌다. 소리가 커져갈수록 심장이 옥죄였다.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대로는 따라잡힌다.

나무 한 그루를 기점으로 선회했다. 그러고는 소리에 집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줄어들지 않은 소리의 크기. 선회의 반경이 작다. 이 방법으로도 도망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의 선회. 동시에 몸을 날렸다. 제법 먼 거리를 날아가 구른 다음, 밀착했다. 그림자 숲의 나무는 굵기가 상당하다. 사람 하나가 몸을 숨기더라도 여유로울 정도의 둘레를 지니고 있다. 등을 붙이고, 무언가가 다가오는 속도에 맞추어 이동한다면 따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밖의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성공이 희박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말들의 발굽자국을 보고 쫓아오는 지능을 지니고 있다. 분명 어젯밤 나와 하렐을 지켜보았던 그 녀석일 것이다.

싸운다는 선택지는 최후까지 보류다. 생김새도 모르는 마물을 상대로 이토록 짙은 어둠 속에서 싸울 수는 없다.


“스읍···!”


숨을 죽였다. 시끄럽게 다가오던 진동이 잦아들었다. 잠잠하게 다가왔다. 손가락들이 땅을 구르며 그것의 몸을 앞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을 발끝의 감각으로 간신히 포착했다. 앞으로 대략 5미터. 식은땀이 온몸을 차갑게 식혔다.


‘지나가라···!’


문득 진동이 멈추었다. 아직 거리는 충분히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은 멈추었단 말인가.

의문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눈이라고 알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그것은 가락을 잃은 손바닥이었다. 세로로 찢어진 틈 속에 알처럼 무수한 눈알들이 분포하고 있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얼굴’이었다.


“···!”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가 나의 몸을 붙잡았다. 손을 써보기도 전에 악력이 가해졌다.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팔들이 부러졌다. 내장을 쥐어짜였다. 눈알이 터질듯 부풀었다.


“우우욱···?!”


의수가 부서졌다. 부서진 파편들이 날카롭게 옆구리를 파고들어왔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버티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무력했다.

이제는 하렐도 없다. 이대로 터져 죽을 것이다.

몸이 치솟았다. 목이 꺾일듯한 속도로 치켜들어졌다.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

내동댕이쳐졌다.


“커억···?!”


등줄기가 터져나갔다. 뜨거운 선혈이 순식간에 흙바닥을 적셨다. 겪어보지 못한 격통.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안에서부터 살점들을 긁어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즉사하지 않은 게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음에도 죽는다.

겨우 살아남았는데 곧바로 이 꼬라지다.

하렐에게 구해진 목숨이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꺼져가고 있다.

몇 번째로 느끼는 허무일까.

발버둥 친다.

턱이라도 움직여서 도망간다.

나를 바라보는 그것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참을성이 다했는지, 손으로 발목을 분지르며 끌고 왔다.


“아아, 아아아아악···!”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각도로 무릎이 꺾였다. 허벅지가 찢어지며 돌아갔다. 뜯어져나간 혈관들로부터 대량의 피가 솟구쳤다.

뒤집혀진 몸. 고개가 돌아갔다. 이번에는 그것의 입이 보였다. 그 입은 나무의 줄기와도 같은 몸통에 붙어있었다. 세로로 벌어지는 입술의 내부에는 커다란 가시들이 드문드문 박혀있었다. 꺼림칙한 액체가 흥건했고,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인간의 것이었다.

이어서 입속의 이질적인 물체가 보였다. 기다란 실과 같은 것이 무더기로 이빨에 뭉쳐있었다.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그 색은 무척이나 눈에 익은 색이었다.

몇 번이고 봐서 익숙해진 색채. 어둡고, 젖어서 잘 보이지 않으나 확실했다. 그것은 푸른색이었다. 틀림없는 푸른색. 그리고 남자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길었다.


“아···”


실성을 토해냈다.

더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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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16 0 11쪽
112 낙마 21.04.14 18 1 13쪽
111 구역질 21.04.12 27 0 11쪽
110 발자국 21.04.09 61 1 12쪽
109 발을 들이다 21.04.07 45 0 11쪽
108 아침에는 가재 21.04.03 56 1 11쪽
107 별들에게 호소하는 밤 21.03.27 30 1 13쪽
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27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25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29 1 11쪽
103 잭이라는 화제 21.03.19 31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29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26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23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20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39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29 0 13쪽
96 촉수 21.02.08 37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38 0 12쪽
94 탄로 21.02.06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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