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3,983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1.01.07 15:05
조회
44
추천
2
글자
11쪽

침식

DUMMY

잭은 병째로 들이키던 포도주를 내려놓았다. 한 뼘이 넘는 높이의 양을 단숨에 들이켰는데도 취한 낌새가 보이질 않았다.

그 뒤에야 열린 그의 입에서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왔다.


“종교는 좋아하나?”


뜬금없이 튀어나온 종교라는 주제에 의문을 품었다.

갑자기 종교 이야기라니. 말을 돌리고 싶은 걸까.

아니, 그게 아닐 거다.

세상을 구한다는 것과 연관성이 있는 거겠지. 콩 심은 곳에서 당근이 자라난 기분이지만, 간단명료한 질문에 긴 정적을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라 먼저 답부터 했다.


“딱히 별 생각 없습니다. 신이 있는 세상이라고 해서, 신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건 아니니까요. 사람을 낳는 것은 어머니의 업이고, 사람을 먹이는 것은 농부의 일이죠. 아무리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결국 인간이 기대야할 곳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신에게 시간을 바칠 바에는 차라리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를 소중하게 여기라는 게, 제 별 없는 생각입니다.”

“별 없는 생각치곤 대단하군.”


제멋대로 감탄하는 잭을 놔두고 잔을 비웠다. 느끼한 기름기에 축축해진 혓바닥이 포도주를 더 원했지만 참기로 했다.

무진장 예쁜 여성이었다면 모를까. 목소리로도 사십 대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사내와 간접적으로라도 타액을 섞고 싶지는 않으니까.

생각의 흐름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종교 얘기는 갑자기 왜 나온 겁니까? 제가 마도사단 같은 귀족 양반들도 아닌데, 종교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딨다고.”


설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라는 주제가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게 세상을 구한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면, 그리고 마도사단이나 사간회의 분쟁에 관여하고 있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늘을 섞어놓았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다. 가치또한 그만큼 충분하다.

어째서 마신전쟁으로부터 500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마신을 노리는 것인가. 마도사단, 그리고 사간회는 어떻게 마신이라는 존재를 알 수 있었던 것인가.

그 밖에도 잭의 대답에 따라 여러 의문들이 해명되겠지.

의문이 해명되면 남는 것은 해결이다. 사방을 가린 어둠속에서 결승선을 찾은 것과 마찬가지. 앞으로는 필사적으로 달려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다.

하지만, 그건 말에 섞어놓은 바늘이 잭의 손가락을 찔렀을 때의 경우겠지. 찌르지 못한다면, 어느 것도 해명되지 않는다. 도리어 의심을 사고, 나라는 인간의 가치가 잭의 안중에서 벗어날 위험성도 있겠지.

과연 곤란한 상황으로 치닫을까. 그게 아니라면, 아루아를 둘러싼 절망에 하나의 돌파구를 만들어줄까.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 궁금했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잭의 눈을 응시하지 않고, 주섬주섬 음식을 삼켰다. 고무를 삼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잭이 자아내는 정적이 내가 한 말들을 헤집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속이 타들어갔다. 새까맣던 것들이 새하얗게 변해갈 즈음이었다.

코트의 안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잭의 손이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얇게 편 밀가루 반죽 같은 모습이었다. 그곳에 그려진 그림이 보이는 순간,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의 피부가죽이었다. 그 자체를 보는 것으로는 구토감을 유발하지 않았으나, 죽은 사람의 피부를 벗겨냈다는 사실이 혐오감을 키워냈다.

비틀어 떨어진 목젖이 뱃속으로 굴러들어갔다. 아래에서부터 기어오르는 것들을 차갑게 식은 음식을 쑤셔넣으며 가라앉혔다.

깊은 한숨으로 가장한 심호흡을 내뱉었다. 얼굴의 근육들을 느슨하게 풀었다.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진정해나갔다.

피부에 새겨진 문양을 바라봤다. 커다란 눈이 있고, 눈썹처럼 생긴 아홉 개의 검. 여덟 개는 위에, 그리고 여덟에 포함되지 못한 아홉 번째는 아래에 그려져 있었다. 종교 단체의 문양이라기엔 기괴한 문신이었다.


“그건···”


높아지지 않는 어조로 담담하게 끌었다.

사람이란, 기대하는 만큼 오해를 하는 생물이다. 잠자코 있으면 나에게 기대 중인 잭이 알아서 말해주리라.


“알다시피 마신교의 문신이야. 신자들은 하나같이 이 문신을 새기고 다니지. 예외는 없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당한 충격에 얻어맞은 탓인지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잭은 예상대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마도사단과 사간회조차 감당해내지 못할 마당에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라니.


‘아니, 그게 아니야.’


마도사단이란 단어를 넣은 문장의 뒤로 마신교란 정보가 새로이 등장한 것이니, 마도사단이 마신교의 일부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지.

침착하게 파악하자. 막막한 앞길을 한탄하는 것은 후에라도 늦지 않는다.

조용히 음식을 삼키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침만을 삼켰다면 동요하고 있음을 들통 났겠지. 테이블에 먹을거리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겠다.

잭은 “아아, 맞다.”하고 틈새를 메우며 나의 말을 빼앗아갔다.


“그거 아나? 얼마 전에 들어온 고급 정보인데 말이야.”

“뭡니까?”

“마도사단 단장은 허브쿠키를 좋아한다더군.”


나는 그 정보가 고급 정보라는 것을 묵인했다. 본래 정보라는 것의 대부분은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유치하고 시시한 미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적절한 인물과 사연에 얽히면 폭발을 일으키는 거다.


“그리고, 그 단장은 자신의 욕탕에 누구도 들이지 않는다고 하더군.”


지금이 아니었다면, 마도사단의 단장이 혼자 목욕을 한다는 정보는 시시하게 받아들여졌겠지. 하지만, 마신교의 문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지금의 정황에서 공개된 그것은 결코 시시하지 않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하하, 나도 좀 대단하지?”


잭이 두 팔을 활짝 피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걸 스스로가 말합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말해주는데?”

“그건 그렇군요.”


간단히 납득해버리며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마도사단의 단장이 마신교의 신자로서 마신을 부활시키려 하는 것이라면, 부단장인 실리아와 사레이스는 그를 저지하려 한다는 게 된다.


'그건 말도 안 돼.'


마신의 부활을 막겠다는 정의의 사도들이 한낮 평민을 무참하게 학살할 리가 없으니까.

단테의 손에 의해 각성의 탑으로 날아가, 하레니아의 가호를 받은 뒤. 하룻밤을 묵기로 한 마을의 사람들은 이방인인 나에게 맛좋은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주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쓰레기라 부르며 날파리 때려잡듯 죽여버린 사레이스를 쉽사리 용서할 수가 있을까. 우스꽝스런 말투로 농락하며 나의 목에 얼음조각을 쑤셔넣을 때, 그가 머금고 있던 조소가 아직도 아른거린다.

그렇게 죽고 살아난 숲속이 불길에 휩싸여 부서져가는 광경도, 그 숲의 일부가 되어 함께 타 죽어버렸던 고통도 생생하다. 거대한 나무에 깔려 버둥거리며 뇌가 익어 죽는 감각은 지금도 악몽의 소재가 되곤 한다.

그리고, 사르티아에 돌아왔을 때. 구해냈다고 생각했던 남자아이가 처참하게 살해당해 내게 걸린 현상금이 되었을 때.

얼마나 그들을 증오했던가.


‘받아들일 수 없어.’


분명,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속내가 있을 거다.


“이봐, 괜찮나?”


잭이 물었다.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물어본 것인지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땡그랑!


머지않아 떨어진 포크가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것을 주우려는 손이 극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 손을 맞잡아서 멈춰보려 해도, 떨림은 그치지 않았다.

그 전에 변명이다. 무언가 늘어놓아야 한다.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추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아, 괜찮습니다. 가끔씩 이러더군요. 업보라고 하면 업보겠죠. 이것도.”

“그런 녀석들 많이 보긴 했지. 이쪽에서 일하다 보면 흔한 일이야. 거기서 신념을 가지면 미친놈이 되는 거지.”

“감사한 충고군요.”


잭은 피부가죽과 꺼내놓았던 버터플라이나이프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테이블 위로 1실버를 올려두고, 남은 포도주를 몽땅 들이키며 일어섰다.


“가시는 겁니까?”

“오늘은 즐거웠어. 다음에 또 보자고.”

“저도 나름 즐거웠습니다. 다음을 기약하죠.”


잭이 건넨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내 곁을 지나가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딱히 의미는 없는듯했다.

홀로 남은 테이블에서 머뭇거렸다.

손이 떨렸다. 떨리고, 떨렸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대거를 쥐어보았다.

잦아들지를 않는다. 흔들리는 두 손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일그러뜨린다. 어그러져간다.

그만, 그만, 그만.

내 손인데.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진정시킬 수 없다.

심호흡을 했다. 헛수고였다. 효과라곤 없었다. 흔들린다. 흔들린다. 흔들린다. 흔들린다.


《목이 잘린 사슴. 거꾸로 매달린 피에로. 칼에 찔린 칼날. 찢어진 인형. 피에 젖은 목도리. 손가락 스튜. 화살의 눈알. 다리없는 남자와 팔없는 여자. 두개골에 꽂힌 한 권의 책. 머리를 쏘는 대포.》


흔들린다. 흔들린다. 흔들린다. 흔들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까만색에 붉은색이 더해졌다. 살색에 붉은색이 더해졌다. 은색에 붉은색이 더해졌다. 어디를 바라봐도 붉은색. 붉은색이 좋다. 붉은색을 원한다. 좋아하는 것들을 붉은색으로 칠하고 싶다.


“아루아도, 붉은색으로···”


말하고 나서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팔을 깨물어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피의 맛이 진득하게 혓바닥에 달라붙었다.

욕조에 들어간 것처럼 온몸이 뜨겁고 따듯했다. 피부에 달라붙어 일부가 되어가는듯한 감촉. 도저히 혐오스럽다는 인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늘의 달을 바라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 어어···!”


그곳에는 시체가 있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선혈도 있었다. 거기까지는 이성을 유지한 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나의 모습은.

제정신인 채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고 부정했다.

손에서 쥔 대거가 주르륵 흘러내려 떨어졌다. 질퍽한 소리가 났다. 대거가 끄집어낸 내장들이 식어가고 있었다.

나의 손이 시체의 안에 들어있었다. 하나는 텅 비어버린 복부의 안을 휘젓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찢어놓은 목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아니야···!”


철퍽. 그런 소리가 났다. 던지듯 밀쳐낸 시체가 자신의 내장을 뒹굴었다.

눈을 감았다. 얼굴을 감쌌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몸을 움츠렸다. 홀로 숨바꼭질을 했다.

나에게서 숨기 위해 나를 감추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49 냥ㅋㅋ
    작성일
    21.01.07 18:21
    No. 1

    확실히 주인공이 그 곶통을 받으면서 멀쩡하게 정신을 유지하긴 힘들었을듯 합니다

    찬성: 1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3 흥미로운 가설 21.02.05 40 1 13쪽
92 마주치는 운명 21.02.03 66 2 11쪽
91 무릎을 꿇은 이유 21.02.01 61 1 11쪽
90 미련 21.01.31 36 1 11쪽
89 렌은 주역을 바꿨다. 21.01.30 35 1 15쪽
88 변심 21.01.27 41 1 13쪽
87 막간- 백화라는 소녀 21.01.27 45 1 13쪽
86 21.01.26 50 0 11쪽
85 웃음 21.01.24 48 0 12쪽
84 피살자의 행방 21.01.23 70 1 13쪽
83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 21.01.21 35 0 11쪽
82 없앨 수 없는 것 21.01.20 50 2 11쪽
81 카레 +1 21.01.20 43 1 11쪽
80 언젠가 깨어나는 것이라 알고 있었지만 +1 21.01.12 62 2 13쪽
79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1 21.01.09 37 2 12쪽
» 침식 +1 21.01.07 45 2 11쪽
77 저녁식사 +1 21.01.05 54 2 11쪽
76 시험 21.01.04 34 1 11쪽
75 마약 구매 21.01.03 31 0 12쪽
74 지켜내고 싶어서 21.01.01 35 1 11쪽
73 스승에 가까운 존재 +1 20.12.31 94 1 12쪽
72 중의적 세계 +1 20.12.30 39 1 12쪽
71 지키고 싶지 않은 20.12.29 43 1 12쪽
70 영웅에게 죄책감이란 20.12.28 36 2 11쪽
69 도적과 싸운다는 것 20.12.25 48 1 12쪽
68 양면성 +1 20.12.23 37 2 12쪽
67 이 하루가 지나가지 않도록 +1 20.12.19 45 2 12쪽
66 추락 20.12.18 37 1 11쪽
65 결국에는 +1 20.12.15 40 2 12쪽
64 누그러뜨리는 소녀 +2 20.12.13 50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