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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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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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1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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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3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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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DUMMY

입을 열었다. 되도록 감정에 운운하지 않으려 했으나, 아예 이입하지 않는다는 건 어려웠다.

거추장스런 표현 하나 덧붙일 필요도 없이,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였다. 허술한 부분은 있었어도, 과장은 하지 않았다.


“음, 그런가. 저번과 다를 바가 없군.”

“저번에 다 얘기했으니까요. 뭘 기대하신 겁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는 거.

이외에는, 글쎄다. 스스로는 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익숙했다.

익숙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익숙해지는 현상은 분명 두렵다.

사람이라고 불릴만한 양심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일들이 벌어지고, 헤쳐나갈수록 적응해나가며 두려움마저 잊어버리는 것.

하지만 이는 그와 달리, 익숙해진다고 해서 후회하지 못하게 나를 바꿔버리는 행위가 아니었기에.

싫지만은 않은 익숙함이었다.


“충분하다. 그나마 저번보다는 진정성 있군.”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질 않는 말이었다.

길게 끄는 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대충 흘려들었다. 상대가 저번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걸고넘어질 이유가 없으니까.

시간이 중요한 지금, 내가 납득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아루아를 구해낼 것이냐. 오로지 그것뿐.


‘이 생각만 몇 번째인지···’


머리를 털었다. 절레절레 저어서 털었다. 그럼에도 내가 지닌 나의 정체성을 떠나보낼 방법은 없었다.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면서, 아루아를 구해내겠다는 일념은 나라는 사람을 바로세울 위태로운 등받이이다.

이것도 또 반복 중인 건가. 질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정작 아루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경매장에 쳐들어가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가능성이라고는···”

“사간회를 두려워하지 않고, 잘 아는 정보상에게서 정보를 사는 거겠지. 예상해두었다. 내일 아침이면 저절로 해결된다.”

“무슨 수로 말입니까?”

“렌은 범죄자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아, 네···”


이번에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튀어나왔지만, 어지러운 정보들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그의 말투에는 다소 적응이 되어가는 참이라 적당한 반응이 곧잘 튀어나왔다.


“그래, 이제 본제로 넘어가지.”

“뭡니까?”


엘무리아스가 걸터앉은 창가에서 하늘거리는 커튼의 끝자락을 붙잡으며 대화를 지속했다.


“아루아에 대해서. 그녀가 왜 아렐리아를 벗어나 혼자 숲에 살고 있었는지, 알고 싶지 않나?”

“거절하겠습니다.”


한순간의 호기심을 단호하게 치워버렸다.


“의외로군. 어째서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그녀의 입이 아닌 사람의 입에서 듣는다는 건, 썩 좋은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지금 당장 필요한 사연이 아니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그녀를 알고 싶지 않다. 괴로운 희생 끝에 보상받지 못하고 원망 받으며, 쫓겨나야 한다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싶다. 저질러온 일들을 되돌아보면, 더 아파야겠지만.

더한 아픔을 견뎌내고 속죄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이거면 돼.’


납득했다고 생각할 여지조차 생겨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가. 그럼 돌아가라. 내일 아침이면,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거다.”

“마법은 알려주시지 않는 겁니까? 저번에 배우라면서요.”

“보류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그렇습니까.”하고 납득을 표현했다. 체념하는 일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쉬워빠진 일이었다.

아이크 테르시의 검집을 허리에 찼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감쌌다.


“헌데, 계집은 어디 갔지?”


답지 않은 질문이 귓등으로 들려왔다.


-철그럭


과하게 힘이 들어간 문고리가 금속음을 울리며 돌아갔다.

문을 열자, 한산한 복도가 나왔다.

따스한 노을빛의 램프들이 늘어서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한산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가뜩이나 있어야했을 사람이 없다면, 그 정도는 가혹해진다.


“···죽었습니다.”


여관의 로비로 나오자, 정신을 차린 레이든이 손에 들린 접시를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 든 스프는 맛있어보였다. 그의 오른손에 젖은 수건과 함께 쥐여진 스푼에는 티끌하나 보이지 않았다.


“먹어두는 편이 좋아.”


어디까지나 충고만 해두었다. 강요하지는 않았다. 레이든에게는 홀로 일어설 힘마저 없다. 손에 든 접시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만으로 감지덕지다.

때문에, 혼자서는 세실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

부축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은 레이든의 악감정들을 다시 세차게 휘저었고, 젖은 수건의 물기를 악력으로 짜내도록. 스프를 삼키도록 만들었다.


‘그래, 그거면 돼···’


저 악감정들을 이용해먹은 나에게로, 언젠가 분출해내면 된다.


“돌아가자, 부축해줄게.”


레이든의 팔을 어깨에 걸쳤다.

사람 하나를 지탱한다는 중압감. 나의 마음은 갈수록, 보다 무거워져간다.

그러니 이곳에 도착했을 때보다도 비틀거리게 되는 건 지당하기 그지없다.

하나, 둘. 투덜거리지 않기 위해 하나와 둘을 무한히 반복했다.

흘러내렸다가 말랐다가 다시 흘러내리는 땀으로 범벅이 된 온몸이 끈적거린다.

숫자세기마저 잊고 헐떡인지 잠시 뒤에야 머물던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에서는 허브와 달콤한 과일을 섞어만든듯한 진한 향이 퍼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체의 썩은 내를 완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역겹기까지는 않으나, 역시 불쾌한 향이다.


“아아, 세실···! 기다렸지···?”


공허가 누그러들어가는 그의 눈동자에는 내게는 볼 수 없는 환상을 바라보는 힘이 깃들어있었다. 애써 자신을 속이던 레이든은 미쳐있었다. 이성적 판단을 하는 척을 할 정도로 미쳐있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남의 심정을 섣불리 헤아리려 들지 않는 내가 감상을 품을 정도였다.

그런 레이든을 세실의 곁에 풀어주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끼익거리는 문의 이음새가 요란했다.

늦어도 내일은 화장을 시켜줘야 한다. 빠르면 이틀만에 언데드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모양이다.

레이든에게 세실의 화장을 맡겨둔다면, 엘무리아스와 협력하여 아루아를 구해낼 시간을 확보해낼 수 있다.

그다지 현실적인 방안은 아니다. 현재 레이든의 상태로만 봐서는 그가 세실을 무사히 화장시켜줄지가 의문이다. 괜한 희망을 품지는 않을까.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변수. 슬롯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엘무리아스에게 물어봐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야기를 빠르게 종결 내는 것에 중점을 두지 말았어야 하나.

만약의 상황을 끝까지 가정해내지 못했다.


“후우···”


얼룩이 말끔히 지워지지 않은 이불 위로 넘어졌다.

덜 마른 땀송이들이 이불을 축축하게 적셨다.

지친 몸은 생각에 잠길 새라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쿵!

-쿵!


벽이 울렸다. 묵직한 물체가 거세게 부딪히고, 그것과 연결된 모서리가 빠르게 두드렸다. 사람의 몸과 벽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였다.

새벽에도 다다르지 못한 깊은 밤이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시체보다 깊은 수면에 빠져든 몸이 눈꺼풀을 열었다.

레이든의 방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의문이 드는 순간 일어나 뛰쳐나갔다.

문을 열고, 연다. 레이든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손에는 자동적으로 녹슨 검, 아이크 테르시가 쥐여져있었다.

검을 겨누고,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세실의 썩은 피가 묻어난 침대였다. 그곳에는 흔적만이 남아있었고, 있어야할 껍데기는 어디론가 자리를 비워놓았다.


“크아아악! 아아아, 아아악!”

“세실, 나야, 나라고···!”


살기밖에 담아내지 못한 목소리, 갈라져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잠들어있어야 할 시체가 쇠약해진 레이든을 덮치고 있었다.


“···.”


나만이 조용했다. 침착하고, 냉정했다.

손에 들린 것은 베어내지 못할 검이나.

알고 있다.

이런 꼬락서니라도 살상력만큼은 충분하다는 걸.

천천히 다가간다. 한 걸음. 두 걸음.

세실의 손톱이 레이든의 팔뚝을 파고들며 출혈을 일으킨다. 그녀를 껴안으려 드는 남자는 손을 뻗지만, 엉뚱한 허공밖에 잡아내질 못한다.

한때는 세실이라 불렸던 시체가 퍼덕이며, 헐떡이는 자를 죽여가고 있다.

물어뜯으려 드는 시체의 이빨이 딱딱 부딪힌다. 썩어 들어가지 않은 발성기관이 살기를 뿜어낸다.

의지가 들어있지 않은 행동,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소리가 의미없는 살인만을 추구한다.

검을 치켜들었다. 높이, 더 높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떠나갈 수 있도록.

언데드라는 마물이 있다. 사람이 죽고, 화장하지 않고 양지바른 곳에 묻히지 못했을 경우에 발생하는 일종의 현상. 학계에서는 여러 설들이 떠돌아다니지만, 현재로서는 육신을 떠나가는 영혼이 온갖 악념들을 떨치고 근원으로 돌아가며 생기는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게 뭐···?’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지식이라곤 하나도 갖추지 못한 쓸데기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

화형인이라는 직업이 있다. 언데드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특이한 용병들이다.

이 또한 쓸모가 없다. 그들은 이곳에 있지 않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언제나 나 하나다.

누구도, 무엇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단테도 그렇다. 약속까지 해놓고, 행방불명이다.


‘뭐가 영웅이냐···’


믿는 것도 지쳤다. 기대는 것도 지쳤다.

차라리 나 혼자 해결한다고 생각했다면, 아루아를 보다 빠르게 구해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과도하게 힘을 넣어서인지, 검끝이 떨렸다.

아아, 이래서는 안 된다.


“스읍···!”


숨을 들이쉬자, 놀랍지도 않게 진정되었다.

떨리지 않는 검을 내려쳤다.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


-퍽!


둔탁한 울림이 검을 타고 전해졌다.

낯선 기분이 들었다.

생명을 끊을 때에만 들렸던 소리가, 느껴지는 감촉이. 이미 죽은 것에서도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나 삶은 허무하다.


“으, 으아아아···!”


처참하게 꺾여버린 목. 소리를 꺼내지 못하는 세실의 시체가 덮쳐진 레이든의 위로 엎어졌다.

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건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실성한 레이든이 세실의 머리칼을 더듬었다.


“이젠, 그녀를 풀어줘···”


한 마디만을 남겨두고 방을 나왔다.

편안히 잠들지 못한 건, 나도 있었다.

걸어가면서도 잠에 드려는 눈꺼풀을 악착같이 붙들며, 밖으로 나왔다.

두 번 다시 수마를 따라간다는 선택지를 나는 고를 수 없었다. 긴 시간처럼 느껴졌으나, 밤은 여전히 밤이었다. 새벽에 다다르지 못하고, 깜깜한 밤하늘만 온전히 남아있었다.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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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끝나버린 대화 20.11.24 47 1 12쪽
55 천년의 꽃-2 20.11.20 53 2 12쪽
54 천년의 꽃 +1 20.11.18 62 2 11쪽
53 이른 눈송이 20.11.15 43 2 12쪽
52 자그마한 성장 20.11.08 48 3 12쪽
51 두 남자 20.11.07 48 2 11쪽
50 낙사 직전 20.11.03 49 1 11쪽
49 경청 20.10.30 93 1 11쪽
48 또 하나의 만남 20.10.28 60 2 11쪽
47 재회 20.10.25 61 1 11쪽
» 언데드 20.10.23 69 3 11쪽
45 호랑이의 기세를 훔친 개미 20.10.20 67 1 15쪽
44 믿음에 대한 배신 20.10.15 59 2 12쪽
43 사랑을 위한 죽음에 대하여 20.10.14 57 2 13쪽
42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20.10.12 61 2 12쪽
41 사연풀이 20.10.10 65 1 12쪽
40 포기하다 20.10.05 75 1 12쪽
39 발악 20.10.04 6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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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자칭 천재 마법사 20.10.02 83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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