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2)
4편.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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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파네아스 고원을 경유했다.
거무죽죽한 땅이 꺼지지 않는 불을 품은 곳이었다. 대지의 갈라진 틈새마다 김이 뿜어져 올랐다가 하늘에 닿지 못하고 조숙한 구름이 되었다. 마치 그건 너무 먼 이상이라는 듯이. 일찍 맺고 일찍 썩는 것이 새로운 질서라는 것처럼.
말들이 증기에 곧잘 놀랐다. 증기라면 이미 온몸에 두르고 있는데도 눈앞의 것은 매번 새로운 모양이었다. 아이반이 속도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켈란은 결국 말에서 내려야 했다. 그는 말에게 엄포를 놓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다가 결국엔 고삐를 거의 어깨에 멘 모양으로 당겼다.
보다 못 한 베일이 나섰다. 그는 말의 긴 주둥이를 안고 속삭였다.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뒤에 베일은 자기 말과 켈란의 말을 나란히 끌고 걸었다.
「뭐라고 한 거예요?」 켈란이 물었다.
「실체가 없는 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그런 말을 대장이 하다니 이상하네요.」
고원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좁아졌다. 베일과 켈란이 다시 말에 올라탔다. 티라는 베르나가 데리고 있었다. 티라는 베일을 혐오했고, 빌드리드는 어려워했으며, 켈란에게서는 섬뜩한 순진함을 느꼈고, 아이반의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베르나가 티라를 내려주고 말을 갈아탔다. 말은 짐말까지 합해 모두 일곱 마리였다. 개중에 베일이 본래 타고 다니던 검은 암말은 없었다. 이 사실 때문에 베일은 테네리프를 떠날 때부터 줄곧 풀기 없이 굴었다.
해가 저물 때쯤 그들은 광부들과 마주쳤다. 광부들은 삼교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내려가면 똑같다는 것이었다. 아이반이 뭘 캐느냐고 물었다. 광부들이 이것저것, 하고 모호하게 답했다.
그들은 광부들이 일러준 길로 내려가 광산촌에 닿았다. 소 키우는 집을 찾아서 값을 치르고 꼴을 얻었다. 우물에 둘러 모여서 수통을 채우고 말들에게 물을 먹였다. 베일이 흙집 벽에 기댄 채로 담배를 피웠다.
노인 하나가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뭔가를 따졌다. 티라에게 누런 짚으로 매듭 꼬는 법을 알려주고 있던 베르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아이반을 보고 노인을 본 다음 턱짓을 했다.
아이반이 노인과 말을 나누고 돌아왔다.
「두레박으로 말한테 물 먹이지 말라는군.」
「우물에 처박아 주지.」
베일이 침을 뱉었다. 아이반이 짐말의 등에서 냄비를 꺼냈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켈란이 돌아와 묵을 곳을 안내했다. 도착했을 때쯤엔 장대비로 바뀌어 있었다. 아까 꼴을 샀던 집이었다. 헛간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베일이 켈란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헛간이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리 멀지 않은 때엔 외양간이었던 듯했다. 건너편 새로 지은 외양간에서 소가 길게 울었다.
「저 새끼가 우릴 비웃잖아.」 베일이 툴툴거렸다. 「댁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시기에 내 옛집에 살림을 차리셨나, 하고 말이야.」
아이반이 빙긋 웃었다. 그는 한가운데의 지푸라기들을 손으로 쓸고 흙바닥 위에 지도를 그렸다. 대충 선만 슥슥 긋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를 축척자로 삼아 제법 세밀하게 작성했다. 빌드리드도 목을 빼고 구경했다.
이제 와서 보니 아이반도 페스트 피에스타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후보지 여섯 군데를 죽 나열해 놓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순서를 정했다.
「피에스타의 충원 방식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아이반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감옥을 습격하지.」 베일이 말을 받았다. 「배회자만 가두는 감옥 말이야. 죄수들 중에서 두금 이상인 놈들을 선별해.」
「나머지는요?」 켈란이 물었다. 「풀어줘요?」
「그랬으면 해방자로 환영 받았게?」 베일이 핀잔을 줬다.
「남겨두고 떠나지. 자기들이 살포한 가스와 함께. 피에스타는 그렇게 함으로써 격차를 만드는 거야. 어떤 배회자든 한금에서 시작하지. 그러다 균열을 하나둘씩 얻어서 올라서는 거고. 피에스타는 이 과정에 개입해 문지기 노릇을 하는 거야. 한금? 죽어. 두금? 너도 죽어.」
「아까 두금은 받아준다면서요?」
「그것도 잠시 동안은 그렇단 얘기지. 피에스타는 보모들이 아니야. 정해진 시일 내로 균열을 더 얻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해 버리지. 그래서 피에스타 길드원은 대체로 석금 이상의 배회자인 거고.」
아이반의 설명을 들은 켈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듣고 보면 우리 길드 입회 조건은 꽤 너그러웠던 것 같네요.」
「입회 조건이 뭐였는데요?」 베르나가 물었다.
「일단 배회자인지 확인하고.」 그건 모든 길드의 공통된 입회 의례였다. 「그 다음엔 몇 가지 문답. 내용은 대부분 까먹었어요. 몇 명이나 죽였느냐고 물었던가?」
「차륜형마다 달라.」 아이반이 말했다. 「난 특기에 대해서 주로 질문했지. 우리한테 필요한 사람인지 알아야 했거든.」
켈란이 베일을 쳐다보았다. 그를 콥스 팩토리에 들인 게 베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몰라. 기억 안 나.」
「아, 하나는 기억났어요. 어떤 사람이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빈다면?」
「뭐라고 답했는데요?」 베르나가 물었다.
「아이를 놔준 다음 달아날 때 등을 쏜다고 했던가? 아무튼 그래요. 그러고 나서 대장이 했던 말은 확실히 기억나요. 자리를 바꾸는 게 최고라고 했어요.」 켈란이 베일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널 살려줄 테니 아이를 죽이지. 그건 어때, 응?」
비가 외양간 지붕을 두들겼다. 아이반이 흙바닥 위의 지도를 지웠다. 손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곧 사라졌다. 한참 뒤에 베르나가 입을 열었다.
「두렵지 않아요?」
「뭐가?」 베일이 되물었다.
「동기가 없다는 거···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거 말이에요.」
「어떤 아이를 상상해 봐. 술 취한 아버지한테 두드려 맞는 게 일상인 아이 말이야.」
베일이 느닷없이 말했다. 그건 예의 장광설이 시작되려는 조짐이었다.
「어느 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야. 망할, 누나가 집에 있었으면 나만 맞지는 않았을 텐데. 언제 진정한 노예가 되는지 알아? 때리는 사람에게 의문을 갖지 못하고 같이 맞을 사람을 찾아 헤맬 때,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게 될 때 뼛속까지 노예가 되고 마는 거야.」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게 그런 일 아닌가요? 세상 사람들을 학대당한 아이처럼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 하잖아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냐. 세상 사람들과 나를 나누는 건 의미가 없어. 나는 그 사람들의 세상이고 그 사람들은 또 나의 세상이니까. 우린 왜 한 손으로만 악수를 나누나? 다른 쪽 손에 묻은 피를 감춰야 하기 때문이지. 그럼 두 손으로 악수를 나누는 사람은? 친절하고 약간은 비굴하게 반대쪽 손으로 손등을 덮는 사람은? 피를 옮겨 묻히기 위해서지.
피해자가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은 세계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난제야. 폭력의 낙인이 이마에 찍힌 사람들은 시뻘겋게 달군 인두를 꼬나들고 표적을 찾아 나서거든. 자기보다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든 찾아내지. 우린 그렇게 만들어져 있나 봐.
그러니 세상은 비루한 인간들의 술래잡기인 셈이야. 이번엔 네가 술래야, 하고 말이지. 그렇게 폭력은 닫힌 세계 안에서 대물림되는 거야. 악의 고리라고 할까.」
「거기서 벗어날 방법을 쥐고 있는 건 당신이고요?」
「그래. 더 많은 사람들이 이걸 알아내지 못했다는 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안타까울 뿐이야.」
베일은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광휘를 잃을까 신탁을 아끼는 예언자처럼 입을 다물었다. 티라는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빗소리를 들으며 헛간에 기대어 잤다.
비는 아침에도 계속 내렸다.
부슬비였다. 아침과 볼일을 해결한 그들은 기름 먹인 천을 두르고 말에 올랐다. 말은 다른 집에 맡겨 두었다. 말을 맡긴 값으로 베어링 하나를 치렀다. 켈란은 터무니없는 가격이라고 했는데 베일의 생각은 달랐다.
「누구든 말을 돌보는 자에게 축복 있을진저.」
베일이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비는 점심이 되어서야 그쳤다. 켈란이 불을 피우고 아이반이 요리를 했다.
「재료가 부족했지만, 변명하지는 않겠네.」
「탐사단 요리사보다는 실력이 훨씬 좋은걸요.」 베르나가 말했다.
「제 아내보단 확실히 더 나아요.」 켈란이 말했다.
「집엔 안 가 봐도 돼요?」
「오래 걸린다고 말해두고 왔어요. 전에 준 돈도 아직 남았을 테고. 둘이 살기엔 부족하지 않겠죠.」
「아이도 있어요?」
「그럼요.」
「몇 살인데요?」
「몰라요. 까먹었어요. 아내가 데리고 왔어요.」
베르나는 더 묻지 않았다. 빌드리드가 말없이 식사를 남겼다. 남자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식기를 치우고 자리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오레아드로 가시오?」
남자가 말 위에서 물었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서 온 남자는 챙이 둥글고 거대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잔뜩 그려진 알락달락한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수중에 무기가 있는지 어떤지는 짐작할 길이 없었다.
「거길 거쳐 가긴 합니다.」 아이반이 답했다.
「행선지를 여쭤도 되겠소?」
「아니.」 베일이 담배를 문 채로 답했다.
남자가 상체를 기울여 그들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그러느라고 눈을 가늘게 떴는데 아마도 진지한 표정이었을 테지만 입을 다 덮은 콧수염 때문에 어쩐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하고는 관계가 어떻게 되시오?」
「애먼 사람 신문하지 말고 갈 길 가시지.」 베일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내가 오해를 한다고 해도?」 남자가 물었다.
「네까짓 게 오해를 한다고 해도.」
아이반이 품속을 뒤졌다. 그는 독전관의 패를 꺼냈다.
「우린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입니다. 부모랑 생이별하고 유리걸식하고 있기에 친척 집에라도 데려다 줄 요량으로 잠시 맡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얘야.」 남자가 티라에게 말을 걸었다. 「이 신사분 말이 사실이니?」
「아뇨.」
티라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베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랑 있어야 해요. 어쩔 수 없어요.」
남자가 기울였던 상체를 천천히 바로 폈다. 그는 얼굴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한 번 더 그들을 꼼꼼히 훑었다.
「알겠다.」 남자가 말했다. 「위험한 짓 하지 말거라.」
남자가 모자챙에 손을 얹어 인사를 하고 말을 걸렸다. 그들은 남자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티라가 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베르나가 말 위에 올려주었다. 그들은 짐을 챙겨 다시 길을 떠났다.
아무도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아이반이 말을 돌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먼저들 가고 있어. 곧 따라잡을게.」
티라가 고개를 돌리고 아이반을 보았다. 아이반은 이미 말을 재촉해 달려 나간 뒤였다. 베일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참 재밌지. 꼬맹이 말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게.」
티라가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베르나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켈란은 뒤편 먼 곳에서 날아오른 새들이 머리 너머로 비행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쇠뇌에 보이지 않는 볼트를 메겨 새 한 마리를 겨냥했다.
한참 뒤에 아이반이 돌아와 유령처럼 합류했다. 표정이 개운하지 않았다. 아이반이 말을 몰아 베일 옆에 붙었다. 그는 몸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잘못 건드렸어.」 아이반이 실토했다.
「빗맞혔나?」 베일이 물었다.
「아니, 적중했어. 머리에. 즉사했지.」
베일이 코를 훌쩍였다. 사살하고도 낭패를 봤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어디야?」
「템페스트.」
「그 자경단 놈들?」
「그래.」
베일이 담배꽁초를 내던졌다.
「멋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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