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죄악의 혈맥(3)
팔로 의자를 짚고 상체를 일으킨 티라는, 정확히 같은 일을 더 굼뜨고 더디게 시도하고 있는 베일을 발견했다. 나이 든 의사의 주름진 얼굴이 티라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얘야, 저 사람이 네 아버지나 형제니, 응? 친척이야? 아니지?」
상황을 파악한 티라는 망설이지 않고 외쳤다.
「죽여야 해요!」
티라의 새된 비명을 들은 제롬은 충격을 받아 거의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얼른 베일을 돌아보았다. 베일은 왼손을 자기 목구멍에 집어넣어 속을 게워내려 하고 있었다.
「내가 신고하마. 아니지. 같이 가자, 어서!」
「안 돼요. 죽여야 해요! 지금 죽여야 한다고요!」
티라가 도리질 쳤다. 제롬은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닦고 티라의 팔목을 잡았다. 티라가 일어나지 않고 버텼다. 베일이 구정물 삼킨 개처럼 엎드려 토악질했다. 제롬이 티라를 안아서 들어올렸다.
「배회자 전문이긴 해도, 어쨌든 나도 의사야. 사람을 살릴 순 있어도 죽일 순 없다. 내 원칙이 그래. 가자, 걱정 말고. 가서 사람을 불러오자. 못 일어날 거야.」
「지금 안 죽이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거예요.」 티라가 애원했다. 「끝내야 해요. 부탁이에요.」
「나는 못 한다. 난 그런 걸 할 수가 없어.」
「그럼 제가 할게요.」
문을 향해 걷던 제롬이 비틀거렸다. 티라가 제롬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쳤다. 제롬이 티라를 꼭 껴안았다.
「맙소사, 그럴 순 없어. 넌 어린애야. 네가 그렇게 하는 걸 두고 볼 수도, 도울 수도 없다. 그건 세상의 법이고 내 마음의 법이야. 그게 무너지면 넌 네가 가진 줄도 몰랐던 것까지 잃고 말 거다.」
「아저씨!」 티라가 다급하게 소리 쳤다. 「아저씨, 뒤에!」
제롬은 뒤를 돌아보았고, 펼쳐진 장면에 그대로 몸이 굳었다. 베일이 단도로 자기 목을 베었다. 솟구쳐 나온 피가 천장을 적셨다. 베일은 랜턴을 집어 들어 유리를 깨트리고, 환부를 불로 지졌다.
제롬이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더듬었다. 피와 기름이 뒤섞여 야릇한 냄새가 풍겼다. 베일은 목과 어깨에 불이 붙은 채로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제롬이 불에 덴 듯 황급히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팔뚝에 단도가 박혀 있었다.
「피해요!」
티라가 소리 쳤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제롬이 천천히 티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베일이 제롬의 등에서 검을 뽑아내고 목을 쳤다. 힘이 달렸는지 목은 끊어지지 않았다. 넘어진 제롬을, 베일이 몽둥이로 두드려 패듯 우악스럽게 검으로 내리쳤다.
늙은 의사가 더 이상 신음하지 않자 베일은 검을 돌려보내고 수혈침을 불러왔다. 그러쥐어 깨트린 수혈침을 아직도 불이 붙어 있는 목에 유리 조각과 함께 처발랐다. 티라가 벌떡 일어났다. 베일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이리 와.」 베일이 숨을 색색거렸다. 「날 안아줘.」
베일의 몸이 티라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티라가 몸을 돌려 베일을 물어뜯으려고 발버둥 쳤다. 베일은 왼손으로 티라의 코와 입을 막았다. 베일의 숨결이 귀에 훅 끼쳤다.
「언젠가··· 네가 날 죽이겠지. 그때까지··· 날 사랑해 줘. 내 세계를 익히고, 내가 되어 줘.」
카넬라가 찢어놓은 입가가 다시 벌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베일은 티라의 볼에 대고 얼굴을 비벼 온통 피를 칠했다. 티라는 눈을 감고 기절한 척하려 했다. 그러나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혀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의사가 망설이지 않고 베일을 죽였더라면, 자신이 의사를 설득할 수 있었더라면, 카넬라가, 게르트가, 어니가 베일과의 싸움에서 이겨 목숨을 끊어 놓았더라면······. 티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쁜 건 저 사람인데, 우리를 탓하게 되는 거지? 대체 왜?
티라는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는 것과 베일의 피 묻은 손이 자신을 놓아주는 것을 느꼈다. 베일은 티라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잠들었다.
코를 골고, 침을 흘리며 평화롭게 잤다.
*
정이 들었다고 말하긴 어려워도, 어쨌거나 전투가 끝난 뒤 살아있는 얼굴들을 다시 보게 됐을 땐 반가웠다. 자크가 제복 입은 시체를 걷어치우고 흙바닥에 〈다행〉이라고 적었을 때 루도빅은 가슴 뭉클한 감동까지 느꼈다.
이런 감동은 템페스트 본부에 도착해 참회자와 면담을 갖게 된 즉시 흩어졌다. 모리소 바랑이 푸생과 휘하 고행자 스물하나의 전사 소식을 전하자, 말라서 광대뼈가 불거져 나온 참회자의 얼굴은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그리고 루도빅은 자신을 향한 원망 어린 눈길에서 참회자의 속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왕국 소속인 루도빅의 참전을 막지 않은 건, 그가 전투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경우 템페스트가 복수의 대행자로서 왕국의 지원을 등에 업을 수 있으리란 계산 때문이었다.
〈제 생환이 마음에 드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럴 리가 있는 말투로 참회자가 답했다. 〈애쓰셨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루도빅에게도 비슷한 계산이 있었다. 자신이 전투에서 쓰러지더라도 동료들이 뜻을 이어받아 과업을 완수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생을 은근히 바라는 참회자의 얼굴을 본 이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아야겠다는 결심이 뿌리를 내렸다.
루도빅이 뼈저린 실망감을 맛보고 있는 동안, 참회 성소는 바쁘게 돌아갔다. 푸생이 죽어 네 명이 된 회개자들이 본부로 소환되었고 후속 조치를 놓고 철야 회의가 진행되었다. 핵심 의제는 줄어든 인력의 보충 방법이었다.
승전이라고는 하지만 손실은 패전이라고 해야 할 만큼 컸고, 종래 템페스트가 치안을 맡아왔던 지역들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할 도리가 없었다. 템페스트의 악명 높은 모집 방법의 특성상 단시간에 새 길드원들을 들여올 수도 없었다.
결국 해결책으로 제시된 안은 세 가지였다; 말레우스, 스틸 암즈, 그리고 루스펠하임 왕국. 회개자들은 이미 스틸 암즈가 너그럽게도 〈아무런 사심도 없이 동업자에 대한 경의의 발로로서〉 지원을 검토하고 있노라 전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게 관할권을 빼앗아 가려는 질 낮은 수작이라는 걸 모르는 이도 없었다. 비록 참회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레우스의 심문관 에일하드 역시 같은 목적으로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점을 내세워— 지원 의사를 넌지시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 회의의 대부분이 말레우스와 스틸 암즈 중 어느 쪽이 더 최악의 선택이 될지에 대한 격론으로 채워진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아룍의 생포와 이어진 탈주를 둘러싼 수상쩍은 정황이 스틸 암즈가 더 최악이라는 주장에 힘을 보탰지만, 결정은 시기상조였다.
세 번째 안이 남아 있었던 탓이었다. 왕국에 손을 벌리는 안이 가결된 뒤에도 템페스트는 루도빅에게 여전히 뻣뻣하게 굴었다. 회의 결과를 알려온 건 참회자나 회개자들도 아닌 모리소 바랑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꿰고 계신 교위님께서 왕국과 길드 양자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잘 조율하시리라 믿습니다.〉
〈참회자님은요? 얼굴도 안 비추는 겁니까?〉
〈처리하실 일들이 많아서요. 뤼실과 자크가 함께 갈 겁니다. 그럼······.〉
〈부탁한다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바랑이 코웃음을 쳤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이제 루스펠하임 왕국의 승의교위 루도빅 케랑칼은 여관 로비에 앉아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이른바 저간의 사정이라는 것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템페스트 입장에서는 루도빅이 미울 수도 있었다.
고행자 알론소의 죽음을 길드 간 전쟁으로까지 키운 데에 루도빅이 필요 이상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템페스트야말로 콥스 팩토리 잔당을 일소하겠노라 다짐하던 이들이 아니었나?
확실한 건 그날 전투에서 보여준 템페스트의 역량은 그들의 다짐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원군의 등장으로 간신히 전멸을 면한 주제에 이젠 엉뚱한 사람을 탓해? 루도빅은 다시 채운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저흰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뤼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출발해야 하니 과하지 않도록··· 모쪼록 주의를.」
「주의를··· 그리고?」 루도빅이 픽 웃었다. 「당부 드린다는 거죠? 당신네 고행자들은 대체 뭐가 문제여서 부탁이란 말을 못 합니까? 내가 당신들 길드를 위해 얼마나······.」
「당부 드립니다.」
자크가 루도빅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뤼실의 뒤를 따랐다. 루도빅은 한 병을 더 비웠다. 요의를 느끼고 변소에 다녀온 그는 주인을 불러 값을 치르려 했다.
「다른 분이 내셨어요.」 주인이 너트 쥔 루도빅의 손을 살며시 밀었다. 「친구라고 하시던데요.」
나한테도 친구가 있다니 놀랄 일이로군. 루도빅이 중얼거렸다. 술기운 때문에 소리 내어 말했는지, 속으로만 말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루도빅은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는 뤼실과 자크가 묵는 방의 문을 흘깃 보고 자신의 방 앞에 섰다.
뒤로 휘청거리며 문을 연 루도빅은 앞으로 휘청거리며 방 안에 들어섰다. 문틈에 낄 뻔한 팔을 빼낸 루도빅은 문을 향해 삿대질했다. 자식이, 내 팔을 물려고 해? 어림도 없지. 방금 반응 속도 봤어? 나 아직 안 죽었다고.
구석의 침대를 향해 몸을 던지려던 루도빅은, 그러나 멈춰야만 했다. 반대편 구석의 의자에 사내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루도빅이 반쯤 감긴 눈을 한 채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미안합니다. 취해서 방을······.」
「앉게.」
루도빅은 취기가 달아나고 그 자리를 한기가 채우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했다. 그러나 달아난 취기는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사내가 손에 쥐고 있는 치륜식 권총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앉아. 얘기를 좀 하지.」
총구가 루도빅의 머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루도빅은 침대에 걸터앉아 사내를 노려보았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모르는 얼굴이어서 루도빅은 사내의 정체를 알았다.
「니스록.」
「눈치가 빠르군.」
「넌 날 못 쏴. 바로 옆방에 내 동료들이 있어.」
「그런가?」
「왜 왔는지 알아. 왕국의 지원을 막으려는 거겠지. 날 죽이고 내 신분을 가로채러 왔을 테고. 하지만 같이 떠났던 고행자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템페스트가 수상하게 여길 거다.」
「그렇군.」
루도빅 옆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볏짚 부스러기들이 하늘거리며 떨어졌다. 루도빅은 옆을 돌아보고, 그제야 방금 니스록이 베개를 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니스록을 돌아봤을 땐 바퀴를 돌려 장전을 마친 뒤였다.
「이 매끈한 아가씨의 이름은 〈즉결심판〉. 우아함이 몸에 밴 탓에 불을 뿜을 때조차도 호수처럼 고요하지.」
니스록이 부표 판매상처럼 지껄였다. 루도빅은 낯익은 말씨가 자신의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니스록은 자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루도빅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부르쥐었다.
「누구였지?」 루도빅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엇이?」 떨리지 않는 루도빅의 목소리가 반문했다.
「내 동생과 그 애 딸아이를 죽인 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아는 사람도 모른다고 답할걸. 이름이 뭐였는데? 아니, 어디 살았는데?」
「누구였어? 너였나?」
「이봐.」 니스록이 피식 웃었다. 「진정하고 차근차근 얘기해 봐. 들어줄 테니까.」
「다섯 살이었어. 올케가 그렇게 되고 나서··· 혼자서 애지중지 키웠다고.」
「이 친구 술이 과했군.」
니스록이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루도빅에게 휙 던져주었다. 손수건이 무릎 위에 사뿐 내려앉았다. 턱에 걸려 있던 눈물이 손수건 위로 낙하했다.
「동생 밑에 깔려 있는 그 애를 꺼낼 때··· 내가 뭐라고 기도했는지 아나? 내가 뭐라고 기도했는지······. 동생은 데려가도 좋으니··· 그 애 하나만이라도··· 걔 하나만이라도··· 내가, 형이라는 작자가 동생이 죽었길 바라는 게 어떤······.」
루도빅은 말을 멈췄다. 알싸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목에 뜨끈한 기운이 번졌다
「미안.」 니스록이 권총의 바퀴를 돌렸다. 「목소리가 점점 커져서.」
루도빅은 피를 뱉어내고 니스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니스록이 앉은 채로 바닥을 박차 뒤로 벌렁 누웠다. 니스록은 머리를 홱 옆으로 꺾었다. 루도빅이 내려찍은 검이 바닥에 박혔다. 루도빅의 몸이 움찔했다.
니스록은 무너지는 루도빅을 발로 감싸 안고 옆으로 굴렀다. 가슴 한가운데서 핏물이 간헐천처럼 꿀렁꿀렁 솟았다. 루도빅의 배를 깔고 앉은 채로, 니스록이 단검을 불러와 루도빅의 옆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동생이랑 조카 일은 안됐어.」
니스록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루도빅은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니스록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그랬다고 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겠나?」
- 작가의말
후원해 주신 眞人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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