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죄악의 혈맥(9)
5편. 죄악의 혈맥(9)
여자의 이름은 우르줄라 디스바흐였고, 이후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동료들은 꺽다리 줄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문제의 동료들은 약간 모자란 로렌초를 똑똑이라고 불렀는데, 꺽다리 역시 비슷한 유머 감각의 산물이었다.
금빛이 도는 갈색 머리는 뒤에서 틀어 올렸고, 그을린 얼굴엔 교활한 여유가 흘렀다. 베일보다 적어도 네다섯 살은 더 젊어 보였는데 눈빛이나 행동거지에 담긴 노련함은 그 못지않았다.
허리에 단검을 차고 있어 배회자는 아닌 듯싶었으나, 섣불리 넘겨짚을 순 없었다.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칼집에 손잡이만 꽂고 다니는 이들도 더러 있었던 것이다.
「일을 찾고 있지?」
「그렇게 티가 나던가?」 베일이 피식 웃었다.
「거기다가 도망치는 중이고.」
베일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렇게 짐작한 이유는?」
「배화자인데도 표류물을 불러오지 않았으니까.」
베일은 담배를 테이블 위에 비벼 끄고 우르줄라의 추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여관에 배회자가 있다더라. 검은 머리에 수염을 길렀다더라. 그런 얘기만으로도 추격자들이 네 정체를 특정해 버리기에 충분하지.」
「괜찮은 추론이군.」
「평소라면 너처럼 수상쩍은 인간하고는 상종도 안 했겠지만, 네가 쫓기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시간에 쫓기는 중이거든.」
「수상쩍다니? 내가 의로운 일을 하느라 쫓기고 있는 거라면? 가령 이 꼬마를 짐승 같은 놈들의 마수에서 빼낸 뒤 숨을 돌리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우르줄라가 티라를 쳐다보았다. 티라는 표정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꼬마 아가씨는 상황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군. 신경 안 써. 너희 둘이 해결할 일이지. 아무튼 내가 제안하려는 건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이야. 보수는 적당한데 경우에 따라서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지.」
「칼솜씨가 필요한 일일 테고.」
「그래. 보안 문제로 자세한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런 일이야. 상당한 거리를 이동해서 요새 같은 시설을 공격해.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인간들을 붙잡거나 죽이는 거지. 상대는 마흔에서 쉰 명 정도.」
우르줄라는 말을 마치고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베일은 붙잡거나 죽인다는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쉰 명이 모두 무장한 상태는 아닐 거란 뜻이었다. 종업원이 포도주를 내어왔다. 베일이 짤막한 감상을 밝혔다.
「멋지군.」
「하겠나?」
「그 전에 몇 가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
「질문해. 하지만 확답을 주지 않는 이상 설명에도 한계가 있어.」
「이 일이 전쟁과 관련되어 있나?」
「내가 아는 한 아냐.」
「상대가 정규군이 아니란 뜻이지?」
「그래. 그건 확실히 아냐.」
도적들이로군. 산채가 있고 자기네 마을도 있어. 붙잡는단 건 이놈들의 가족들일 테지. 베일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죽여도 상관없군.
「행선지가 어느 쪽이야?」
「남쪽.」
「제국인가?」
「아니.」
「멋지군.」
우르줄라가 베일의 잔을 채웠다.
「하겠나?」
「너무 좋은 조건이어서 함정이 아닌지 고민하는 중이야.」
「어울리지 않게 신중하시군. 할 거라면 나랑 같이 방으로 올라가지. 거기서 내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대장한테서 더 자세한 얘기를 듣는 거야. 유념해 둘 사실은, 일단 하겠다고 결정하면 무를 수 없다는 거야. 아니, 무를 순 있는데 결행 직전까지 우리와 함께 가야 해. 말이 새게 둘 수 없거든.」
베일이 잔을 들었다. 「하겠어.」
「좋아.」
우르줄라가 술병을 들어 베일의 잔에 부딪고 빠르게 비웠다.
*
「경기병들을 보세요.」
일군의 기수들이 말을 몰아 진지를 빠져나가자 할덴이 말했다.
「훈련이 잘되어 있어요. 황제가 거대한 군대를 운용하는 데 핵심이 되는 존재들이죠.」
「나라면 말이지.」 바스티안이 말했다. 「여기서 그런 얘기를 떠들진 않겠어. 그것도 북부 말로.」
여기란 디에고 로페스 데 케베도 총독 휘하의 기병대가 오늘 아침에 마련한 진지를 이르는 것이었다. 게르트 일행이 예기치 않게 제국군의 진지로 흘러들게 된 건, 첫째로는 베일의 뒤를 따르는 중이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베일이 지나갈 땐 없었던 진지가 일행이 지나갈 때는 불쑥 생겨나 있던 탓이었다.
그리고 셋째로는 진지를 보고 발길을 돌리려는 일행을 하사관 하나가 기어코 붙잡은 탓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들이 말레우스의 길드원임을 조곤조곤한 말씨로 설명했건만, 오히려 그 설명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하사관은 반가운 눈빛을 쏘아 보내며 히메네스 중위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사정했다.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맡기고 싶은 일이 있는 모양이죠.」
프리다가 저의가 가득 담긴 말투로 게르트를 향해 말했다. 부탁 들어줄 시간 따위 없으니 결단을 내려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게르트의 생각은 달랐다. 제국의 기병대가 지금처럼 피어로이트 공작령까지 진출했다면 앞으로 제국군과 부딪칠 일은 더 많을 터였다.
말레우스와 제국은 돈독한 사이로 유명했으나 이 경우엔 에일하드의 섬세한 조정이 문제가 되었다. 북부에서 보다 원활한 활동을 펼칠 수 있게끔 요원들을 북부 출신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게르트, 에르네스트, 바스티안 모두 직간접적으로 북부와 연이 있었다.
거기에 독전관들과 함께 다니는 것도 문제였다. 블렌욜프에게 충성을 바치는 스틸 암즈의 길드원들을 제국군이 달가워할 리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게르트는 기회가 있을 때 제국군과 호의적인 관계를 형성해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지휘관이 오면 얘기를 들어보고 그때 결정하도록 하지요.」
에르네스트가 차분하게 말했다. 호전된 에르네스트의 상태도 게르트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에일하드는 티라를 되찾는 일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하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고, 해결책은 못되더라도 미봉책 정도는 강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데흐몽의 초원에서 에일하드가 에르네스트에 건네준 부표는 모두 두 장. 오검 문자 에만콜을 통해 만들어진 연결의 효력 범위와 그 반작용을 조정하는 용도였다. 이제 에르네스트는 병자처럼 식은땀을 흘리지도, 온종일 색색거리지도 않았다.
「오는군요.」
바스티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이 울리고 이어 기수들이 우르르 진지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무리 질서정연한 기병들이라 해도 소리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어딘지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분위기를 풍기는 법이었고, 제국 기병대도 다르지 않았다.
윤기가 흐르는 거세마를 타고 선두에 선 이가 히메네스 중위인 듯싶었다. 중대 규모의 기병대를 이끄는 히메네스 중위는 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 게르트 일행을 향해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정보와 명령의 전달, 그리고 각종 기동력이 요구되는 작전 수행에 핵심적인 기병대의 진지 한가운데에 북부인의 용모를 지닌 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을 이유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가능성 높은 설명은 이들이 인근 마을이나 요새에서 찾아온 변절자들이라는 것일 테지만, 그런 이들이 흔히 지니곤 하는 비굴한 기색을 다섯 가운데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다시 말해, 왜 이리 늦었느냔 표정들이었다.
「무엇들이지?」
히메네스가 일행을 향해 제국 억양이 강한 북부 말로 물었다. 게르트가 말없이 그들을 붙잡아 두려 했던 하사관을 가리켰다. 하사관은 마침 달려오던 중이었다. 발보아 하사는 상관에게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히메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가 군막을 지목했다. 그러고는 먼저 군막을 향해 척척 걸어갔다. 통역을 위해 발보아 하사도 뒤를 따랐다.
장막 안은 서늘했다. 히메네스는 도금 장식이 화려한 흉갑을 벗어 내려놓고 바가지로 물을 퍼 목덜미에 연거푸 끼얹었다. 일행은 간이 테이블에 둥그렇게 모여 서서 기다렸다.
「징벌관?」
히메네스가 머리칼을 비틀어 물기를 짜내면서 짧게 물었다. 게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랑카 히메네스. 그쪽은?」
「프로이덴베르거요.」
중위와 하사의 표정이 변했다. 발보아 하사도 그들 가운데 징벌관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말굽 관리자.」 중위가 말했다.
「장제사.」 북부 말을 조금 더 잘하는 하사가 표현을 고쳤다.
「징벌관, 다섯 명 전부?」
「그렇진 않소. 하지만 같은 임무를 띤 사람들이오.」
게르트의 말에 히메네스가 고개를 홱 돌려 하사를 쳐다보았다.
「임무 있군. 시간 허비했나, 우리로 인해?」
발보아는 입술을 입안으로 빨아들인 채 시선을 피했다.
「아니라고 할 순 없소.」 게르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부탁할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듣고 싶소.」
「부탁 아니고 의뢰. 적정한 보수 있는 계약을 한다. 설명.」
히메네스가 팔꿈치로 발보아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설명이 시작되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타지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보니 약간 복잡한 상황에 얽히게 되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호위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목적지는?」 프리다가 하사보다 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르지네 백국, 페시나.」
게르트가 에르네스트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끄덕였다. 조금 더 들어봐도 되겠다는 뜻이었다.
「계속 말씀하시오.」
「그러죠.」 발보아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페시나의 어느 상인에게 치러야 할 대금이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운송해야 할 대금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린 이미 지난달 말에 대금을 보낸 적 있습니다.」
「산적들인가 보죠?」 할덴이 끼어들었다.
「정확합니다. 규모가 제법 되고요. 적게 잡아도 사십, 많으면 오십··· 그들 전부가 전투원인 건 아닙니다.」
프리다와 바스티안의 표정이 봐줄 만하게 변하자 발보아가 얼른 덧붙였다.
「아르지네가 목적지라면, 바다를 통하면 될 일 아닙니까?」 바스티안이 물었다.
「사략선이 판을 치고 있어서요. 뭐, 블렌욜프를 비난하진 않겠습니다. 전쟁엔 온갖 수단들이 동원되는 법이니까요. 아무튼 문제는 대금의 안전한 도착이라기보다 잡혀 있는 부대원들의 구출입니다.」
「아하.」
바스티안이 추임새를 넣었다. 일행의 다른 이들도 비록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저마다 비슷한 감탄사를 하나씩 마음속에서 외쳤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지금 특수 작전의 수행을 의뢰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르지네 백국에 닿으려면 산을 넘고 늪을 건너야 했는데 양자 모두 기병의 운용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니 외부 인력이 요구되고, 인질을 구출해야 하니 또한 정예가 필요한 작전이었다. 징벌관이라는 말에 발보아 하사가 펄쩍 뛰며 기뻐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 산적들은 지난달에 떠났던 우리 대원들을 붙잡고, 대담하게도 몸값을 요구해 왔습니다. 우리가 손은 부족한 반면 돈은 많다는 걸 알고 이를 악용하려는 거죠.」
「그런데 돈이 많으면 손을 살 수 있단 걸 간과했군요.」
에르네스트의 말에 발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린 일당백의 용사들이 아닙니다.」
에르네스트가 씁쓸한 기색이 있는 농담조로 말했다. 자조적이긴 했어도 어쨌거나 근래에 들어 듣기 힘든, 밝은 목소리였다. 마리우스와 카넬라의 연이은 죽음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티라가 여전히 베일에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이 목을 죄어오는 탓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실의에 빠져 있을 순 없었다. 더군다나 구해내야 할 사람이 매일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작은 농담들이 필요했고, 이건 할덴의 분야였다. 마침 할덴도 프리다의 귓가에 대고 목소리를 낮춰 〈일당십 아니에요?〉 하고 묻는 중이었다.
「우리 대원들 함께.」 히메네스 중위가 말했다. 「더하기 칼 파는 사람.」
「우리 대원들에 더해 용병들까지 구해 놓았단 얘깁니다.」 발보아가 얼른 부연했다. 「주된 전투는 용병들에게 맡기고, 여러분들은 우리 대원들과 함께 붙잡힌 대원들을 구해 주시면 됩니다.」
게르트가 고개를 찬찬히 돌려 에르네스트와 바스티안, 할덴과 프리다의 얼굴을 차례대로 훑었다.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아직 베일의 행선지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성지로 향하는 것만은 거의 확실했다.
아르지네 백국은 늪 건너의 초입에 위치한 곳이었으므로 잠정적으로 여길 목적지로 정해둔들 큰 해악이라고 할 것은 없었다. 이런 판단들이 눈빛을 통해 오갔고, 마침내 게르트가 결정을 내렸다.
「출발은 언제요?」
「내일 새벽.」 히메네스가 답했다.
「용병들은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죠?」
할덴이 물음에 발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제 전령을 보내 알아본 바로는 인원은 어느 정도 갖춰졌고, 지금은 한창 배회자를 물색하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선봉에 설 사람이 필요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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