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오래된 피(1)
9편. 오래된 피(1)
「이것들은 다 뭐야!」
미친 멧돼지는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발칵 성부터 냈다. 웃통을 훌렁 벗어던진 채여서 반쯤 벌거숭이였는데, 일흔이 넘은 노인의 과하게 투실투실한 몸을 보고 있기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게르트는 점잖게 고개를 돌렸고 에일하드는 소개의 적기를 노리며 눈을 빛냈다.
「말레우스에서 왔답니다.」
그렇게 말한 돈 파올로는 침상에서 옷가지를 주워 얼른 백작의 몸에 둘러 주려 했다. 광저 외르크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저어 물리쳤다. 방금 전투를 마치고 답답한 갑주에서 풀려난 터라 허연 털이 수북한 백작의 거대한 몸집에선 김이 모락모락 솟았다.
「배교자 놈들이 왜 전장에서 기웃거리고 지랄이야! 세풀크룸이랑 척질 일 있어?」
「그 편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에일하드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넌 뭐 하는 자식이길래 붕대를 둘둘 감고 있어?」
성미가 보통 괄괄한 게 아니었다. 강도 남작 라디슬라스가 귀족의 품위란 것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알 만했다. 아르지네 백국을 다스리며 지금은 국왕과 대립하고 있는 광저파의 수장인 외르크는 그야말로 한 마리 야수였다.
「백작님의 꿈자릴 뒤숭숭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겁니다. 여하간 중요한 건······.」
「가만, 저 새끼 문둥이야?」
백작이 거대한 손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여 돈 파올로의 턱을 움켜쥐었다. 조카의 가히 가볍지 않은 몸이 허공에 떠 두 다리가 버둥거렸다.
「내 막사에 문둥일 들여?」
「안 음는다구 흐스······.」
「제가 그랬습니다.」 에일하드가 중재를 시도했다. 「안 옮는다고 했죠. 사실입니다. 백작님과 제가 낭만적인 관계에 돌입하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다.」
백작은 돈 파올로를 지푸라기 인형처럼 집어던졌다. 게르트가 얼른 일어나 돈 파올로의 몸을 받았다. 탁자 위, 백작을 기다리면서 에일하드가 까놓은 술병이 와르르 쏟아져 박살났다.
「세풀크룸은 당분간 손이 묶여 있을 겁니다.」 에일하드가 깨진 술병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희가 그 손을 분질러 버렸거든요.」
「뭐?」
「들으신 대롭니다. 세풀크룸이 자랑하는 사라반다 네그라의 두 개 분대가 우리 손에 뭉개졌습니다.」
에일하드의 말에 백작의 살집 두둑한 얼굴이 불그죽죽해졌다.
「당장 나가, 이 미친놈들아! 세풀크룸을 건드려? 그러고선 내 진영에 기어들어와?」
「고정하세요. 세풀크룸과의 문제는 우리 말레우스가 해결할 겁니다.」
에일하드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실은 희망 사항이었다. 지금쯤이면 사라반다와의 충돌 소식이 세풀크룸과 비예가스 사도에게 모두 도달했을 터, 최근 일로 입김이 강해진 비예가스가 말레우스 수뇌부를 움직여 사태의 조정에 나섰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에일하드는 보고를 올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밑그림도 보탰다. 사라반다의 등장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해방 결사대에 맞추어 연출된 것이었다. 에일하드는 처음에 에르미니아 사도를 의심했으나 하옥된 전직 사도는 완강히 부인했다.
유형으로 형을 감경하는 조건조차 에르미니아의 자백을 얻어내지는 못했으니 이번 일을 사주한 건 다른 인물이라는 뜻이 되었다. 에일하드는 해방 결사대의 움직임과 그 구성을 사라반다에 전할 수 있는, 현지 사정에 밝은 인물이 뒤에 있었으리란 가설로 갈아탔다.
「바티프레도 백작이 사라반다를 움직인 겁니다.」
「그 갈보가?」
아르지네 백작 외르크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에일하드는 백작의 관심을 끌었다는 데에 만족해 슬며시 웃었다. 문제가 복잡해 보일 땐 마법 같은 질문으로 지름길을 열 수 있었다. 이득을 취하는 건 누구인가?
「퀴 보노(cui bono), 혹은 퀴 프로데스트(cui prodest)? 바티프레도 백작은, 혹은 고명하신 인사께서 부르시는 말로 갈보는, 팩토리 잔당을 후견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이 차 정벌 당시 블렌욜프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 흡혈귀 년이 배교자들이랑 어울려서 무슨 이득을 얻는다는 건데?」
「자, 그 전에 사라반다 얘기부터 정리를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요.」 물론 에일하드는 허락을 못 받더라도 준비해 온 말은 다 쏟아낼 위인이었다. 「아룍의 무리들은 배교자 수용소를 습격하며 세를 급격히 불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은 두 개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론 세풀크룸의 사라반다입니다. 블렌욜프가 친절히 선례를 만들어 준 덕분에 바티프레도 백작의 수상한 움직임은 세풀크룸에 포착될 운명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너희들이다, 그 소리야?」
외르크는 이제 침상에 걸터앉았다. 백작이 휙휙 손을 내젓자 돈 파올로가 종종걸음으로 막사를 빠져나갔다. 나갈 때 돈 파올로는 불편한 자리를 함께 피하지 않겠느냔 뜻으로 게르트를 쳐다봤고 게르트는 가만히 고개만 저어 보였다.
「맞습니다!」 탁월한 식견이라는 듯 에일하드가 외쳤다. 「여기서 우리들이란 말레우스와 해방 결사대의 연합군입니다.」
「무슨 결사대?」
「해방 결사대라고 했습니다, 각하. 수용소에 갇힌 배교자들을 구하려는 단체죠.」
「혼란한 틈을 타서 아주 지랄들을 하는군.」
「제 이야기를 계속 따라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 따라갈 게 뭐가 있어? 그래서 그 두 놈을 갖다가 꽝 대가리 박치기 시켰다는 거 아냐? 그다음을 얘기해, 그다음을!」
「예, 그럼 하문하신 사안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룍 떨거지들은 특수 부대처럼 움직입니다. 지금도 백작 각하의 영토를 감히 침노해 휘젓고 다니는 중일 겁니다. 그리고 이를 이미 알고 계신다면 토벌대 조직을 염두에 두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급히 달려온 것은 바로 그 계획을 막고자 함입니다.」
백작은 다혈질적인 인물답게 표정을 읽기도 쉬웠다. 하얗고 굵은 두 눈썹이 꼬리 맞대는 송충이처럼 붙었다.
「왜?」
「배회자들로 이루어진 무리란··· 수챗구멍 같은 겁니다. 비배회자 군대를 집어삼키는 소용돌이죠. 이들에겐 바닥이 없습니다. 병사를 투입하시면 끝없는 싸움, 잃기만 하는 전투에 발을 들이게 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놈 말은 지금 내 마을들을 불태우고 돌아다니는 것들이 옛 팩토리 놈들이다, 그건가?」
에일하드는 게르트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자기 솜씨가 어떠냔 뜻이었다. 아룍이 초토화 작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그리고 백작이 토벌대를 조직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방금 백작의 입에서 확인되지 않았다면 가정에 머물렀을 사실들이었다.
그야 전장에 알레한드라를 보내면 얻을 수 있는 정보였겠으나, 알레한드라는 보고를 위해 바다를 건너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참이었다. 비밀주의적 성향이 강한 에일하드는 징벌관들을 여럿 데려오면서도 말을 옮기는 선전관은 보충하지 않았다.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놈들한텐 백약이 무효하다는 거고?」
「구십구 약이 무효하다고 하겠습니다.」
살에 파묻힌 백작의 눈이 번득였다.
「그럼 하나 남은 처방이란 걸 씨불여 봐.」
대답한 건 잠자코 있던 게르트였다.
「용병단 하나를 고용하고 영지 내에서의 군사 작전을 승인해 주시오.」
「용병단?」 백작이 거대하고 둥글둥글한 머리를 갸웃거렸다. 「길드가 아니라?」
「말레우스는.」 에일하드가 다시 대화를 이어받았다. 「황제 폐하의 의지가 약자의 보호와 악의 구제(驅除)에 머무는 한 그 뜻을 따릅니다. 군사 조직이 아니기에 통치자의 명을 받들지 않습니다. 권력을 향해 절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의 양심으로써 몸을 움직일 뿐입니다.」
「세풀크룸 문제는 해결했다고 장담하더니 이제 와서 뭍의 맹세를 겁내는군.」
「의뢰를 받지 않고 고용을 당하지 않는단 원칙을 말씀드린 겁니다. 블렌욜프의 주구가 된 스틸 암즈 따위와의 차이점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에일하드도 그것이 사문화된 원칙이라는 것을 알았다. 말레우스가 제국의 충실한 개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당장 게르트만 해도 고티아르 고개에서 기병대원들을 구출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던 것이다.
그건 물론 어려움을 당한 이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징벌관의 책임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구제와 사사로운 의뢰 사이에 그어진 경계를 흐리는 계제가 될 위험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 일에 용병을 끼워야 하는 이유가 대관절 뭐야? 아는 곳 하나 알선해 주고 귓돈으로 재미 좀 보겠다는 건가?」
「꼴이 이래도 저, 돈 많습니다.」 에일하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돈이 그냥 모이진 않았을 테니 하는 말이지.」
「쇤베르크 가문의 축재 방식이야 몇 푼 쥐이고 쫓겨난 신세인 저에겐 그들만의 축제겠지만, 그 얘긴 미뤄둡시다. 스물이 채 안 되는 소규모 용병단 들여서 빼먹을 국물도 별로 없고요. 자, 어쨌거나 제가 드리는 처방은 이렇습니다. 아룍 패거리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그러자면 전선에 나가 있는 백작님의 병사들을 재배치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맡은 중책이야 어떻든 배교자 나부랭이로 인식되는 마당이라 대변인 노릇을 해줄 완력이 필요합니다. 백작님 직속의 부대를 넘겨주시면 일의 표면이 더 매끈해지겠습니다만 세풀크룸에 빌미를 던져주게 되니 속은 지저분하게 곪을 테죠.」
설명이 길어지자 백작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요점을 말해!」
「요는 완충하는 회색 지대가 필요하단 겁니다. 백작님의 명을 받지만 직속은 아닌, 우리와 함께하지만 배회자는 아닌, 세풀크룸이 나서면 〈머릿수 부족한 곳 찾아다니며 전투 보조하라고 임시로 고용한 것들이 떠돌이 배회자 무리랑 작당해서 붙어먹은 걸 어쩌겠느냐〉라고 발뺌할 수 있는 용병단이 필요하단 얘기죠.」
「세풀크룸은 그런 어쭙잖은 변명에도 홀딱 넘어가 주는 어리보기들이고?」
「변명이라도 있는 것과 변명조차 없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백작님.」
「연기나 뿜어대는 광대 놈이 누굴 가르치려 들어!」
백작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에일하드는 여유로웠다. 이쯤에서 터져주는 큰소리는 상대가 주도권을 포기하고 그 환상을 취하는 편을 택했다는 뜻이었다. 에일하드가 마지막으로 박아 넣을 쐐기를 궁리하던 차에 막사의 장막이 걷히고 돈 파올로가 다시 등장했다.
「백부님!」
「뭔데 소란이야?」
돈 파올로는 달덩이 같은 얼굴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백작에게 다가붙었다. 그러고는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닥거렸다. 에일하드는 백작의 표정을 보며 자신의 손에 쐐기가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척후는? 전령은? 그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어째서 본대에 파발을 보내지 않았느냔 말이야!」
「아룍이 한 짓입니다.」 에일하드가 대신 답했다. 「백작님의 척후를 잡아먹고 도호파에게 빈틈을 열어준 거죠.」
에일하드는 힘 있고 진중한 목소리를 빌릴 요량으로 게르트 쪽을 쳐다봤다. 게르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고 자신의 대사를 읊었다.
「배회자를 잡는 덴 배회자가 필요하오.」
*
아르파드는 풀밭에 앉은 채로 아르지네 백국의 병사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상자들이 들것에 실려 고깃덩이처럼 날라지고, 대가 부러지거나 날이 상한 병장기들이 수레에 실려 간이 대장간에 쏟아졌다.
구세계를 끝장낸 건 전쟁이었다. 잔세계는 그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하나의 세계가 끝난 다음에도 여전히 세계는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온 세상을 뒤덮을 불길을 만들어 내기엔 아직 잔세계의 기술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그때까진 안심하고 패를 지어 벌이는 살육을 즐길 것이었다. 인간은 이 취미를 그만두지 못할 테고, 매 전쟁은 이전의 전쟁보다 더 비참할 테니 종말을 향한 걸음은 더디지만 분명한 것이었다.
「아잇, 제기랄, 그만 좀 해, 도리!」
도르카가 깔깔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르파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몸 안을 돌아다니는 생물을 잡았다. 배가 통통한 메뚜기였다. 좀 전부터 도르카는 풀벌레를 잡아 아르파드의 옷 속에 집어넣는 데 열심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비.」 도르카가 대뜸 말했다. 「안 와? 다쳐서?」
「너도 그때 봤잖아. 하루 이틀 치료해서 될 게 아니었다니까.」
「루비?」
「같이 치료 받으러 갔다고 했잖아.」 아르파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얼굴은 다 기억 나냐?」
「하비 여기 점 있어.」 도르카가 아르파드의 아래턱을 쿡 찔렀다.
「점이 아니라 사마귀였어.」
「였어? 왜?」
「뭐가 왜야?」
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대화가 끊어졌다. 아르파드는 치통 앓는 사람처럼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그와 도르카가 무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온 데엔 이유가 있었다.
「아르파드?」
아르파드는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징벌관 데빈이었다. 또 다른 징벌관인 샤흐드도 함께였다.
「그래, 그게 내 이름인데, 왜?」
「하비에라, 발렌티나.」 데빈이 이름 두 개를 던졌다. 「어때, 낯익은 이름인가?」
이들이 오는 내내 말 한 번 안 걸다가 지금에야 이러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에일하드와 게르트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르파드가 잇새로 침을 뱉었다. 아이메릭이 용병단을 데리러가는 길에 동행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아니, 좆도 모르겠는 이름인데.」
「아새끼이 입이 그리 걸문 되니?」 샤흐드는 짙은 남방 사투리를 썼다. 「기카구 다 느 짝지들이가 한 거 아이니? 알문사 어찌 그러니?」
「이봐, 우린 아룍의 부표가 어디 있는지 들었을 뿐이야. 아룍한테 다시 쥐여주면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겠다고 믿었던 것뿐이고. 알아, 엄청나게 멍청한 소리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당신네 길드 사람이 찾아와서 먼저 운을 띄웠고, 난 다시 확인해야 했어. 대세륜의 밤에 내가 본 게 진짜였는지 확인해야 했단 말이야.」
「넌 징벌관 둘을 죽이는 데 가담했다.」 데빈의 목소리엔 술기운이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나?」
도르카가 아르파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르파드는 몸을 일으켰지만 도르카의 요청대로 자리를 피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내 손에도 피가 묻었지. 피를 피로 씻겠다면 얼마든지 해봐라.」
「어찌 그리 당당하니? 사람으 죽이구서 그렁 눈으 뜨니?」
샤흐드가 손을 뻗었다. 아르파드는 걷어치우려 팔을 내저었다. 그러나 팔에 닿는 감각은 묵직한 쇠의 그것이었다. 샤흐드의 오른손이 아르파드의 어깨에 턱 얹어졌다. 그다음은 내리누르는 감각이었다. 돌덩이에 어깨가 짓눌린 듯, 아르파드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장제사와 달리 우린 빚을 잊지 않는다, 전직 징벌관.」
데빈의 양손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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