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검은 종이 울리고(10)
14편. 검은 종이 울리고(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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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어스름 속에서 남문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알레한드라는 사도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섞어 보내는 것을 눈치 챘다. 다행히 아직 성내로 진입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곧 진입할 태세였다.
비예가스는 루슬라나가 건네준 수통을 받아 들고 목울대를 들썩거리며 꿀꺽꿀꺽 요란하게 반쯤 비웠다. 그러고는 소매로 입가를 훔치고 여전히 씩씩거리며 눈으로는 영세자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집요하게 찾았다.
「같이 움직이셔야 합니다.」
목표를 포착하고 황소처럼 돌진하려는 비예가스의 손목을 알레한드라가 얼른 붙들었다. 루슬라나가 짜증난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알레한드라는 눈총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즉흥적인 무리입니다. 사도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작전 자체가 좌초됩니다.」
「저까짓 것들, 루시 하나면 충분해. 정 걱정되거든 자네도 따라오든가.」
비예가스는 알레한드라의 손을 뿌리치고 상체를 앞으로 잔뜩 숙인 채 성큼성큼 상대를 향해 다가갔다. 알레한드라도 잰걸음으로 사도와 루슬라나의 뒤를 쫓았다. 길드원들이 걱정스럽게 뒤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멈추시오! 멈춰! 멈추라고, 이 불한당들아! 내 말 안 들려?」
비예가스의 고함이 향한 곳엔 세 명의 영세자들이 서 있었다. 알레한드라는 그들이 은수자 휘하의 지휘관들인 발이 부르튼 자, 길을 헤매는 자, 그리고 헤엄치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의 누렇게 때가 탄 옷은 평신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그 위에 별 모양의 표지를 그린 누더기 망토를 둘러 구별되었다.
「우리가 앞서 길을 열 테니 뒤를 받치기만 하시오.」
영세자들의 틈을 비집고 그들에게로 도달하자 헤엄치는 자가 말했다. 알레한드라는 눈으로 슬라벡을 찾다가 영세자들의 성내 진입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슬라벡과 무자치가 성문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무자치는 은수자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인질을 잡은 듯한 모양새였다.
「헛소리는 집어치워!」 비예가스가 발칵 역정을 냈다. 「네놈들은 바다 위에 내리는 눈처럼 녹아날 거다, 이 철없는 망나니들아!」
「죄인들의 우두머리가 공을 독차지하지 못해 안달이 났군.」 발이 부르튼 자가 비예가스의 발치에 침을 뱉었다.
「루시.」
비예가스의 호명에 루슬라나가 발이 부르튼 자를 향해 성큼 다가붙었다. 알레한드라는 이미 호의적이지 않던 기류가 순식간에 적대적으로 돌변하는 것을 느꼈다. 불타는 성문을 홀린 듯 지켜보고 있던 주위의 영세자들이 이제는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리를 막게.」
루슬라나가 오른발을 높이 들었다가 바닥을 내리찍자 흙먼지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알레한드라는 몸을 스쳐가는 바람을 느꼈다. 곧 귀가 먹먹해지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소리가 차단되었다. 소리가 통과하지 못하는 투명 격벽을 생성하는 〈밀화 반구〉였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고 잔뜩 긴장해 예의 주시하고 있던 주변의 영세자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소리가 차단된 것을 눈치 챈 몇은 반경 안으로 시험 삼아 발을 들이밀려 했으나 루슬라나가 곧바로 다가가 어깨를 떠밀자 뒤로 물러났다.
「지금 당장 다섯 개 중대로 재편하시오.」 비예가스가 한 마디마다 힘을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세 개 성문을 통해 동시에 진입할 거요. 남문과 서문으로는 각 두 중대가······.」
「당신들은 당신들 일을 하시오.」 헤엄치는 자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 테니. 영세자들은 죄인들의 지휘를 받지 않소.」
「그대들은 은수자의 명을 따라야 하는 거 아니오? 난 이미 은수자와 논의를 마쳤소.」
길을 헤매는 자가 코웃음을 쳤다. 「저 괴상한 눈알의 이교도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탕녀가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은 은수자 말이오? 설마하니 우리가 저놈들 손에 놀아나는 줄 알았소? 지원군이 온다기에 기다려 준 것뿐이지. 그 지원군이란 걸 배 나온 중늙은이가 이끈단 사실을 미리 알았으면 이렇게 시간 낭비도 안 했을 거요.」
「우리가 저 두 연놈을 정죄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아시오.」
발이 부르튼 자가 슬라벡과 무자치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벨루스 성내에선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알레한드라는 성첩 사이로 빼꼼 머리를 내밀고 이쪽을 염탐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비예가스는 세 지휘관들의 면면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당신들의 최종 입장이오?」
「최초 입장이기도 하지.」 헤엄치는 자가 대꾸했다. 「당신네 부하 둘이 은수자님을 저렇게 만들어 놨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으니.」
「알겠소.」 비예가스는 고개를 돌려 알레한드라를 쳐다봤다. 「알리.」
「예, 사도님.」
「아가차 라 카베사.」
「께?」
알레한드라는 루슬라나의 몸동작을 보고 곧바로 사도의 지시를 따랐다. 즉, 머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할버드의 날이 위를 스쳐 지나갔다. 알레한드라는 꽁지머리의 끝부분이 서걱 잘려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세 개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그다음이었다.
당혹감이 알레한드라를 휘어잡아 그녀는 숙인 머리를 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투를 앞두고 동맹군 지휘관들을 죽여? 그것도 진영 한복판에서? 이 양반이 드디어 실성한 건가?
「영세자들은 내 말을 들어라!」
비예가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표류물을 통해 음성을 증폭시킨 것이었다. 루슬라나는 이미 밀화 반구를 거두고 방금 사용한 〈범고래 작살〉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 알레한드라는 그녀가 할버드를 불러오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비단 머리를 숙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루슬라나는 표류물이 형성되는 중에 이미 그걸 휘두르고 있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좌표로 정확히 범고래 작살의 남은 부위를 재구하는, 귀신같은 솜씨로 지휘관들이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목 세 개를 깨끗하게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대들의 지휘관은 가망 없는 돌격으로 이 전쟁을 순교의 장으로 삼으려 했다! 이들이 옳았다고 생각하는 자, 지금 내 앞으로 와라! 순교의 영예를 하사할 테니! 그러나 이 싸움에서 진정 이기려는 자, 그리하여 적을 꺾으려는 자, 순교와 개죽음을 혼동하지 않는 자, 내 지휘를 따르라!」
영세자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자기들의 지휘관을 일거에 죽여 버릴 것을 명한 이가 서둘러 진영을 떠나는 대신 그 한복판에서 당당히 연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레한드라는 영세자들의 몰매에 맞아 죽지 않은 것은 비예가스의 저 뻔뻔함 덕임을 알았다.
「이들은 그대들의 피가 본대의 양탄자가 되리라 지껄였다!」 비예가스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는 지휘관들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대들이 들을 수 없는 것을 알자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다! 이자들은 오늘 그대들이 여기서 모두 죽더라도 동쪽에서 본대가 와 피의 복수를 해주리라 여겼다! 가당키나 한가? 내가 그대들에게 약속하는 것은 죽음이 아닌 승리다!」
비예가스가 고개를 돌려 망치꾼들을 향해 시선을 보내자 클뢰크너가 그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다섯 갈래로 나뉜 망치꾼들이 건초를 가르는 쇠스랑처럼 영세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비예가스가 손짓으로 클뢰크너와 게르트를 가까이 불렀다.
「마누엘라, 자네는 에르네스트와 함께 서문으로 가게. 게르트, 북문으로. 신호와 함께 돌입하세.」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클뢰크너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통들을 보며 말했다. 비예가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암, 지복이 우릴 기다리고 있지. 남의 군대를 데리고 전쟁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집결지는 성 페란테 성당일세. 거기서 보세나.」
「가스파르.」
「게르트.」
서로의 이름을 불렀던 둘은 그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알레한드라는 두 남자가 작별을 예감하고 있음을 알았다. 게르트가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걸어온 그들이었으나 이제는 다른 길을 같이 걸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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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이야.」 할덴이 말했다. 「위험하거든 소리를 지를게. 티라, 나 좀 살려줘, 이렇게. 그럼 달려와 줄래?」
「그럴게요.」 티라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럴게요. 할덴도 엄청 크게 소리 질러줘요.」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열 받기도 하네.」 바스티안이 툴툴거렸다. 「원랜 내 자리였어. 알지? 아룍을 쫓을 때 길드가 그렇게 짝지어 줬다고. 그런데 이제 꼬맹이 네가 옆을 차지하다니.」
「바크가 일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그랬겠죠.」
「어유, 이 쥐방울만한 녀석.」 바스티안이 티라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어쨌든 우린 단죄자랑 함께하고 넌 장제사랑 함께하니 서로 걱정할 일은 없겠다. 안 그래?」
「맞아요. 아무것도 걱정할 일··· 없어요···.」
에르네스트와 프리다가 다가왔다. 에르네스트는 미소 비슷한 것을 얼굴 위에 띄워 보려고 애쓰는 중이었고 프리다는 날이 잔뜩 서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걸어오면서도 여전히 미덥지 않다는 듯 통솔해 세워놓은 영세자들 쪽을 흘겼다. 그들이 바로 클뢰크너의 〈서캐 중대〉와 함께 서문을 통과할 〈우박 중대〉였다.
「티라,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구나.」
「언제나 그랬죠.」 티라가 에르네스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어니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너무나 짧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오늘 우리가 이기면······.」
「그래, 우린 영원의 문턱에 서 있는 거야.」
「이리 와, 티라. 나도 좀 안아보자.」
프리다를 안을 때, 티라는 그녀가, 언제나 굳세고 또 언제나 망설임 없던 그녀가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티라는 눈물이 치솟을 것 같아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두 개의 치열하고, 그래서 한없이 고요한 박동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이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리라.
「티라.」
게르트의 목소리였다. 티라는 프리다를 놓아주고 그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됐다. 가자.」
「젠장, 다 모여 봐요!」 바스티안이 돌연 외쳤다. 「이리 와 보라니까요!」
곧 게르트와 할덴, 프리다와 에르네스트, 티라와 바스티안이 한자리에 둥글게 모여 섰다. 어깨동무를 하기 위해, 그리고 높이가 맞지 않는 한 명 탓에, 모두 잔뜩 자세를 낮춰야 했다.
「게르트, 뭐라고 좀 해봐요.」
일단 모으기는 했으나 다음을 생각하지 않았던 듯 바스티안이 보챘다. 게르트는 마른 입술을 핥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구시가지를 장악한 뒤 성당으로······.」
「아니, 그런 거 말고요!」
「다시 봅시다.」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아무것도 우릴 갈라놓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다시 보게 될 거고요.」
「신도 악마도 우릴 흩어놓지 못해요.」 할덴이 말했다. 「우린 이제 알고 있잖아요. 우리가 몇 번이나 흩어졌다가 또 몇 번이나 다시 모였는지. 이번에도 똑같아요.」
「말 잘했어.」 프리다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외쳐 봅시다. 아무것도 우릴 갈라놓지 못한다고!」
바스티안이 자신만만하게 외쳤지만 곧 그가 마주한 것은 자신을 포함한 여섯 사람의 엉성한 주절거림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려다 어깨동무 탓에 실패한 바스티안이 곧 자인했다.
「더럽게 입에 안 붙네.」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프리다가 빈정거렸다.
「우리라고 해줄래?」
「영원히라는 말이 들어갔어야 했던 것 같아.」 할덴이 의견을 보탰다.
「그래? 그럼 더 길어지는데 그게 어떻게 개선이지?」
「일시적으로는 갈라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는 뜻이니까······.」
그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선 세 번, 그치는가 싶더니 계속 이어졌다. 타종하는 이의 솜씨가 서툴러 소리는 뒤로 갈수록 뭉개졌다. 약속된 신호가 아니었다. 티라는 그것이 도시 중앙에 있다는 성 페란테 성당에서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들 역시 집결하고 있었다.
「갈 때가 됐네요.」 티라가 말했다. 「이따 봐요, 안녕!」
티라는 남은 넷에게 차례로 손을 흔들고 게르트를 따라갔다. 프리다가 바스티안을 놀려먹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구호로는 저게 더 낫다.」
「닥쳐.」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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