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바람을 타고 태양을 향해(완)
에필로그. 바람을 타고 태양을 향해(완)
*
클라우스는 안대를 쓴 남자에게 쫓기고 있었다.
이 외눈의 남자는 최악의 미행자였다. 우선 인상부터 도저히 주변 배경과 섞여 들지 않았다. 안대는 너무나 눈에 띄는 소품이었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흉터들이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쫓기는 입장에서 분하게도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돌아서서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상관이 누구냐고, 첩보를 누구에게서 배웠기에 그따위 엉성한 수작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이는 거냐고. 그러나 그러기엔 미행자가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도 살벌했다.
특히 그의 손이 클라우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남자의 두 손은 그가 설정해 둔 간격에 무언가가 들어서는 순간 잡아채 으스러뜨릴 준비라도 된 듯 갈고리처럼 부자연스럽게 굽어진 채 경직되어 있었다.
그 사실이 다시 한 번 클라우스로 하여금 부아가 치밀게 만들었다. 지난 오 년간 그가 아는 모든 것들, 그 가운데 특히 이 바닥은 품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살의도 감추지 못하는 저런 얼치기들이 난무하는 놀이판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클라우스는 이런 세계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그가 공들여 짜놓은 정보망이 대어를 쉬지 않고 잡아들이던 시절이었다면, 타우리스 왕국에서 빌드리드 왕의 권좌를 지켜낼 수 있었을 터였다. 그가 직접 포섭한 정보원들, 그리고 언제라도 손을 빌려주던 친위대와 스틸 암즈가 굳건했더라면 말레우스의 음모를 사전에 분쇄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던 세계는 사라졌다. 그림자 강의 증발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빌드리드는 반역자들의 처형을 직접 주관하겠다는 고집을 부린 끝에 신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가슴 한가운데를 저격당해 고꾸라졌고, 탄생부터 위태롭기 그지없었던 왕국은 그렇게 화살 한 대와 함께 역사의 하수구 속으로 말려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클뢰크너의 말레우스와 카사쿠에스타 백작 카르바얄의 부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왕궁을 장악해 버리자 클라우스는 탈출 작전을 짜는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본국에 있는 그의 상관 크로넨베르크와는 연락이 끊겨 버린 데다가, 쿠데타의 주역들이 구체제의 찌꺼기를 처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판국이었으니 탈출구는 클라우스 혼자서만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아지고 말았다.
다만 이런 상황에 대해서 클라우스는 자신 같은 거물이 시선을 돌려주는 틈에 부하들이 보다 수월하게 몸을 내뺄 수 있을 거라고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 예로 바로 지금도 저 백정 같은 놈을 달고 다니며 시간을 끌어주고 있지 않은가? 클라우스는 골목으로 황급히 방향을 튼 뒤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거리를 살폈다.
외눈의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했을 때 클라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 같은 초짜가 나를 상대하다간 이렇게 되는 거다. 이제 돌아가서 네 상관한테 제대로 미행하는 법이나 가르쳐 달라고 해라.
「대위?」
클라우스는 화들짝 놀라 지팡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돌아본 곳, 골목의 으슥한 응달로부터 모자를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클라우스는 비로소 자신이 몰이사냥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샌 클라우스라고 불리는 모양이더군, 하우어 대위. 어느 쪽도 본명은 아니겠지만. 아니, 너 같은 놈한테 본명이 있기나 한가?」
클라우스, 아니 하우어 대위는 자신이 외눈의 미행자를 따돌렸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미행자의 동료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본명이야 낳아주신 어머니만 알고 계시면 됐지.」
대위는 그렇게 말하며 지팡이를 고쳐 쥐고 사내와 마주섰다. 사내의 정체에 대해서라면 대위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바닥 생리에는 너도 익숙할 텐데, 선원.」
대위 역시 사내의 오래된 별명을 불렀다. 바스티안 바크하우젠. 말레우스의 심문관이자 타우리스 왕국에서 대위의 첩보원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남자였다. 대위의 말에 바스티안이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곧 죽어 나자빠질 놈이 주둥이 놀리는 꼬락서니하고는.」
「오기 전에 죽을 자리를 봐뒀는데······.」
대위는 지팡이칼을 뽑아 들고 바스티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긴 아냐!」
다음 순간 대위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손목과 무릎을 찌르는 격통 때문에 정신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솜씨 좋게 꽂힌 단검 두 자루의 손잡이가 들어왔다. 대위는 지팡이칼을 휘두르지도, 일어서지도 못했다.
누군가 뒤에서 지팡이칼을 빼앗아 내던져 버리고 대위의 목덜미를 움켜쥔 것이었다.
「아니, 제대로 찾아왔어.」
바스티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위는 적어도 최후의 적수로서 그를 마주보려 했으나 목덜미를 쥔 이는 그런 품위 있는 대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룍과 손을 잡은 순간부터 세상 모든 곳이 네놈 죽을 자리가 됐거든.」
대위는 우두둑, 하고 자신의 목뼈가 꺾이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창밖으로 요강을 비웠는지 오물로 질척거리는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대위는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크로넨베르크는?」
「무자치가 제거했다. 함께 들어온 소식이 있다.」
「뭐지?」
「처리는 내가 할 테니 넌 모드아펠로 돌아가라.」
「왜?」
바스티안의 물음에 미행자가 대답할 때쯤 대위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단죄자가 위독하다.」
*
티라는 게르트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를 껴안기 직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자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오른팔, 게르트의 오른팔이 팔꿈치 아래에서 끊어져 있었다.
티라가 아는 가장 위대한 검객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이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잃어버린 팔을 수복할 방법은 그림자 강과 함께 영영 사라져 버렸다.
「괜찮다.」
게르트가 티라의 어깨에 왼손을 얹었다.
「어차피 은퇴할 생각이었어.」
티라는 게르트를 와락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제가 될게요. 제가 아저씨의 뒤를 이어서 최고의 검객이 되겠어요.」
「그럴 필요 없다. 티라, 두 번째 기회야. 그러니······.」
게르트의 지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타닥거리는 소음이 게르트의 뒷말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
티라는 언젠가 성지에서 하늘나라를 운운하던 자신에게 게르트가 그런 건 없다며 호통을 치던 때를 떠올렸다. 아저씨가 틀렸어요. 천국은 몰라도 지옥은 확실히 있어요. 꼼짝도 못 하게 묶여서 산 채로 삶아지는 곳이죠.
티라는 곧 자신의 몸을 둘둘 감고 있는 것이 수 겹의 이불이라는 사실과, 꿈속을 뒤덮은 타닥거리는 소리가 벽난로 속 장작이 내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체액이 이불 밖으로 나온 얼굴에 쏠린 듯, 머리는 무겁고 몸은 텅 비어버린 것처럼 가벼웠다.
이 무식한 난방 가운데서도 오한이 가시 공처럼 빈 몸속을 떠돌며 사지 말단을 쉼 없이 찔러댔다. 바짝 마른 입안에 불쾌한 맛이 감돌았다. 대체 누구야. 의식 없는 사람한테 이딴 걸 먹인 게. 불평 못 한다고 요리를 이따위로······.
어쩌면 이것이 죽기 전 마지막 생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티라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가 실패했다. 정수리를 정으로 내리친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몸을 관통했던 것이다. 간신히 정신을 붙들자 고통은 옆구리 쪽으로 모아졌다. 베일의 검이 깊게 헤집어 놓은 자리였다.
「물 좀··· 그리고 이불······.」
졸고 있던 프리다가 미음이 담긴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가 간신히 붙잡았다. 프리다는 자신을 깨운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얼른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티라와 눈이 마주쳤다. 티라는 프리다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누워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이제 만족해? 이 고집불통아!」
프리다가 번쩍 들어 올린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침대를 내리쳤다. 티라는 전해진 진동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인간 죽이느라 죽을 뻔하니까 속이 시원하디?」
「그 얘긴 나중에······. 지금은 목말라 죽을 것 같아요.」
「이런 뻔뻔함이라니, 넌 정말 우리한테서 제일 못된 것만 골라서 배웠어.」
프리다가 물병을 가져오려 나갔을 때 티라는 이불을 좀 느슨하게 해달라는 주문을 잊고 말았단 걸 깨달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꿈틀거려 팔을 빼내는 데 성공한 다음 티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탁자 위, 미음이 담긴 그릇을 멀찍이 밀어놓는 것이었다.
프리다는 혼자 돌아오지 않았다. 티라는 함께 병문안을 온 손님이 한숨을 내쉬고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을 보았다. 오래된 버릇이었다.
「못 물어봤어요.」
손님은 프리다에게서 물병을 건네받고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물병의 마개를 뽑는 데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기다림 끝에 마시게 된 물은 감로처럼 달았다.
「뭘 말이냐?」
손님은 그렇게 물으며 의수를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수건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멀쩡한 손으로 티라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난 건지. 할덴이 실수한 건 아니잖아요. 둘 중 하나라고 했는데, 아저씨였으니까요. 게다가 가슴을 맞혔을 때 살아났으니 머리를 같이 쐈어요. 어니가 제대로 한 줄 알았는데······.」
「글쎄다.」 손님이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에 든 게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티라는 이번에도 웃으려다 고통 때문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프리다가 다가와 상체를 일으키는 걸 도와주었다. 티라는 거친 숨이 잦아들고 고통이 가실 때까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눈밭 위에 쓰러져 되새겼던 이의 얼굴을, 마치 선물을 풀어보는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게르트.」
*
숨을 쉴 때마다 송곳으로 후비는 듯한 고통이 마침내 잠잠해졌을 때쯤 티라는 에르네스트와 프리다가 보금자리를 마련해 둔 모드아펠의 크루즈델페로로 병상을 옮겼다. 티라가 생각하기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둘은 길드 일도 내팽개쳐 두고 그녀를 간호했고, 결국 봄이 돌아왔을 때 티라는 지겨운 병상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할 수 있어요. 예전에 게르트가 그래도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네가 다치기 전이었겠지.」
에르네스트가 살대 끄트머리에 줄로 홈을 새기면서 대꾸했다. 티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잘라놓은 깃털들을 사방에 흩어 버리고 말았다. 에르네스트가 화살 만드는 일을 돕는 건 티라가 거드는 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소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게르트가 그렇게 말한 건 네가 길드 일을 그만두길 바랐기 때문일 거야. 넌 몸이 다 나으면 다시 길드로 복귀할 생각이잖니?」
「내가 왜 그만둬요? 자기 별명 뺏긴 사람도 계속하는데.」
「난 사무직이야.」
「그렇겠죠. 이 화살들은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태려는 거고, 여왕은 어떤 운 좋은 궁수가 쏜 화살에 맞아 죽은 것뿐이죠.」
에르네스트가 살대와 줄을 내려놓았다.
「티라.」
「네.」
「무슨 일이든 책임감을 갖고 하려는 게 아니라면,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아. 게르트를 도와 검술 사범으로 일할 거라면 네가 거기에 전념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해.」
티라는 입술을 샐쭉거려 봤지만 어느 모로 보나 에르네스트의 말이 맞는단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좀 더 생각해 볼게요.」
둘 사이의 정적을 깬 건 반가운 이의 방문이었다. 티라가 문을 열자 방문객은 식료품이 담긴 바구니를 떠넘긴 다음 거의 제 집처럼 거침없이 굴면서 티라가 앉아 있던 의자를 차지하고 다리를 꼬았다.
「심문관님, 공사다망하신 줄로 아옵니다만?」
「그러는 넌 병상에 달라붙은 병약한 아가씨인 줄 알았더니.」
바스티안이 모자를 벗어 탁자에 내려놓자 티라가 모아 놓았던 깃털들이 다시 사방으로 흩날렸다.
「용케 시간을 냈네.」 에르네스트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내가 쉬겠다는데 자기들이 어쩔 거야. 티라, 얼른 물 끓여. 식사부터 해치우고 나가서 자리 잡자.」
「극단이 벌써 왔어요?」
「오기야 꼭두새벽에 왔지. 천막 세워 놓은 거 보니까 대충 준비가 끝난 것 같아.」
「밥 먹고 가면 늦지 않겠어요?」
「그러니 후딱 먹자는 거잖아.」
「물은 얼마나 올려요?」
「어디 보자. 다섯 사람 먹을 만큼.」
「그게 어느 정돈데요?」
티라의 예상대로 바스티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어놓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 집안사람들은 어떻게 된 게 문명의 기초라는 요리를 할 줄 모르는 거야?」
「요리가 문명의 기초였다고?」 에르네스트가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듯 반문했다.
「발화법의 발명! 화식의 시작! 응? 소화가 용이해지고, 하여튼, 저 뭐··· 문명의 탄생!」
바스티안은 그렇게 되는대로 주워섬기면서 티라가 대령한 수반에 손을 씻은 뒤 본격적으로 문명을 탄생시키기 시작했다. 프리다와 게르트가 도착했을 때는 식사 준비가 끝나가고 화제는 다른 지방의 축제로 넘어간 참이었다.
「성지에서는 고양이들을 우리에 가둬 놓고 태운다던데.」
「고양이를 왜 태워요?」 바스티안의 말에 티라가 경악해서 물었다.
「그게 마녀들 비명 소리랑 비슷하다나 뭐라나.」
「마녀들 비명 소리가 대체 어떤데요?」
「고양이 타는 소리랑 비슷하겠지, 뭐.」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들을 하고 있어?」
프리다가 둘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그녀는 접시를 옮기는 에르네스트의 볼에 입을 맞추고, 토하는 시늉을 하고 있는 티라와 바스티안을 향해 손가락 욕을 날려준 다음, 도움을 극구 사양하는 게르트를 위해 의자를 당겨 주었다.
모두가 착석하고 식기를 집어 들었지만 어째선지 식사는 시작되지 않았다. 게르트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 있었던 것이다. 바스티안이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시라는 뜻으로 헛기침을 하자, 마침내 게르트가 입을 열었다.
「고양이 요리는 아니겠지, 바크.」
바스티안이 한숨을 푹 내쉬고 티라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재미없어요, 아저씨.」
「애들 가르치시더니 유머 감각이 아주 일취월장이십니다. 나도 가서 좀 배워야겠네.」
그러나 이 농담이 마음에 든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는 모양이었다. 티라는 개가 헐떡이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숨이 넘어가도록 웃고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게 되었다. 프리다조차도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요리와 문명에 대한 바스티안의 견해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을 만큼 흡족한 식사를 마친 뒤 보러 간 극단의 공연은 실망 그 자체였다. 곡예사들은 관절염을 앓는 것처럼 보였고, 배우들은 대사를 더듬거렸으며 무대 장치에도 관절염이 옮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구경거리는 부족하지 않았다. 관객 가운데 하나가 출연진들 속에서 달아난 남편을 찾아 지목한 것이었다. 이 무책임한 남편은 단장을 향해 〈이래서 내가 여기선 안 한다고 했잖아요〉를 외치고 막 뒤로 숨으려고 했고,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관객들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무대 위로 난입했다.
식사 때문에 늦어서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일행은 천막이 무너져 문자 그대로 막을 내리게 될 때까지 느긋하게 난장판을 구경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마이비와 도르카가 독한 술을 들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엉망이 된 일행의 행색을 보고 한참을 낄낄거렸는데, 도무지 멈추지 않는 웃음에는 발치에 놓인 빈 병 두 개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싶었다.
늦은 저녁과 더 늦은 술자리의 결과로 모두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곯아떨어져 있는 동안, 는개처럼 가늘고 보드라운 봄비가 내려 세상의 얼굴을 말갛게 닦아 놓았다.
*
「오래전에 꾼 뒤로 나를 계속 쫓는 꿈이 있어.」
티라는 에르네스트에게 다가가 마주앉았다. 창가에 앉은 에르네스트의 얼굴은 이제 막 밝아오는 새벽의 위태롭고 가냘픈 재색 빛에 휘감겨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살가죽을 벗어 거대한 무덤을 쌓아 올리는 꿈이었지.」
「아주 괴상한 꿈인데요. 해몽은···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요.」
「나도 그 행렬 속에 있었어.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바닥에 드러누운 바스티안이 코를 고는 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왔다.
「그래서 어니도 그렇게 했나요? 다른 사람들처럼?」
「아니. 차례가 돌았을 때 내가 바쳐야 할 건 내 살가죽이 아니었어. 품에 안은 아이였지.」
창문으로 찬바람이 흘러들어 와 티라는 두르고 있던 담요를 여몄다.
「언제 꾼 꿈이에요?」
「너와 베일을 처음 만났던 날 밤.」
「뒤숭숭할 만했겠는데요.」
에르네스트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죄과를 고백하듯 다음 말을 내려놓았다.
「난 달아났어.」
「아이는요?」
「품에 계속 안고 있었지.」
「그럼 된 거예요. 저는 그 아이가······ 아주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에르네스트가 옅게 미소 지었다.
「달아나면서 사람들의 아우성을 들었어. 그리고 난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도 알고 있었지. 신을 만들려고 했던 거야. 무너진 세계에서 섬길 새로운 신을. 그 사람들은 야만을 끝내고 싶어 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조의 신을 만들려고 한 거였지만, 베일이 그들 옆에 있었지. 처음부터. 마치 그 사람들의 떼어놓을 수 없는 형제처럼, 혹은 신의 그림자처럼. 나는 그때 신을 버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서 버렸나요?」
「아니, 그러지 못했지, 적어도 한동안은. 두려웠어. 절대성을 잃는다는 게. 선악이 한낱 인간의 잣대로 말미암아 나뉜다는 걸 인정하기가 죽기보다 두려웠지.」
「그 너머에 있는 걸 봤나요?」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들어 티라를 바라보았다. 티라는 자신의 얼굴 위로 떠나간 이들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에르네스트의 아린 눈동자가 쫓고 있는 것 또한 그들의 얼굴이란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티라는 자신의 안에서 말을 이어가도록 밀어주는 힘을 느꼈다. 이야기의 귀재였던 한 사내가 남긴 힘이었을까.
「저는 봤어요. 잠깐이었지만. 마지막 순간 나는···」 티라는 자신의 콧등에 횡으로 새겨진 흉터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그곳에조차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봤죠. 그건······.」
티라는 적당한 말을 찾으려 미간을 찌푸리고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윽고 이 시도에 대해 썩 나쁘지 않은 보상이 주어졌을 때, 티라는 어쩐지 그것이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은 사금파리처럼 잘고 하잘것없는 몸짓들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세계에 대한 자아의 승리였어요.」
「네 세계의 승리였구나.」
「그랬을 거예요.」
에르네스트는 마주 미소를 짓고는 그의 오래된 꿈이,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세계가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한 그의 답변들을, 저기 취해서 침을 흘리고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해답들을 하나씩, 하나씩, 하나도 부주의하게 놓치는 일이 없도록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결론지었다.
「삶이란 어찌나 아름다운 낭비인지.」†
『피에 관한 묵상』 마침.
- 작가의말
†“Life is such a wonderful waste of time(삶이란 참으로 멋진 시간 낭비야).” - Silent Poets의 〈Almost Nothing〉.
그간 『피에 관한 묵상』을 읽어 주셔서, 그리고 이 세계를 사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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