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과거의 눈물은 현재의 비가되어(2)

어둠 속에서 진을 치고 있던 군대 가장 앞에 서 있던 피안의 동생은 금색 수가 놓인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때 검은 망토와 두건을 쓰고 있던 무리들 중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다.
“오랜만이구나.”
검은 두건을 벗자 얼굴이 드러났다. 피안이었다. 그는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정말로 이게 최선입니까?”
어느새 중년에 접어든 피안의 동생이 물었다.
“최선이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다.”
“저들이 도대체 뭐길래 한나라의 아바의 자리를 버리면서까지 죄인이 되어 이렇게 도망 다니는 겁니까?”
“저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피안이 차분하게 말했다.
“”저들은 이교도들입니다! 어째서 이교도들과 같이 어울린다는 겁니까?“
“이들이 이렇게 변한 건 우리 때문이야. 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살아갈 길을 찾은 것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들이 하는 행동이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저들은 그저 지옥 같은 이곳을 벗어나려는 것뿐이다.”
“벗어난다고요? 그래서 그런 현실에서 벗어난 이상한 세계를 만드는 겁니까?”
“...”
피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형님! 제발 동생으로서 이렇게 부탁드리고 빌겠습니다. 다시 돌아오세요.”
동생은 간절한 말투로 말했지만, 피안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안 된다. 너도 내가 그러지 않을 걸 알고 있지 않느냐?”
피안의 동생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겠습니다. 더는 권하지도 붙잡지도 않겠습니다. 허나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형님을 잡으려 다른 모든 나라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피안은 소매를 걷고 손을 드러내며 싸울 자세를 취하였다.
“미안하다...”
동생은 고개를 들었다. 슬픈 눈으로 피안을 바라봤다.
“오늘 이후로 당신은 더 이상 나의 형이 아닙니다. 다음번에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적입니다. 그때는 주저하지 않고 당신과 당신 뒤에 있는 이교도들의 목숨을 끊으려 할 겁니다.”
“...”
피안은 놀란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이미 온 나라가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돌아간다.”
피안의 동생은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들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는 피안의 동생만 홀로 서서 피안을 바라봤다.
“가자”
피안은 잠시 멈춘 행렬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피안은 동생의 옆을 지나갔다. 동생은 피안이 지나가자 뒤로 돌아 피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또다시 하칼의 시야가 뿌옇게 변하며 장면이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어떤 방 안이었다. 촛불들로 불을 밝히고 있던 방안은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을 식별할 수는 있었다.
하칼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의자가 있었고 그곳에는 늙어버린 피안이 앉아 있었다. 그의 등은 굽어 있었고 총명했던 그의 눈도 그 빛을 잃고 잿빛이 되어 있었다.
그의 앙상한 손은 툭 불거진 뼈마디가 도드라져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혈관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적나라케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의 수발을 드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정말로 직접 하실 건가요?”
수발을 들던 사람 중 한 명이 물었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진작 했어야 했던 거야...다만 내가 너무 겁이 많아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야 결단을 내린 거지...오히려 늦었다...”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불안정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해야 해...더 이상 다른 희생을 줄여야 한다...만약 내가 성공한다면 너희를 곧바로 데리러 오겠다...”
“알겠습니다.”
피안은 대답을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피안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이 조용히 뒤편에 있던 단검을 가져왔다. 단검은 나무로 만든 손잡이와 아무런 문양도 없는 투박한 검집으로 쌓여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단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쨍그랑
그때 하칼의 뒤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소리는 하칼에게만 들리는 듯 그의 앞에 있던 피안과 다른 사람들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칼은 다시 피안과 단검을 들고 그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을 돌아보려 했지만 그때 그의 눈이 번쩍 뜨이며 천장이 보였다.
그의 시야는 더 이상 뿌옇지도 않았고 그의 몸은 영혼처럼 사람들을 통과하지도 않았다. 바닥의 단단함과 공기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괜찮아?”
제천성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칼은 눈을 껌뻑거리며 정신을 다시 찾았다. 그의 머리는 방금 전 봤던 장면들이 한편의 영화처럼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굉장한 꿈으로 인해 두근거리는 심장과 흥분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까지는 있었지만 단 몇 분만 다른 곳에 신경을 쓰게 된다면 모조리 까먹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봤던 모든 장면 하나하나를 뇌에 새겨 넣으며 누워있었다. 그는 주변의 그 어떤 소리도 듣지 않고 다시 눈을 감은 채 오롯이 장면을 새기는 작업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제천성과 샬롭이 쭈그리고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칼은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네요.”
“잠?”
제천성이 되물었다.
“조금 전까지 대장을 보호하던 건 뭔가요? 어떻게 만든 겁니까?”
샬롭이 물었다. 그는 왠지 심통이 나 있었다.
“모른다. 내가 한 게 아니야.”
“아니, 도대체 뭐길래 내 폭탄으로도 안 부서지는 겁니까?”
“아...아마 이것 때문일 거다.”
하칼은 자신의 기계식 왼손을 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자그마한 조각이 있었다.
“역시! 네가 찾았구나! 믿고 있었다. 네게 목숨을 거는 판단은 옳았어!”
제천성이 기뻐했다.
“이게 그 조각인가 보군요?”
“맞다!”
“기뻐 보이시는군요.”
“당연하지! 솔직히 나는 이번에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그때 계단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의 걸음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소리였다. 해적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격앙된 표정으로 하칼을 노려봤다.
“도대체 어째서 너희는 나를 방해하는 것이냐! 나는 그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가 외면하고 차별하며 버린 이들을 구원하였다! 너희가 돼지우리 같은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길로 내쫓은 자들이었다. 인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아니면 이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 꼬았던 것이냐?”
해적들은 각자의 목소리로 한거번에 말을 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마치 소리를 녹음하여 동시에 튼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배 안을 울렸다.
“이런...설마 했는데...”
제천성이 해적들을 보며 말했다.
“악이 선을 완전히 제압한 꼴이 아닌가! 악은 선이 되었다! 이교도가 순수한 믿음을 가졌고 신을 믿는 다른 이들은 실로는 악마를 숭배하고 있도다!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조심해라! 저들도 이미 이곳의 일부인 망자들이다!”
해적들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그들에게 돌격해왔다. 하지만 해적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제천성과 샬롭은 빠르게 그들을 제압했다. 검과 폭탄에 맞은 이들은 사지가 뒤틀리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며칠 전 다마스쿠스에서처럼 검게 변하며 쭈그러들었다.
그렇게 해적들이 모두 쓰러지자 노인 한 명만 덩그러니 남았다. 제천성은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위해 노인 쪽으로 뛰었다.
“잠깐!”
하칼이 제천성을 말렸다. 제천성은 노인의 코앞에서 칼을 멈췄다.
“왜?”
제천성은 조각을 바라보던 천진난만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섭도록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피안...당신은 피안이지?”
제천성의 칼끝이 종이 한 장도 안 되는 차이로 자신의 코앞에서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노인이 피안이라는 이름을 듣자 표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름...오랜만이군...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꿈의 조각을 직접 만졌다는 이야기인데...어째서 너는 빨려 들어가지 않은 것이냐?”
“그건 나도 모르오. 헌데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소.”
“...”
피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않는 걸 보니 일단 들어보겠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말을 하겠소. 당신이 있었던 곳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이 세상은 아닌 것 같던데 혹시 그곳도 꿈속인가요? 그리고 일각수들은 뭡니까?”
“그 모든 것들이 그저 나의 꿈이었으면 좋겠군...”
피안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마진은 무엇이고 아바가 지배하는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이오?”
“마진? 아바? 그게 다 무엇이냐?”
제천성이 소리쳤다.
“너희는...끝까지 이기적이다...엄청난 힘을 가진 마진이든 아바든 그리고 너희들도! 자신들이 가진 것을 적당히 나눠 가지면 될 것을 언제나 손아귀에 움켜쥘 뿐이지...그들이 바랬던 건 그저 인간답게 사는 것뿐이었지만 너희는 그마저도 외면했다...”
“당신의 진짜 몸은 어디 있나요? 지금 그 모습이 당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천성이 천천히 검을 거두며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꿈속에서 육체를 찾다니...이런 모습을 원하는 것이냐?”
피안의 모습이 바뀌며 그가 가장 젊었을 때 자신의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은 꿈속에서 본 그대로였다.
“저는 당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칼이 말했다.
“방법? 무슨 방법을 말하는 것이냐? 네가 무엇을 안다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힘은 절대적인 차이를 가져다준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자유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유를 던져둔다는 것은 돼지우리에 금덩이를 던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모르는 가축이라는 뜻이냐? 인간은 뼛속부터 자유를 원한다.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도 있더냐?”
“자유라는 단어의 뜻이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사는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란 족쇄를 풀되 방안에 가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자유냐!”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말한 힘의 차이로 인해 또다시 차별과 피해를 보는 자가 나올 겁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대요? 아니면 설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특권을 주겠다는 건가요?”
“...”
“각자 제멋대로인 인간들에게 자유란 역설적이면서 모순적인 겁니다.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유는 제한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곧 나라에서 만드는 법이고 그 법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 이상의 자유를 원한다면 모든 인간들이 한낮 한시에 깨달아 벽 없이도 스스로 다른 사람들이 가진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을 당신도 잘 알겠죠.”
피안은 조용히 하칼을 바라봤다. 그는 하칼의 말에 반박도 동조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봤다. 잠시 뒤 그는 한 손을 들었다.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칼의 앞에 펼쳐졌던 모든 장면이 유리처럼 깨져 파편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샬롭과 제천성의 모습마저 깨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명한 파편들은 땅에 닿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지고 컴컴한 배 안에 하칼만 혼자 남게 되었다.
“그래서...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배가 울리며 소리가 났다.
“나는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저와 함께 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물어볼 것도 조언을 구할 것도 많습니다. 저와 함께 세상으로 나가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은 신의 영역이며 신의 꿈속이다. 신이 정해 놓은 규칙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신의 규칙을 따를 수가 없다. 이미 너무나도 멀리 벗어났다.”
“신의 꿈이든 신이 만든 세상이든 간에 꿈에서 나와 이런 곳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방법도 알고 있지 않나요? 혹시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라면, 그런 방법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행여나 제가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다시 당신을 대적할 겁니다.”
“젊은이여, 너는 모른다. 내가 얼마나 살았는지를...이미 내 육신은 그 뼈까지 삭아 가루가 되었다.”
하칼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그마한 병 속에 갇힌 난쟁이의 이야기였다.
연금술사라고 불렸던 이들에 의해 신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생명체는 인간이 인간을 만들기 위한 실험에 결과물로 병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소인이었다.
하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호문쿨루스라고 들어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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