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과거의 눈물은 현재의 비가되어(3)

“호문쿨루스? 들어본 기억이 없구나...”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잉태를 거치지 않고 인간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자 그렇게 만들어진 병 속에 인간을 일컫는 말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을 가두는 방법이라고도 전해지죠. 한 번 시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피안의 웃음소리는 배를 흔들리게 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웃었다.
“병을 구해오죠.”
하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르륵
갑자기 공기가 빨려 들어가듯 한곳에 모이더니 순식간의 피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묘했다.
“오랜만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황당한 생각을 하는 이를 만났구나...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뭐가 그리 어이없고 웃긴 건가요?”
“신을 가둔 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인간이 있었구나! 그리고 나는 너희들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질적이며 이 세상의 규칙을 거스르는 존재이다. 그 때문에 나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더냐?”
“제천성 사령관은 그럴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그리고 오래 살지도 못하죠. 기껏해야 지금부터 사오십 년 정도 더 살겠죠. 그것도 운이 따라야 하는 거죠. 심지어 그중 꽤 오랜 시간은 노화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인간으로서 단기간에 많은 것을 듣고 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습니다.”
“너는 순수하게 너의 탐구심에서 우러나와 이 제안을 했다는 말이냐?“
“네,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당신의 기억 일부분을 잠깐 들여다봤을 뿐이죠. 하지만 그 잠깐의 체험만으로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당신이 원래 살던 세계와 그 세계의 법칙들 그리고 이질적인 존재들에 대해서요.”
피안은 하칼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동공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검정색이었다. 피안은 하칼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너무 오래 산듯 하군...손에 쥐고 있는 조각은 네가 가져라. 그것은 내 꿈의 크기이며 내 그릇의 크기이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구나. 부디 너는 더 큰 꿈과 그릇을 갖거라.”
피안이 말했다.
“이게 필요하다면 다시 가져가시지요.”
“하하하! 끝까지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나는 여기까지다. 자, 이것을 주마.”
피안은 하칼에게 다가와 푸른색 끈을 그의 기계식 팔이 아닌 그의 오른쪽 팔목에 감아주었다. 푸른색 끈 끝에는 금색으로 수가 놓여 있었다.
하칼은 그게 그의 문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너의 왼팔은 아까 전 동굴에서 나와 싸운 자의 검처럼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훗날 너는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때 네가 하는 선택에 따라 너의 인생도 크게 바뀌겠지. 이 끈은 나의 마지막 영혼이다. 정말로 네가 필요할 때 왼손으로 이 끈을 풀 거라. 그리하면 잠시 동안이지만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다.”
“당신이 이 끈 속에 들어간다는 뜻인가요?”
“아니다. 그저 내 일부분일 뿐이다.”
“...”
하칼은 파란 끈을 바라봤다.
“내가 만들고자 했던 세상은 결국 치졸한 인형극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혼자가 되지 말거라...”
피안은 이 말을 끝으로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배 안에 돌던 푸른 기운도 같이 사라졌다. 하칼은 심호흡을 하고는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샬롭과 제천성이 도착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천성이 배의 밑바닥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샬롭과 같이 올 것이라는 하칼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혼자였다.
긴 검을 등에 메고 계단을 내려와 앉아 있는 하칼에게 다가왔다.
“해치운 거냐? 헌데 싸움의 흔적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제천성은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야기 몇 마디 했을 뿐이죠.”
“이야기를 했다라...허면 지금 그 괴물은 어디 있는 것이냐?”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고? 싸우지도 않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진짜 하칼은 어디 있냐?”
제천성은 검을 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하칼은 그가 이런 상대와의 싸움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칼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것을 이야기해 봤자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 대신 왼손에 꽉 쥐고 있던 자그마한 조각을 제천성 쪽으로 던졌다.
제천성은 여전히 검을 겨눈 채 다리를 굽혀 조각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그게 당신이 찾던 조각 아닌가요? 그 정도면 제가 진짜라는 것을 믿겠나요?”
제천성은 날이 서 있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어떻게 싸우지도 않고 이것을 손에 넣은 것이냐?”
“그는 제 왼손이 당신의 검과 같이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걸 감싸고 있던 보호막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거겠죠.”
제천성은 잠시 동안 하칼을 바라보다. 이내 대답했다.
“그렇구나”
그는 조각을 한번 살피고는 가죽으로 만든 자그마한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쪽은 다 끝났나요? 다친 사람은요? 샬롭은 어디 있습니까?”
“싸움 도중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해적들도, 동굴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샬롭은 그냥 배에 남아있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럼 이제 해적왕은 사라진 겁니까?”
“그런 것 같다. 트러스티는 어디 있는 것이냐?”
제천성이 물었다.
“트러스티는 배에 도착하고 위층으로 향했습니다.”
“이런 괴물과 싸울 때는 절대 단독행동은 하지 마라. 같이 있을 때에도 잠시 눈을 다른 곳에 판다면 서로를 믿기 힘들게 된다. 그러니 떨어진다면 오죽하겠냐?”
“경험담입니까?”
“그래, 아무튼 올라가 보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냐?”
“이 괴물들을 꼭 찾아서 말살시켜야 하는 겁니까?”
“물론이지. 너도 봤잖느냐? 그 말도 안 되는 힘을!”
“물론 감당하기 힘든 힘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다른 괴물들은 몰라도 해적왕은 몽에 별로 큰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요? 그저 외딴 섬에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 스스로 가두지 않았습니까?”
제천성은 하칼의 눈을 바라봤다.
“너 무슨 일 있었던 거냐? 괴물과 무슨 대화를 한 거야?”
“피안입니다.”
“뭐라고?”
“괴물이 아니라, 피안이라고요.”
“통성명까지 할 정도로 친해진 것이냐?”
“...”
하칼은 방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하여고 입을 땠다가 다시 닫았다. 굳이 피안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던 이야기를 한다면 복잡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해 봐라”
제천성이 재촉했다.
“그냥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배척당한 이들을 데리고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해적왕이 소문만 무성했지 그에게 당했다는 사람들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하지, 그에게 당한 이들은 모조리 죽거나 이 섬으로 끌려왔으니까 못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래, 그와 같은 이질적인 존재들은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자들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규칙을 완전히 위배한 자들이지”
“규칙과 질서? 그건 누가 정한 겁니까?”
“이 세계를 만든 신이지...”
“당신이 신을 언급할 줄이야!”
“네가 말하는 신과 내가 말하는 신은 완전히 다르다. 그저 인간의 두려움과 불안으로 인해 만든 보이지 않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야.”
“그럼 당신은 신을 봤습니까?”
“신을 보지는 못했지만, 항상 느끼지. 이 세상의 규칙과 질서를 통해서 말이야. 나도 처음에는 너와 같은 반응이었다. 우리는 꽤 많은 부분이 닮아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아라, 이런 자들이 가진 힘이 지금 인간 세상에 존재한다면 어떨까? 손을 대지도 않고 돌이 깎이고 망치질을 하지 않아도 쇠가 날카로운 검으로 변한다. 이것은 인과율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야.”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조차 하면 안 된다는 뜻인가요?”
“그래”
“알겠습니다.”
하칼은 한숨 쉬듯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천성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하칼을 바라봤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흐음...”
제천성은 꿈의 조각은 찾았지만 무언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막을 내린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꿈의 조각은 현재 자신의 손에 있었다. 그는 커다란 방을 한 번 쓱 둘러보고는 하칼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먼저 올라온 하칼은 일 층을 지나 구멍이 난 벽이 있는 이층에서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구멍이 있는 벽 뒤에는 또 구멍이 있는 벽이 있었다.
“이게 무슨 난리냐?”
뒤따라 올라온 제천성이 물었다.
“트러스티의 작품이겠지요.”
“트러스티는 이층에 있는 건가?”
“아닐 겁니다. 자세히 보면 파편들이 계단 쪽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필시 저쪽에서 힘을 주었다는 뜻이죠.”
“그럼 올라가자”
“네”
이번에는 제천성이 먼저 올라갔다. 하칼은 나무 파편들이 산산이 조각나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더 시간을 쏟을 수는 없었다.
그도 제천성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트러스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방 한쪽 구석에 있었다. 너무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앉아 있었다.
하칼과 제천성은 눈의 초점을 맞추려 인상을 썼다. 그리고 트러스티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쓰러져있는 누군가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트러스티는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 그들을 바라봤다.
“누구냐?”
제천성이 물었다.
“해적왕입니다.”
트러스티가 대답했다.
“해적왕?”
제천성이 되물었다.
“네”
제천성은 재빨리 달려가 트러스티의 곁에 누워있던 자를 봤다.
“애드문드? 아직 살아 있었군! 나를 좀 도와줘”
제천성은 트러스티의 도움을 받아 제천성을 업었다. 그리고 그들을 빠르게 배에서 빠져나와 동굴에 있던 증기선으로 돌아왔다. 동굴 안은 썰렁했다.
빛도 없었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빛으로 동굴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뿌우우웅
증기선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나며 거대한 쇳덩어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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