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백두산에서 시작되는 바람(5)

“니 정말이니?”
조선 출입국 사무소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물었다. 나이가 지긋한 그는 조선 군복을 입고 있었다.
“네, 저기 있는 여인입니다.”
청진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라파엘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어느새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미카엘과 상의 끝에 라파엘라의 상태를 굳이 보여주는 것은 이 계획에서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어디 몸이 아니 좋니?”
그는 라파엘라를 보며 물었다.
“몸이 좀 아픕니다. 중대장님, 근데 그 말투는 안 고치시나요?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은데요?”
청진은 가벼운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
“조용히 해라! 조선군은 상관 없다 하지 않았니?”
“넵! 아무튼 이번 휴가는 오랜만에 좀 오랫동안 다녀오려고 합니다. 고향도 들리고 조선도 구경시켜주고 싶습니다.”
청진이 말했다.
“그래, 어마이도 보고 오라. 내 니니까 보내주는기야, 아랐니?”
“감사합니다.”
청진은 경례하고는 몸을 돌려 기다리던 라파엘라와 미카엘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잘 된 건가요?”
“네, 휴가도 받았고 별 의심도 안 받았습니다.”
“말투는 상당히 화가나 보이던데요?”
미카엘이 물었다.
“아...방언입니다. 조선은 몽과 말이 거의 같은 것 같지만, 지방마다 방언이 심해서 같은 조선인이라도 못 알아듣는 방언을 사용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나마 저 정도는 괜찮은 겁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모든 학교에서 다 몽국어를 배우고 쓰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할 겁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대화가 더 힘들 겁니다.”
미카엘은 라파엘라가 타고 있는 의자를 밀며 걸어갔다. 중대장의 사무실은 조선으로 들어가는 기차역 바로 위편에 있었다.
백두산 역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세련된 외관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깔끔하면서도 단순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곳부터 화려한 샹들리에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어 형형색색의 빛으로 바닥이 물드는 복도, 그리고 수많은 벽화가 새겨져 있는 아치 형태의 광장까지 있었다.
일 층 천장은 보통 건물의 일 층 보다 훨씬 높아 답답함이 아닌 웅장함을 사람들에게 선사했는데 조선으로 향하는 입구만은 달랐다.
세련됨보다는 옛것의 느낌이 났고 화려하기보다는 고즈넉했다.
아주 연한 노란색으로 칠해진 벽으로 된 복도를 지나며 곧바로 조선으로 들어가는 기차역에 도착했다.
복도의 중간에 조선의 출입을 통제하는 구간이 있었는데 역을 넋 놓고 구경하며 다니다 길을 잘못 들어 온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라 통제하는 병사들의 주된 일은 잘못 들어온 관광객들을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이곳은 조선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구경하려고 들어온 거라면 돌아가 주세요.”
미카엘은 일행보다 앞서가던 외국인 무리는 구경하기만 할 테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겠냐고 떼를 썼지만, 거절당하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여!”
외국인들이 돌아가자 청진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출입을 통제하던 병사들도 청진을 보자 웃으며 인사했다.
“결혼한다면서!”
“아직 결혼한 것은 아니고 일단 고향에 내려갔다 와야지”
청진이 말했다.
“그래, 너는 좀 고향에 갔다 와야 해!”
“너무 일만 했다고”
그들은 청진의 갑작스러운 약혼 소식은 단조롭던 백두산 역에서의 근무에 즐거운 윤활제 역할을 해주었다.
“이제 그 일은 마음에서 털어낸 거지?”
“야!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
“그만해, 나는 이만 가볼게”
청진은 말다툼을 시작한 동료들을 말리며 말했다. 그들은 그제야 말다툼을 멈췄다.
“미안하다. 빨리 가봐.”
청진은 라파엘라와 미카엘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국 관리소를 지나자 몇 발자국 안 가서 복도가 끝나고 기차역이 나왔다.
조선의 기차역은 차프트 역과는 아주 달랐다. 천장이 없는 야외에 만들어진 역은 크기도 작았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기차는 역에 정차하여 사람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역시 차프트에 비해 작군요.”
미카엘이 열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다란 열차 가장 앞에 있던 기관실 위로 길게 뻗어있는 파이프에서 하얀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것도 검은 사월회와 실프상단이 자신들의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도록 건축 당시부터 투자했기에 이 정도로 지어진 겁니다.”
“검은 사월회요?”
“네, 아! 몽에서는 블랙 에이프로 클럽, 백 연합 혹은 B.A.C.로 알려져 있죠. 실프 상단과 동아시아 회사와 같이 거대한 세 개의 상단으로 불리고 있죠.”
청진이 설명해주었다.
“백 연합이었군요. 백 연합은 알고 있습니다. 역사가 깊은 실프상단과 동인도 회사가 해산되고 그 이름을 계승하기 위해 만든 동아시아 회사죠. 백 연합이 검은 사월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미카엘이 말했다.
“백 연합은 조선에서 떠나 옛 청나라에서 살던 조선인들이 청나라와 몽이 싸울 때 적극적으로 몽을 지원했던 세력들이 뭉치며 만들어졌죠. 그렇기에 정복 전쟁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세력입니다.”
“그렇군요.”
“사실 검은 사월회라는 이름은 전쟁이 모두 끝나고 조선이 자치령으로 된 후에 조선으로 자신들의 본거지를 옮기며 붙인 이름입니다. 즉, 조선은 실프상단이나 동아시아 회사보다 검은 사월회가 더 크다는 이야기죠.”
청진은 이야기하며 자신들의 객실이 있는 열차 쪽으로 걸어갔다.
“청진님은 많은 걸 알고 계시는군요.”
라파엘라가 말했다.
“청진님이라니요...어색하지만 기분은 좋군요. 하하! 이런 사실들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백두산 역에서 근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듣게 됩니다.”
청진은 네 번째 열차 입구 앞에서 멈추었다.
“여기인가요?”
미카엘이 물었다.
“네, 이 열차입니다. 그런데 열차 안에는 바퀴 달린 의자를 타고 가지 못합니다. 복도가 그리 넓지 않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죠?”
라파엘라가 물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청진은 양손으로 라파엘라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꺄악”
갑자기 터져 나온 라파엘라의 비명은 사람들의 이목을 순식간에 집중시켰다. 라파엘라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사람들은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미카엘님은 의자를 화물칸에 맡기고 와주세요. 마지막 두 개의 열차가 짐을 실을 수 있는 화물칸입니다.”
“아뇨, 제가 라파엘라를 데리고 갈 테니 당신이 의자를 맡기고 오세요.”
미카엘은 굳이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제가 더 안정적입니다. 그리고 말을 하는 사이에 이미 갔다 오셨을 겁니다.”
“빨리 갔다 와”
라파엘라가 말했다.
미카엘은 투덜투덜하며 의자를 밀어 화물칸에 맡겼다. 살짝 보인 화물칸의 내부에는 개인 화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나무로 된 커다란 상자가 실려 있었다.
나무 상자 겉에는 가운데가 잘려 두 동강 난 숫자 4가 찍혀있었다. 누가 봐도 검은 사월회의 짐이었다.
미카엘은 의자를 맡기고 다시 걸어갔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지 미카엘이 짐을 맡기고 돌아오는 잠깐 사이에 사람들이 꽤 많이 늘어나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한 무리가 저 멀리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된 옷을 입은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자기들끼리 뭔가 말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미카엘과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 서 있는 사람과 미카엘의 눈이 마주쳤다.
꽤 먼 거리였지만, 둘은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카엘은 몸을 돌려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미카엘은 문을 열고 라파엘라와 청진이 있는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렸을 때 외롭지 않았어요?”
“엄청 외로웠죠. 자랄 때 언제나 혼자였으니까요. 그래서 형제자매가 있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어요. 실제로 제가 또래 친구 중에 덩치도 크고 몸이 날렵해서 가끔이었지만, 싸우기만 하면 항상 이겼죠. 그런데 매번 다음날 형제들을 우르르 데리고 와서 절 때리고 갔습니다.”
청진은 그때가 생각났는지 웃었다.
“저런...”
“어차피 다 옛날 일입니다. 그 친구들이 지금은 저와 형제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군대도 같이 입대한 친구들도 몇 있고요.”
“그건 좋네요.”
미카엘이 들어올 때까지 그들은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미카엘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냥 옛날이야기를 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야기가 별로 없어요. 오랫동안 아팠고 전쟁 직후라 모두 힘들었죠.”
라파엘라가 말했다. 라파엘라의 말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쟁 직후라 자신의 아버지인 아젤혼 박사는 너무나도 바빴고 자신의 어머니는 사고로 오랫동안 누워있었다.
미카엘은 이런 자신의 어렸을 때 이야기 하는 것이 싫었다. 아젤혼의 자녀인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 외에도 힘들었던 과거를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울적해지고 짜증이 나다가 마지막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오르며 끝이 났다.
“오빠!”
라파엘라가 미카엘을 불렀다.
“응?”
미카엘은 자신이 또다시 정신을 놓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밥 뭐 먹을 거냐고”
라파엘라가 물었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제가 밖에서 사 오려고 합니다. 간단하게 주먹밥 사 오려고 하는데 어떤가요?”
“저는 한 덩이만요.”
“한 덩이면 되겠습니까? 한창 배고플 나이 아닌가요?”
“그래, 나 때문에 요즘에 많이 먹지도 못했잖아.”
라파엘라가 말했다. 미카엘은 생기가 도는 라파엘라의 얼굴을 보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두덩이요.”
“좋습니다. 그럼 제가 ᄈᆞᆯ리 가서 사 오죠.”
청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열차 밖으로 나갔다.
“오빠는 이렇게 셋이 가는 게 별로야?”
청진이 나가자 라파엘라가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래? 근데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미안”
미카엘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라파엘라도 씽긋 웃음을 지었다. 청진이 그들과 같이 다니기 시작하고 가장 편해진 것은 미카엘이었다.
그는 새삼 청진에게 고마움을 느꼈지만, 어째서 그가 이렇게 그들에게 지극정성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청진이 없었다면 백두산 역을 통과하기조차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광야에 떨어져 있던 자신들에게 쉴 곳이 생긴 느낌이었다.
미카엘은 먹을 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는 청진을 바라보며 어쩌면 라파엘라의 몸을 고친 후에 정말로 그와 결혼을 하는 것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산다면 지금 같은 긴장의 연속인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미카엘은 자신들의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청진이 사 온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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