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오랜 힘과 계획의 단면(1)

거대한 막사 안에 가운데에 있는 탁자를 빙 둘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대한 탁자에는 대마도의 지형을 재연해 놓은 모형이 있었고 빨간 깃발과 파란 깃발이 붙은 말들이 놓여있었다.
가장 상석에 서 있던 사람은 조용히 지도를 내려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막는군. 피해 없는 전투만으로는 저들을 괴멸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칼이 말했다. 그는 푸른색 말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이번에 총공격하실 계획이신가요?”
하칼의 옆에 서 있던 트러스티가 물었다.
“총공격이라...”
하칼은 중얼거렸다.
“이번에 돌아온 첩보의 말로는 그들의 병력이 보강되었다고 합니다.”
이현성 천인장이 말했다. 그는 첩보 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낸 거야? 적 진영 한가운데 있는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사람이 없다면서?”
하칼이 물었다.
“배가 도착해 병사들이 내리는 것을 봤습니다. 어림잡아 천 명 정도 된다는군요.”
“많이도 왔네...”
“저희 별동대는 내일 오전 중으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보급과 인원 관리를 담당하는 장진수 천인장이 말했다.
“그 별동대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이라고 했지?”
“별동대는 총 일곱 명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일반 소총 부대원 오십 명 정도와 함께 들어올 예정입니다.”
“그래, 잘 섞여서 튀지 않아야 해. 전력 노출이 안 되는 게 승리의 첫걸음이니까. 별동대 전력을 좀 자세히 알려줘”
“총 일곱 명, 그 중 세 명은 근접 위주의 싸움꾼이고 그 중 백천광은 창에 능하여 일대 다수 싸움에서 두각을 보입니다. 나머지 두 명은 검을 사용합니다. 원거리로는 두 명,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세 명입니다.”
“두 명이면 두 명이지 정확히 이야기해서 세 명은 무슨 뜻이야?”
“광현, 광진 형제가 일개 조로 싸웁니다.”
“일개 조?”
“네, 특이하게 형인 광현은 투창하고 동생인 광진은 투창할 창들을 운반함과 동시에 방어하는 방식으로 싸우죠. 거대하고 무거운 창을 엄청난 속도로 날려 대포 이상의 위력을 자랑함과 동시에 무각으로 인해 대포보다 훨씬 우월한 기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투창이라...신기한 방법으로 싸우는군.”
“별동대에 속해 있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익숙한 무기를 극대화해 전투를 하는 거죠.”
송하림 만인장이 대답했다. 그는 하칼이 오기 전 대마도에 진출해 있던 몽조수비대를 지휘관이었다.
“음...나머지는? 내가 암살과 첩보에 능한 사람을 한 명 보내 달라고 했는데?”
“네, 화연이라는 자가 옵니다.”
“실력은 확실하겠지?”
“네”
하칼은 뒤에 있던 의자에 앉아 천장을 봤다.
“내일부터는 지금까지 와는 다른 큰 전투가 될 거다. 우리도 피해가 있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부를 확인해야 해. 그래야만 좋은 작전을 짤 수가 있다. 지금 상태로 총공격을 한다면 최악의 경우 우리는 전멸할 거다. 생각보다 일본군은 강하다. 지난 일주일간 확인한 결과 저들에게는 두려움과 통각이 없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며 우리와 맞서 싸웠다. 한두 명에게서만 보이는 특징이 아니라 모든 병사가 그렇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모두 약에 취해 죽음에 대한 공포도 고통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어. 헌데 그런 약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신체적인 능력은 그대로, 아니, 오히려 향상시키며 정신까지 지배한다. 아무튼 그 정체를 알아야 해.”
“그렇다면 거센 공격을 하면서 안까지 뚫을 작정입니까?”
송하림이 물었다.
“그래, 그렇게 싸우면서 안을 봐야 한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에게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아니야, 병사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마. 우리만 알고 있는 거야. 오늘까지는 병사들에게 최대한 죽지 말고 다치지 말라고 해야 한다. 세부적인 작전이나 진영은 내일 별동대가 도착하고 난 다음에 짤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지금까지와 같이 도발과 적당한 전투로 마무리 지으면서 행여나 올 저들의 공격에만 대비해라.”
“알겠습니다.”
송하림과 나머지 천인장들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막사 안에는 트러스티와 하칼만 남아있었다.
“이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다. 처음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쉽게 밀어버리고 일본 본토로 진격한 줄 알았는데 말이지...”
하칼은 푸념하듯 말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셉니다.”
트러스티가 대답했다.
“내일 오는 별동대가 무각을 어느 정도로 다룬다고 했는지 기억나?”
“그들 각자의 능력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별동대에 들어가기 위해선 최소 6단 이상은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6단이라...나쁘지 않아. 그건 그렇고 역시 전장은 공기부터가 다르군. 이 느낌 오랜만이야.”
하칼이 큰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말했다.
“그렇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전투를 기다리는 건 가슴 뛰는 일이죠.”
트러스티의 얼굴에서 생기와 흥분이 뒤섞여 보였다.
“사령관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하칼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임영복이었다. 그는 금강산에서부터 하칼을 도와 고성에서의 전투를 함께하고 대마도까지 따라왔다.
“그간 무탈하셨나요?”
영복이 인사했다.
“나야 잘 있었지. 일은 잘됐나?”
하칼이 물었다.
“네, 우선 소별희 대장께서 꼭 이렇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선 사령관이 된 걸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딱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군을 떠난 지 한참 된 한참 된 사람이 갑자기 군에 복귀하면서 사령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연병, 내가 하칼한테 상전 대우를 해줘야 한다니...’라고 했습니다.”
“하하하하하”
하칼과 트러스티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눈물이 나올 때까지 웃었다.
“정말로 소별희 영감답네!”
하칼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정보는 정말로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사령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조선 전역을 공격하는 부대에 암살자들과 첩보를 맡은 병사들이 숨어있었습니다. 그걸 알고는 대대적인 수색을 펼치고 있습니다.”
임영복이 말했다.
“진짜 잔인한 놈들이다. 소규모 부대를 파견하면서 그 병사들을 속인 거지. 어차피 그들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보낸 거였어. 그냥 그들 사이에 암살자와 첩보원을 섞어 전투가 시작되면 곧바로 몸을 숨겨 생존하여 조선 내부로 침투시키려는 거였다. 한마디로 병사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작전이야.”
하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갈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부탁하신 것은 여기 있습니다.”
영복은 품 안에서 자그마한 서신을 꺼냈다. 서신은 소별희의 인장이 찍혀 봉인되어 있었다. 하칼은 서신을 받았다.
“고맙다. 이제 가서 쉬어.”
“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영복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영복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하칼은 곧바로 봉인을 뜯고 서신을 펼쳤다.
서신은 소별희가 자필로 적은 긴 편지였다. 하칼은 소별희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나와라, 네 설명을 들어야겠다. 영복이 들어올 때 숨어들어 왔지?”
편지를 다 읽은 하칼이 별안간 호통을 쳤다. 그러자 막사 한쪽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륵
그와 동시에 트러스티는 자연스럽게 칼을 빼 들었다.
“알고 계셨군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고 힘이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너는 누구냐?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트러스티의 검에 목이 달아날 것이야.”
하칼은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그의 말속에는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저는 화연이라 합니다.”
“화연? 별동대 아니더냐? 원래 내일 오기로 되어있던 거 아니야?”
“맞습니다. 아마 오늘 알아차리시지 못하셨다면 내일 그들과 같이 온 것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것도 못 받으셨을 거고요.”
화연은 품 안에서 영복이 가져온 것과 똑같은 문양이 찍힌 서신을 꺼내 하칼에게 주었다. 하칼은 서신을 받아 곧바로 뜯고 읽어 내려갔다.
“너는 어째서 일찍 온 거지?”
하칼은 눈으로는 서신을 읽으며 물었다.
“저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임영복을 따라왔습니다. 제 뜻이 아닌 소별희 대장의 명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일본군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적이 있다는 뜻이군?”
“적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합니다.”
“모호하다고? 무슨 뜻이지?”
서신을 다 읽은 하칼이 고개를 돌려 화연을 바라봤다. 트러스티의 검은 여전히 화연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화연이 말했다. 하칼은 화연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암수나 첩보원들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지도 않았다.
“알겠다. 돌아가 봐”
“저는 사령관님 주변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불러주시지요.”
“싫다. 내가 너를 어찌 믿느냐? 기회를 보다 나를 죽일 수도 있잖아?”
“사령관님도 방금 하신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애초에 전투에 특화된 병사가 아닙니다. 하칼님은 물론 트러스티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저 같은 건 단숨에 죽일 겁니다.”
“암살이란 검과 검을 맞대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 숨 쉬는 것을 통하여 죽일 수 있다.”
하칼이 단호하게 말했다.
“소별희 대장의 명입니다. 제가 거역할 수 없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절대로 사령관님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약속하나?”
“네, 제 목숨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래, 영감이 너를 많이 아끼나 보다.”
“네?”
“아니다. 트러스티도 칼을 거둬라”
트러스티는 하칼의 명이 떨어지자 곧바로 검을 거둬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묻겠다.”
“물으시지요.”
“이 서신에 있는 말이 모두 사실이냐?”
“저는 서신을 읽어보지 않아 어떤 내용인지 모릅니다.”
“정말로 영감은 서홍비를 믿지 않나?”
“...”
화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서신에 쓰여 있다. 그저 확인하려는 것뿐이다.”
“저는 명을 행할 뿐입니다. 명 외에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네가 보고 들은 것이 있을 거 아니냐?”
화연을 침을 삼켰다.
“제 주관적인 기억으로는 소별희 대장은 율리우스 사령관님을 믿지 않는 해 보였습니다. 소별희 대장께서 예전에 율리우스 사령관이 하는 말은 투명하지 못하다는 말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정말로 최근 일 년 사이에 두 개의 악몽이 발견된 것이냐?”
하칼이 물었다.
“네, 그건 사실입니다.”
하칼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하칼이 트러스티에게 물었다.
“무엇을 말인가요?”
“저번에 내가 이야기 했던 거 말이다. 우리가 서홍비를 믿어도 될까?”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모든 행동에 그 이유가 있다. 설령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라도 그냥 해보고 싶다는 일련의 동기라도 있다. 하물며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지. 그 정도 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헌데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런 복잡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저에게 믿음이란 제 목숨을 맡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믿는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는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네가 믿을 때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렇습니다. 허나 누군가를 믿을 때 특별한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제가 직접 겪고 몸소 체험한 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거군. 역시 낭만적이야.”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습니다.”
“뭔데?”
“지금 적은 눈앞에 있는 일본군이라는 겁니다. 서홍비가 아니라요.”
“맞아, 하지만 지금 일본군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서홍비나 해적왕이 떠오른다. 이질적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내일부터 있을 전투에서 꼭 내부를 확인해야만 한다.”
하칼이 지도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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