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오랜 힘과 계획의 단면(5)

일본군의 대부분 병력은 몽조 방어대가 공격해온 서쪽에 배치되어있었다. 그 덕분에 남쪽으로 공격한 학 부대는 쉽게 문을 뚫고 안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몽조 수비대의 자랑인 학 부대는 원거리 무기인 활과 근거리에서도 대응이 가능한 권총으로 무장한 병사 집단이었다.
활을 애용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주로 맡겨졌던 임무 때문이었다.
이들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곳의 반대편이나 측면까지 잠입하여 공격했다. 그때 소리가 나지 않는 활로 적을 제압하고 안으로 들어가 내부에서부터 교란 작전을 펼쳤다.
그렇기에 속도가 빠르고 몸이 날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학 부대는 이번에도 본진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은 아니었다. 남쪽의 경계를 뚫었지만, 예전처럼 교란을 시작하지 않고 곳곳에 숨어 사령관과 별동대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엄호했다.
하칼은 지나가는 길에 있던 일본군의 시체를 확인 사살하며 지나갔다.
일본군의 진영은 성처럼 거대한 건물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아 놓은 형태였다. 건물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더 거대했다.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 보였다. 요새 같아 보이기도 했고 성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둘 중 그 어떤 것에도 부합하지 않는 위치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건물을 개조한 것 같다. 조심해야 한다. 함정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칼이 말했다.
“네”
별동대는 최대한 간결하게 대답했다. 하칼은 학 부대를 저격수인 자현과 함께 바깥과 건물 입구 주변에 배치하고는 내부로 들어갔다.
콘크리트 벽돌을 겹겹이 쌓아 만든 건물 내부는 습하고 어두웠다.
“공기가 다르군...”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하칼의 말대로 서늘한 공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일층은 보통 건물의 이 층 높이정도 되었다. 중간 중간에 층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어느 문으로 들어온다 고하더라도 계단이 가까웠다.
하칼은 가장 선두에 서서 천천히 움직였다. 건물 안은 기둥에 박혀 있는 작은 횃불이 전부였기 때문에 시야가 협소했다.
처벅 처벅
횃불의 불빛이 미쳐 닿지 않는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칼은 손을 들어 모두를 멈춰 세웠다.
하칼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까이 있는 기둥 두 개를 가리켰다. 별동대는 재빠르게 기둥에 등을 붙이고 무기를 뽑아 들었다.
성학은 기다란 검을 양손으로 잡았고 수연은 중간 정도 길이의 검 두 자루를 양손에 쥐었다.
하칼과 트러스티 역시 검을 뽑아 들었고 화연은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처벅 처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제 그들이 있는 곳과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와있었다. 성학이 침을 삼켰다.
그들은 발자국이 들리는 곳으로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처벅
발소리가 멈췄다. 성학과 화연이 있는 기둥 근처였다. 그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렸지만, 더 이상 발소리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발소리로 유추했을 때에는 분명 기둥 바로 뒤편에 누군가가 있었다.
하칼은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빼 발소리가 났던 곳을 봤다.
“피해!”
하칼이 벼락같은 소리에 성학은 몸을 피했지만, 적과 가까이 있던 수연은 피할 수 없었다.
탁
수연은 양손에 잡고 있던 검으로 공격을 막았다.
그들을 습격한 건 사람이 아니었다. 수연을 공격한 머리는 뱀과 같이 기다란 목 끝에 붙어 기둥을 타고 위에서 밑으로 날카로운 이빨을 사용해 공격해 왔다.
“크읍, 뭐 이리 힘이 강하지?”
수연은 두 자루의 검을 교차해 십자 형태로 만들어 방어했다. 무반을 켰음에도 힘에 부쳤다.
탕 탕
하칼이 괴물의 몸통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모두 산개해서 팔과 다리를 공격한다! 절대 깊게 들어가지 말고 적이 공격해오면 피할 생각으로 전투에 임해라! 그러다 틈이 보이면 일격을 가하는 거다!”
하칼이 소리쳤다.
트러스티와 성학은 곧바로 괴물의 뒤쪽으로 갔다. 괴물은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목은 뱀과 같았고 몸은 사람처럼 두 팔과 다리로 이족보행을 했으며 기다란 꼬리가 달려있었다.
온몸은 비늘로 뒤덮여 사슬갑옷을 두른 것 같아 보였고 커다란 손에 달린 날카롭고 기다란 손톱은 검을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괴물은 긴 팔을 휘둘러 트러스티를 공격했다. 트러스티는 가뿐하게 피했고 그사이 성학은 괴물의 자리를 베었다.
다리는 야수의 다리처럼 관절이 안쪽을 향해 있었다.
성학의 긴 검에 베인 괴물의 다리에는 깊은 자상이 생겨 그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괴물은 곧바로 성학을 향해 반대 팔을 휘둘렀지만, 성학은 이미 거리를 벌린 뒤였다.
순간 괴물의 주의가 성학에게로 쏠리자 트러스티와 수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숨에 목과 가슴에 검을 꽂아 넣으며 괴물을 쓰러뜨렸다.
쿵
괴물의 거대한 몸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하칼은 재빨리 괴물에게 다가가 검으로 몸을 갈기갈기 도륙 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트러스티가 하칼의 검에 조각조각 잘리는 괴물을 보며 말했다.
“이상자들과 상대할 땐 이것도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하칼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자르고 난 후에야 칼질을 멈췄다.
“그건 맞습니다. 악몽 속에서도 상대를 제압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사람과 똑같이 목을 베고 심장을 찌른다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성학이 말했다.
“움직이자, 이제 적도 우리가 온 것을 알아차렸을 거야. 숨지 않고 빠르게 움직인다.”
하칼은 칼에 묻은 피를 닦고 계단 쪽으로 갔다. 그들은 단숨에 다음 층에 도착했다.
“이게 뭐야...”
가장 먼저 도착한 트러스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층은 끈적이는 점액과 알들로 꽉 차 있었다.
천장은 물론이거니와 벽과 바닥에도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알이 붙어 있었다.
“재미있군...이로써 벌레와 연관이 있는 이상자라는 걸 확인했다. 다들 갑옷을 벗어라. 갑옷 사이로 조그만 벌레가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끔찍할 거야. 최대한 틈을 줄여 벌레가 기어들어 갈 틈을 없애라.”
이 층에 도착한 하칼이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수연이 물었다.
“여긴 그냥 지나친다. 본체를 잡는 게 우선이야.”
“알겠습니다.”
“알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어둠 속에서 화연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화연? 너 계속 같이 있던 거야?”
성학이 물었다.
“그래, 계속 사령관 주변에 있었다.”
“알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칼이 화연에게 물었다.
“알에 충격이 가해지면 터지면서 벌레들이 나올 겁니다.”
“어떻게 알지?”
“예전에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알의 모양도 형태도 비슷합니다. 이 정도의 군락은 아니었지만요.”
“어디서 본 거냐?”
하칼은 알과 알 사이를 걷기 시작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전에 일본 남쪽 오키나와제도의 이에라는 섬에서 한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 벌레 떼에 의해 모두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워낙 외진 곳이고 사람의 왕래도 적은 곳이라 반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죠. 그러다 인근 마을들과 도시에까지 벌레 떼의 습격을 받게 되고서야 알려졌습니다.”
“그 벌레가 이 벌레라는 거냐?”
“벌레는 한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날개가 달린 벌레들부터 땅속을 파고 돌아다니는 벌레까지 종류가 많았죠. 벌레를 처음 본 사람들 역시 별생각 없이 약을 뿌리는 정도로 대처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거군”
하칼은 순간 알을 만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피하며 말했다. 다행히 트러스티가 넘어지기 전에 그의 옷을 잡고 멈춰 주었다.
“벌레들은 기존에 사용하던 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더욱더 개체 수를 늘려갔습니다. 결국 도시 주변의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마을에서 도망치듯 나와야 했고 도시마저 일부분 벌레들에게 점거 당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벌레가 많나?”
“아닙니다. 정부에서 군대까지 동원했음에도 아무런 성과를 낼 수가 없어 고민하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가 자신이 벌레를 퇴치했습니다. 처음엔 일본 정부도 당연히 거짓말이라는 생각에 무시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벌레를 도시 밖으로 몰아냈습니다.”
하칼은 그 이후에 이야기를 기다렸지만, 화연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다인가?”
“그렇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나?”
“그를 충사라고 부르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때 일본 정부에 큰 혼란이 왔기 때문에 그 이유를 확인하려 알아본 것뿐이라, 이 이상은 알고 있지 않습니다.”
“충사?”
“네, 벌레를 잘 다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도 알을 알고 있다는 건 실물을 봤다는 뜻 아닌가?”
“맞습니다. 그때 이에에 갔었습니다. 조선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벌레들뿐이었죠. 그렇기에 엄청나게 위험합니다. 독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알겠다.”
그들은 이 층을 지나 삼 층으로 올라갔다. 창문 하나 없는 건물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약한 냄새와 습기가 심해졌다.
특히나 삼 층은 계단에서부터 악취가 났다. 분명 무언가가 썩는 냄새였다.
크르릉
삼 층에 도착하자 그들은 격한 환영을 받았다.
“흩어져라!”
그들은 하칼이 말하기 전에 이미 몸을 피하고 있었다. 삼 층에는 일 층에서 만났던 괴물이 네 마리가 있었다.
하칼과 트러스티 그리고 수연과 성학은 각각 한 마리씩 맡았다. 수연은 두 자루의 검으로 쉴 새 없이 공격하며 괴물을 밀어붙였다.
그녀는 변칙적인 움직임을 통해 빠르고 얕은 공격을 퍼부으며 틈을 만드는 검술을 구사했다.
때로는 한 자루를 발판 삼아 도약을 하거나 이미 내리친 검에 다른 검을 한 번 더 내리치며 방어를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과 유연함으로 괴물의 공격을 피하다 순간적으로 보인 틈 사이로 칼을 찔러 넣었다.
반면 성학은 한 자루의 검으로 공격과 방어가 균형 잡힌 정석에 가까운 검술을 구사했다.
빠른 발보다는 적의 공격을 보고 간결한 움직임으로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로 괴물의 공격을 피하며 힘 있는 일격을 꽂아 넣었다.
그의 주특기는 곡선의 검 날로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날아오는 괴물의 꼬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내리찍는 손톱을 검으로 가볍게 흘려보낸 뒤 괴물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단숨에 목을 베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성학이 괴물의 목을 베었을 때쯤 하칼은 외손에 들고 있던 개틀링건이 수십 발의 총알을 무자비하게 쏟아내며 괴물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
괴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기는 모습을 보던 성학이 낮게 신음을 냈다.
“다 됐습니다. 빨리 올라가시죠.”
트러스티는 이런 모습이 익숙했다.
“그래”
하칼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개틀링건의 총구를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그들은 다음 층으로 가다 악취의 원인을 찾았다.
계단 옆에 인간의 두개골과 뼈가 무더기로 쌓여있었고 바닥에는 찢어진 일본군의 군복이 있었다.
“자신들의 병사를 먹잇감으로 준 것인가?”
트러스티가 중얼거렸다. 하칼은 계단을 오르며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뼈 무더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은 무척이나 높았다. 세 번째 층의 천장이 높기는 했어도 이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계단은 거의 건물의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듯했다.
그들은 서둘러 계단을 올라 끝에 도착했다.
마지막 층은 보통 생각하는 건물의 구조가 아니었다. 계단의 끝은 건물의 마지막 천장 바로 밑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가 밑으로 뻥 뚫려있었다. 다시 말해 삼 층의 바로 윗부분부터 건물의 꼭대기까지 한 개의 방이었다.
계단으로 올라온 출입구를 기준으로 마치 그릇처럼 가운데가 푹 파인 방의 가운데를 감싸 위에서 아래를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뻥 뚫린 방 아래에는 흙으로 된 땅과 웅덩이 그리고 온갖 식물들이 뒤엉켜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수많은 벌레가 기어 다니거나 날아다녔다.
“칼은 인간을 날카롭게 만들고 힘은 인간을 오만한 자리로 인도하지. 제 발로 찾아온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소리는 그들이 들어온 입구의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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