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접신(2)

“어쩌면 거구귀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청진은 입 한가득 욱여넣은 밥을 씹어 삼키며 말했다. 그가 가져온 음식은 주먹밥이었다.
조선의 쌀로 지은 밥에 참기름과 소금을 뿌려 간을 맞추고 뭉쳐서 주먹 크기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외에 여러 그릇에 여러 가지 나물들이 있어 주먹밥과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었다. 미카엘의 입맛에는 꽤 잘 맞았다.
“나 조금만 더 줘”
라파엘라의 입맛에도 맞았는지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좋아하셔서 다행입니다.”
“맛있어요.”
라파엘라가 대답했다.
“입에 있는 거 다 삼키고 말해”
미카엘이 라파엘라의 입가에 붙은 밥풀을 떼어내며 말했다.
“응”
“이건 김치라는 겁니다. 조금 매울 수도 있지만, 한 번 먹어보세요.”
청진이 작게 찢은 김치를 라파엘라에게 주었다. 라파엘라는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씹어 먹었다.
“맛있어요!”
라파엘라는 좋아했다. 반면 미카엘의 입맛에는 조금 매운 감이 있었다.
“근데 누가 거구귀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요?”
“사람들 말로는 조선 정복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이 평양 근방에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이가 많아 은퇴한 퇴역군인이랍니다.”
나이가 많아 퇴역했을 정도라면 정복전쟁에 대한 기억이 선명할 것이었다. 이제 그가 거구귀를 만났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었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름이나 군인 때 직책이 뭐였는지 아시나요?”
미카엘이 물었다.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그저 평양에서 멀지 않은 산속에 살면서 사냥을 하고 간간이 도시로 내려온다고 합니다.”
청진이 대답했다.
“사냥이라...”
“전쟁터에서 평생을 지낸 군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인 것 같군요.”
청진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군인이라고 꼭 그렇게 문명과 동떨어져서 살 필요는 없습니다.”
미카엘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막지 않죠. 불법도 아니고 사람들 역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견디기 힘든 거라 생각합니다.”
“어째서요? 오히려 힘든 전장을 벗어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어지지 않나요?”
라파엘라가 물었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 수도 있지만, 몸이 적응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요. 매일 죽음을 맞이하다 보면 죽음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을 보며 견디기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언제나 걱정이 앞서고 이상한 의심과 상상에 사로잡혀 자신을 괴롭히겠죠. 전쟁은 사람에게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겨 괴롭힙니다.”
청진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자신의 어두운 앞날이라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했다.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 엄청난 상처를 입히는 거죠. 괴로운 악몽에 시달리고 미안하면서도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신을 볼 때면 구역질나죠.”
라파엘라의 말에 청진은 놀란 눈을 떴다.
“마치 그런 경험이 있는 것만 같군요?”
청진이 물었다.
“경험이라...”
라파엘라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우리는 전쟁고아입니다. 어쩌면 당신보다 더 전쟁을 많이 봐오고 겪었을 겁니다.”
미카엘이 대신 대답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죠...승리한 자나 패배한 자나 똑같습니다. 가장 큼 피해자는 패배자가 아닌 자기 뜻과 상관없이 전쟁에 휘말려 많은 것을 잃어버린 백성입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같이 살면 되면 치유가 되지 않을까요?”
라파엘라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때로는 가족들이 최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의외로 그런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착취하고 괴롭히지”
미카엘은 음식을 먹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그의 머리에는 자신의 아비이자 몽제국 최고의 기계공학자인 아젤혼 박사를 떠올렸다.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프군요.”
청진이 한숨 쉬며 말했다.
“미안,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라파엘라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아니야! 네 이야기를 한 게 아니야!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진짜야”
미카엘은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야...내가 눈치도 없고 이해심도 부족했어...”
“그랬군요...라파엘라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요...”
청진도 라파엘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니! 아니라니까? 진짜로!”
미카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났다.
“장난이야”
라파엘라가 웃으며 말했다.
“뭐?”
미카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장난이라고요.”
청진이 말했다.
“오빠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하니까, 장난친 거야”
라파엘라가 말했다. 그러자 미카엘은 긴장이 풀리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본 라파엘라와 청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미카엘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하하하하”
라파엘라와 청진은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처음에는 씩씩거리던 미카엘도 이내 웃음이 전염되어 같이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미카엘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만, 가장 믿고 의지할 사람이 누구냐 했을 때 가족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보통입니다. 저는 두 분을 보고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미카엘은 청진의 말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오빠가 저를 잘 챙겨주기는 하죠.”
“부럽습니다. 저는 외동이라 알 수 없는 감정입니다.”
“아무튼 밥 먹고 그 퇴역 군인에게 가보죠.”
미카엘은 잠시 엇나갔던 주제를 다시 돌렸다.
“그건 안 됩니다. 무리하다가 몸이 더 상한다면 오랜 시간 고달파집니다. 어차피 라파엘라님의 몸은 시간이 조금 지난다 해도 더 나빠지지는 않지만, 미카엘님의 몸은 조금만 쉬어도 많이 회복됩니다.”
청진은 깨끗하게 비어버린 그릇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말했다.
“맞아, 조금 지체된다고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니까 조금만 쉬자.”
라파엘라도 미카엘을 보며 말했다.
“알겠어. 그래도 그리 오래 쉬지는 않을 거야”
미카엘은 고집을 꺾었다. 그 후 셋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평양에서 첫째 날을 보냈다. 그리고 둘째 날도 첫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미카엘의 몸은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거의 온종일 잠에 취해 밥도 한기밖에 먹지 않았다.
미카엘은 셋째 날 새벽이 돼서야 잠에서 깨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팔과 배 주변에 꿰맨 곳은 이제 거의 다 아문 상태였다. 검은 피딱지가 자리 잡으며 주변 살을 간질였다.
미카엘은 간지러움을 참으며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아침이었다.
정신이 맑으니 눈도 같이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호텔 밖으로 나왔다.
조선의 새벽은 그 어느 곳보다 새파랬다. 아직 태양이 뜨지 않았음에도 거리에는 일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보였고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이제야 귀가하는 사람도 보였다.
“좋은 아침이오.”
그때 누군가가 미카엘에게 인사했다. 미카엘은 깜짝 놀라 인사를 건넨 사람을 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를 아시나요?”
미카엘이 물었다.
“예끼! 어른이 인사를 했으면 인사를 해야지! 그게 무슨 버릇이야!”
노인은 별안간 역정을 냈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카엘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러자 매섭던 노인의 표정이 한순간에 다시 온화해지며 미카엘의 등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사실 키가 큰 미카엘에게는 허리 부분이었다.
“그래그래, 어디보자...복덕이네 둘째 아들이었던가?”
“아닙니다,”
“그러면 저기 저 서 씨네 셋째 아들인가? 아니...키가 좀 크구먼...그래! 한섭이네 막내로구나! 그 집 막내가 키가 컸지! 근데 이리도 컸던가?”
노인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쭉 내밀고 미카엘을 훑었다. 미카엘은 그제야 노인이 정확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인사했다는 것을 알았다.
“저는 며칠 전에 이곳에 온 미카...”
미카엘은 자신을 소개했지만, 노인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어, 그려 잘 지내나? 건강하고?”
“네, 어르신 덕분입니다.”
“내가 뭘, 그냥 약초 몇 개 가져다준 건데”
“감사합니다.”
노인은 지나다니는 사람 한명 한명과 인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인사를 건넨 남자가 지나가자 이번에는 한 여자가 지나가며 인사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어, 그려, 좋은 아침이구먼”
미카엘은 노인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는 재미있게도 모두와 인사했지만, 반 이상은 정확히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들이 다가와 노인에게 자신의 가족이 잘 지내고 있다거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는 둥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는 사살을 말했다.
그때마다 노인은 같이 웃어주거나 고민해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미카엘은 이런 신기한 광경에 넋을 놓고 바라봤다.
“이 사람아! 아침부터 왜 그렇게 서 있는 거여? 일 안 해? 일해야 먹고 살지! 그리고 사람이 몸 성할 때 일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 혀”
노인은 얼추 인사를 끝내고 미카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네, 알겠습니다.”
“머시여! 자네 처음 보는 얼굴인디? 어디서 왔는가?”
해가 뜨자 그제야 노인은 미카엘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저는 몽에서 왔습니다.”
미카엘이 대답했다.
“그려? 그렇구먼, 잘 지내고 나는 이만 들어가 봄세”
노인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결국 노인은 미카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지만, 누군가가 아침부터 살갑게 인사해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미카엘은 미소를 지었다.
“예끼! 누가 이렇게 입고 다닌 다냐!”
그때 노인이 사라진 골목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분명 노인의 목소리였다.
“뭐라고! 이런! 쯧쯧쯧”
시차를 두고 노인의 목소리만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누군가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쾅
이번에는 말소리 대신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은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사람을 치네!”
노인이 커다란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미카엘은 골목으로 뛰어갔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골목길에는 노인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먼지 뒤쪽에는 중요한 부위만 갑옷으로 가린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키가 매우 컸고 온몸에 단검과 총알이 담긴 가죽 벨트를 두르고 있었다.
먼지는 그녀가 담벼락을 부수며 생긴 것이었다.
“용병인가?”
몽에서 자주 보이는 용병들이 입는 옷차림과 비슷했다.
먼지가 가시자 용병의 얼굴이 보였다. 용병은 얼굴 한쪽을 두건으로 감싸고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엉켜있었고 입은 부자연스럽게 씰룩거렸다.
미카엘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의 가려져 있지 않은 오른쪽 눈이 커지며 입이 양옆으로 찢어졌다.
그녀는 찬찬히 미카엘을 훑어봤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욕을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미카엘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찾았다.”
치안대가 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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