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죽음의 문턱에서 2"
“...그랬지, 분명히.”
“그런데 왜? 지금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자네를 아끼고, 자네를 돕고 싶은 내 마음, 잘 알 거야. 그래서, 자네에게 저 아이에 대해 말해준 거고... 자네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기도 하고...”
“...”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지. 저 아이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라고, 자네를 도운 건 아니란 말일세.”
“...그 일에 대해선 유감입니다만. 저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 아이가 제 돈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계속 거짓말을 친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저 여자애로부터 사실을 얻어야 하니까요.”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아.
저 둘의 대화.
너희들 마음대로 해.
날 죽이든지, 팔아넘기든지.
내 머릿속엔 지금...
저 할아버지에 대한 배신감뿐...
나한테 그렇게 살갑게 접근하더니.
결국은, 이 도시의 권력자에게.
더러운 아부나 하려고 날 떠본 거였어.
저 늙은이에 대한 분노에...
온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한다.
...이대로 죽을 수야 없지.
고마워, 할아버지.
살아남을 이유를 줘서.
“...펠리온.”
“네.”
“그러면, 이렇게 하지.”
“...?”
“일단은, 자네와 사건 진위 여부에 대해 다투는 거 자체를 포기하겠네. 자네 말이 맞다고 치세. 아니, 자네 말이 맞아.”
“...어르신?”
“의심할 필요 없어, 펠리온. 무슨 속셈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니신에 대한 자네의 정보력과 영향력, 누가 의심하겠는가. 자네가 많이 알아보고 내린 결론이니, 분명 맞겠지. 자네를 믿겠네.”
“...그럼, 저 여자아이가 제 채권을 훔쳤으며, 그걸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
...그럼 그렇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나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 대신,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라든가 환경, 이런 걸 모두 제외하고 말이야. 나도 사업을 하는 사람인만큼, 사업가 대 사업가로 하는 수평적 제안일세.”
“...경청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저 아이, 내가 데려가겠네. 그 대신, 내가 자네의 채권을 찾아주지.”
“...네?!”
?!!!!!!!
...뭐야.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한 쪽으로 흐르잖아.
“내 말이 이해가 잘 안 된 모양이군. 다시 말해, 내가 자네로부터 채권 회수를 의뢰받은 거고. 자네의 국채를 대신 찾아 주겠다는 제안이네. 그리고 그 의뢰 해결에 대한 수수료로, 이 아이의 목숨과 안전을 받겠다는 말이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가 됐습니다만...”
“그런데?”
“어르신께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제 입장에선 조금 난해해서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도 사적인 영역이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겠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옆에 있는 두 분에게, 칼 좀 집어넣어 달라고 명령 좀 해 주시겠어요? 킨텔, 너희들도 집어 넣어라!”
“...이거, 내가 먼저 말했어야 하는 걸 자네가 먼저 말했구만. 알겠네. ‘그라이스’.”
“네, 형님.”
스르르, 스릉, 스, 스르르릉.
스르, 스르릉.
...뭐냐고.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늙은이.
내가 이 모양이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이제 와서는 무슨 꿍꿍이냐고...
“이제야 조금, 대화할 분위기가 조성되는군요. 제가 어르신의 패기에 눌려, 협상하기가 어려워서요.”
“하하. 늙은이의 체면을 세워주는 건, 펠리온 뿐이구만.”
“별 말씀을요. 그런데, 어르신.”
“...뭔가? 본론을 말하기 전에, 또 부탁할 게 남았는가?”
“아닙니다, 어르신의 제안에 대해 바로 넘어가서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아, 그런가. 말해보게나.”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합니다, 어르신... 제가 지금 하려는 말, 정말로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괜찮네. 해 보게.”
...아니, 잠깐만.
저 할아버지가 도대체 누구기에.
저렇게까지 공손하냐고.
주황 펠리온, 그렇게 위세 좋던 사람이잖아.
심지어, 저 무서운 킨텔마저도...
절절매게 만드는 사람인데...
“어르신의 신용과 능력,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
“단지... 모든 일에 ‘만약’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어르신에게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해, 제 채권을 못 찾게 된다면... 저는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비용’만 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기분 상하셨다면, 용서하시지요. 하지만, 아까 전에 말씀하신... 사업가 대 사업가의 수평적 제안이라는 말... 거기에 의지해서 말씀 드린 겁니다. 저도 사업하는 사람이기에, 손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은 미리 짚고 넘어가야 해서요.”
“...아닐세, 자네 말이 백 번 맞지. 충분히 합리적인 지적이야.”
“그렇다면...?”
“미안하네만, 그와 같은 경우에 대해... 어떠한 금전적 보장도 할 수 없네.”
“...어르신.”
“끝까지 들어주게나, 내 말.”
“아니요, 더 이상 들을 건 없습니다. 그게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더 이상...”
“!!!주황 펠리온!!!”
!!!!!!!!!!!!!!!
어, 엄청난 소리...
우선, 소리의 크기도 크기지만...
평소 말하는 목소리도 아니었어.
울림이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고.
늙은 사람으로부터.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외마디 외침에.
앞에 있는 펠리온과 그의 수행원.
가게 1층에 있는 직원들.
더 멀리 있는, 복층에 킨텔과 그의 수하.
심지어, 할아버지와 같은 편인 장정 두 명까지.
압도됐다, 음압에.
단순히, 큰 소리에다 강한 기세를 담은 것뿐이었을까.
그렇다고 단정하기엔.
우리가 느낀 위압감은 너무 컸어.
...뭐였지.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본 느낌이었어...
“이제, 정신이 좀 드는가?”
어?
원래 목소리다.
하지만, 여전히 겁에 질린 채...
아직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주황 펠리온...
“...내가 지금 거창한 걸 요구하는 게 아닐세. 그저, 이야기할 시간을 조금 달라는 것뿐이야. 내가 지금, 너무 과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어르신... 마, 말씀하시지요...”
...펠리온의 태도가 바뀌었어.
처음에도 매우 공손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 숨겨진 강단(剛斷)은 분명했었지.
하지만 지금의 상태는, 할아버지의 뜻을 꺾으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자네가 나보다 더 훌륭한 사업가니 잘 알겠지만, 책임감은 사업가의 필수 덕목일세. 내가 자네에게 채권을 찾아주겠다고 하면, 그 말엔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지. 그리고 그 말을 지키지 못했을 때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야 하는 것 역시 상도일세. 아닌가?”
“마, 맞습니다...”
“그럼, 다시 말하겠네. 끝까지 들어주게나. 자네에 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 너무 하찮네. 대장간 하나가 전부일 뿐이야. 누가 니신에서 주황 펠리온을 앞에 두고 돈 자랑을 하겠는가. 30 델리아, 우리에게야 엄청난 거금이지만... 솔직히 말해 자네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돈 아닌가?”
“...”
“사실이 그런 만큼, 내가 자네에게 줄 가치는 돈이 아닐세.”
“...그렇다면?”
“자네의 부탁 하나, 무조건적으로 들어주지.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고.”
...참나, 어이가 없어서.
분위기를 잔뜩 잡길래,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장난하나.
장난하냐고.
저런 말 같지도 않은 걸 제안이라고 하...
“저, 정말이십니까?! 방금 어르신의 말... 제가 지금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거 맞겠지요?!!”
??!!!!?!!!?!!!!!?!!
...뭐, 뭐, 뭐야?!
이, 이게 먹힌다고?
어안이 벙벙하다는 저 표정, 뭐냐고?!!
“그렇네. 당연히 다 알고 있겠지만, 추후 논쟁의 여지를 없애고자...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지.”
...말도 안 돼.
저렇게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다들, 긴장하는 기색이잖아...?
지금 이 분위기 속에서...
진지하지 않은 사람, 나밖에 없어...
“나, 한때 ‘다스트쿠트의 빛‘으로 불렸던 ’지오니카디 쿠트라이’. 니신의 주황 펠리온에게 약속한다. 내가 그의 채권을 되찾아주지 못한다면, 내가 그에게 지고 있는 빚 30 델리아의 두 배... ‘60 델리아’ 이하의 가치에 상응하는 부탁을 어떠한 조건 없이 들어주기로 선언한다. 대신, 그 부탁은 금전이나 이 아이와 관련돼서는 안 된다.”
...???
갑자기, 엄청 분위기를 잡고...
저 말을 하긴 했다만...
...허공에 메아리일 뿐이잖아.
돈도 별로 없다며.
무슨 의미가 있겠어, 저 선언이.
그런데, ‘쿠트라이‘?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기도 하고...
“황송합니다, 전...”
“그만. 그 칭호는 됐네.”
“아. 죄,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자네의 대답은?”
?!!?!!?!?!!?!!!?!!?!?!
갑자기 주황 펠리온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춘다?!
무릎이 땅에 닿자, 고개를 숙인다?!...
...
...눈앞에서, 장관이 펼쳐지고 있어.
보고 있는데도, 믿겨지지 않아.
펠리온이 예를 다하자,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
하나 같이 같은 예로, 저 할아버지에게 인사한다...
“으이그, 형님... 아직도 과거를 못 잊고 사슈?”
“...크흠. 부끄럽구만. 그럼 저 아이, 데려가겠네.”
“...”
아무 말 없이,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펠리온.
...아직도 모르겠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
...
텅, 텅, 텅...
내 시야로부터 사라진 할아버지.
그리고, 층계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이리로 올라오고 있는 건가.
의자에 묶인 채, 옆으로 눕혀져 있기에.
시야가 고정돼 있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
“아가씨, 제가 보이나요?”
...보인다.
그래, 이 얼굴이었어.
자상하고 자상했던.
중앙은행에서 봤던.
그 할아버지.
나를 죽였고.
다시 나를 살려 낸.
신비로운 할아버지...
“저... 저한테... 왜... 그랬...던...”
“못 다한 대화는 가서 이야기하지요. 시간이 없어요. 자네들은 빨리 아이를 풀어주게나.”
!!!!!!!!!!!!!!!!!!!!!!!!!!!!!!!!!
“끄아아아아아아악!!!!!!...”
정신을.
잃을 뻔했어.
남자가.
의자 뒤로 묶인.
나의 팔을.
풀어주려다.
나를 잠깐.
건들었을 뿐인데.
내가 느꼈던 고통은.
순간, 생명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혀, 혀, 형님... 너무 아파하는데요? 이거를 풀어주려면, 어떻게든 접촉하게 될 거 같은데...”
“...킨텔.”
“...네, 어르신.”
“들것, 빌릴 수 있겠나.”
“...갖다 드려라.”
“네, 넷!”
“형님? 형님?? 어떻게 해야 되냐고요, 이거...”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끝내는 수밖에. 그게 최선이야. ‘투르프’, 자네는 밖에 나가서 아무 펠리온차라도 구해오게. 내 이름을 대도 상관없어.”
“아, 알겠어요, 형님.”
!!!!!!!!!!!!!!!!!!!!!!!!!!!!!
“끄아아아아악!!!!! 그마아안!!!!! 그마아아아안!!!!!!”
“오, 오... 미, 미안해요... 조금만 참아요, 아가씨...”
...확실히 알았어.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내 온몸이.
으스러진 것 같아.
뼈가 됐던.
장기가 됐던.
뭐가 됐던.
그거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이 고통...
...
“형님! 구해왔어요, 펠리온차!”
밖에서 들리는 소리.
“보통과 같이, 똑바로 눕히지 마.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눕혀, 옆으로! 지금 이 모양에서 최대한 자세의 변형을 주지 말라고.”
“아, 알겠어요!”
“...옆에 있는 자네, 킨텔의 수하인가?”
“네, 넷! 맞습니다!”
“자네 손 좀, 잠시 빌릴 수 있을까?”
“아, 알겠습니다!”
“같이 들어주게나.”
“네!”
“조심히 옮길게요, 예쁜 아가씨~ 읏차.”
...고마워요, 우락부락한 아저씨.
거짓말인 거 알지만.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거 알지만.
그 한 마디, 너무나 따뜻했어요.
아저씨의 따뜻함에 보답하기 위해.
들것에 옮겨지는 동안, 이를 악다물고 소리를 삼킨다...
...
“그럼... 출발하지.”
“어르신!!!”
...킨텔의 목소리야.
감겨 있던 눈을 떠 본다.
다행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에.
할아버지와 킨텔이 있어.
“말하게.”
“이, 이런 거... 제, 제가 원했던 게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저도 어쩔 수가 없었다니까요!”
“알지. 자네, 착한 사람이야. 이럴 수 있는 사람이 못 돼, 자네는.”
“...이해해 주시는 군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자네 안에 있는 ‘카’, 자네의 것일세.”
“어, 어, 어르신? 그, 그게 무슨...”
“‘하’께선 자네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도, 자네 옆에 있었던 그 무엇도 보지 않으시지. 오로지 자네의 카만 보시고, 킨텔이라는 사람을 판단할 뿐. 네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너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다.”
“아... 크, 크흑...”
“...이 인사말,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되는군.”
“어, 어르신... 제, 제발...”
“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처음이야, 킨텔의 저런 모습.
거대한 프르슈처럼.
어떠한 요동에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나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나의 내면까지 철저하게 부숴버린 킨텔.
그랬던 킨텔이.
어린 아이처럼 흐느끼기 시작한다.
아까 전, 아직도 아이인 줄 아냐고 무시하지 말라며.
거칠게 대들었던 킨텔.
지금은, 할아버지 앞에서.
스스로 어린 아이가 돼 버렸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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