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죽음의 광야 2"
...
...
“헉, 헉, 헉...”
차오르는 숨에, 정신이 들며.
한동안 뛰다가, 결국 멈춘다.
지온을 버리고 혼자 도망치다가 느껴버린.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가오는 죽음들과 멀어지자.
되돌아오는 이성이.
내 발을 멈춘 것이었을까.
어찌됐든, 내 스스로가.
조금은 안전한 위치에 왔다는 생각에선지.
평상심이 조금씩 돌아오...
?!!?!
...꽤나 오래 뛰었던 것처럼 느꼈는데.
겨우 이 정도만 뛴 거였어?
고작, 이렇게 짧은 거리를 도망쳐 보겠다고...
지온을 버리고 뜀박질을 했던 거였냐고...
시간이 느리게 흘렀는지.
내 카가 멈춘 거였는지.
이유야 모르겠지만...
뒤를 돌아보니, 아저씨는.
불과 20펠 남짓 되는 거리에 있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눈으로 확인한다.
지온을 살리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수백 개의 움직이는 시체.
아저씨를 둘러싸고 있고.
가까이 있는 십여 구는 이미.
지온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한 상황.
그에 반해, 지온은.
어떠한 전투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살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무기도 뽑지 않은 채.
우두커니, 제 자리에 서 있어...
이, 이대로는 안 돼!...
진짜로 지온의 목숨이 위험해!!
“제, 제기랄! 다시 가서 구!...”
턱.
?!!!!...
처음에는, 지온을 다시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어.
그 한 발을 시작으로.
지온을 향해 뛸 계획이었겠지, 애초에는.
그러나, 이러한 나의 의지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의 무서움에 비해.
...너무나도 나약했고.
공포는.
또 다시.
내 자아를.
묶어 버렸다.
“크흡... 흑...”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하찮은 나약함에.
다시 흐르는 눈물...
내 자신의 무력함.
내 눈앞의 두려움.
그리고.
아저씨에 대한 미안함에서 나오는.
너무나도 값싼 슬픔이야.
지온을 배신하고.
아저씨를 버리고.
혼자 도망친 것에 대해.
‘어쩔 수 없었어‘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비겁한 변명이.
그저, 눈물이라는 치사한 형태로...
내 눈에서 표현되고 있어...
...?
...??
아니...???
더러운 슬픔을 내뿜으며.
전방을 계속 바라보는 와중에.
내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음을 깨달았어.
내가 본, 시체들의 마지막 움직임.
수십 겹으로 지온을 에워싸고.
가까이 있는 십여 구는.
아저씨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그들.
...그런데?
그게 전부야.
거기서 멈췄다....
지온을 둘러싼 죽음들.
더 이상 아저씨에게 나아가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고.
지온 주변에서 아저씨의 몸에 손을 댄 시체들.
그 자세 그대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어.
지온 아저씨도, 역시나.
시체들이 자기를 포위하던, 붙잡던, 뭘 하던 간에.
그 무엇도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자세, 그대로 서 있다...
...방금까지, 공포심에 묶여있던 내 발은.
시야에서 펼쳐지고 있는 난해함에 의해 풀려났고.
이젠 다시 움직여져...
내가 보고 있는 걸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
“...흑... ...흑...”
...?
...??
“흐흑... 크흑...”
“...흐엉엉... 흐윽...”
“크흐흑... 엉엉...”
?!!!?!!
다가가면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어.
내 귀에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한 건...
다름 아닌, 울음소리...
하지만 내 의식은.
청각이 주는 정보를 믿지 않고.
처음에는 그저, 죽음의 괴물들이 내는.
자기들만의 이상한 소리라고 인식했어.
...그러나.
거리가 더 가까워지면서.
모든 게 분명해지고 있다.
이 시체들, 모두.
울고 있다는 걸.
발걸음을 내딛으면 내딛을수록.
점점 커지는 흐느낌.
수백 개의 흐느낌.
겹치고 또 겹쳐.
한가운데의 지온을 눈으로 삼아.
거대한 소용돌이를 자아내고 있어.
아까는, 수백 개의 죽음이 나를 짓눌렀다면...
지금은, 수백 개의 슬픔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크흑... 죄, 죄송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천천히 계속.
걷고 또 걸어.
더 이상, 지온에게 나아갈 수 없었을 때.
아저씨와 나 사이.
움직이는 시체들로 가득 차.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때.
전력을 다해서.
자신의 울음을 억누르고 있는.
지온을 보게 됐고.
눈물범벅이 되어.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채로.
늦어서 죄송하다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자신을 붙들고 있는 시체들을.
자신의 두 손으로도 꼭 붙든 채.
슬픔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내 눈 안에 담긴다.
자신을 수십 겹으로 두르고 있는...
수백 개의 죽음과 함께....
...
내가 보고 있는 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냐는 생각에.
내 마음속, 복잡하고 복잡해...
지온, 그 지온이.
웬만한 이들에게 있어 존경의 대상이자.
엄청난 능력과 카리스마의 소유자가.
두 가지의 최강 금속.
크세타키온처럼 유연하면서.
크팔타크처럼 단단한.
그 지오니카디 쿠트라이가...
저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놓은 채.
한없이 울고 있는 광경에.
나 따위의 초라한 존재는...
어찌할 줄을 찾지 못한다...
나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그 무엇도, 이해하기를 포기한 채.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저들의 슬픔에.
끝내 동참하기로 한다...
...
...?!
눈물에 일렁이는 내 시야 속에서.
어떤 움직임을 포착했고.
눈을 닦아, 그 정체를 파악하려 한...
??!!!?!?!!
...접근하고 있어.
맞은편에서, 작은 체구의 뭔가가.
한 손에 든 지팡이를 짚으며.
아저씨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고.
그런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
느릿느릿 움직이며?
저 존재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다?!
...
!!!!!!!!!!
결국, 지온 아저씨 앞에 서게 된.
정체불명의 대상.
그리고, 또 다시 보게 됐어.
믿기 어려운 모습을.
서로 허리를 낮추며, 예를 표한다고?!
...나한테는 처음이야.
지온이 다른 누구에게 저런 예를 표하는 모습.
“어르신, 울지 마시지요. 어르신이 굳건하셔야, 저희가 살 수 있습니다.”
“크흑... 아닙니다. 늦었어요, 너무나!... 저의 무능 때문에... 상황이 이 지경까지 돼 버리다니...”
“아뇨, 그 반대입니다. 어르신의 능력 때문에, 저희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까지 버텨 낸 사람들은, 또 다시 내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거고요.”
“크흑...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흐흐흑...”
...안 그래도, 그 전부터.
이미 심하게 울고 있었던 지온.
지팡이를 들고, 천으로 온몸을 싸매고 있는.
저 남자의 말 몇 마디에.
그의 마음속에 눌려 있던 슬픔...
더 크게 터져 나오고 있어...
...?!
얼굴을 가리고 있는 후드를 벗자.
드러나는 할아버지의 얼굴.
...살면서, 처음 봤어.
깊고 깊은 주름이 저렇게까지 많은 얼굴을.
그리고, 주름뿐만이 아니야.
너무나 얇디얇은, 시커먼 피부.
할아버지의 얼굴...
마치 해골과도 같아...
아까 내 상태에서, 저 할아버지를 봤다면.
분명히 난, 저 할아버지를 사람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시체라 생각했겠지.
후드를 벗으면서.
드러난 얼굴과 손.
지금까지 살면서, 저렇게까지 앙상한...
사람의 신체는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지온의 말에, 더 이상의 대답 대신.
천천히 다가가, 아저씨의 두 손을 붙잡아 주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응원에 힘을 얻은 듯.
지온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대화를 이어나가려 한다.
“죄송합니다. 지금, 음식을 준비 중입니다... 최대한 빨리 배식되게 할 테니, 이분들의 통솔을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
...할아버지가 지팡이 든 손을 천천히 들자.
수백 구의 시체.
아니, 수백 명의 사람이.
할아버지의 뒤로 천천히 움직이며.
하나의 줄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어.
“‘문지기’ 선생님.”
“네, 어르신.”
...문지기?
“제가 마지막으로 다녀간 뒤부터, 지금까지...”
“...”
“몇 명이 목숨을 잃은 겁니까...”
“어제까지 확인된 수, 모두 89명입니다.”
!!!!!!!!!!!!!!!!!!!
“크아아아!!!...”
“...”
“...젠장!! 젠장!!! 젠장할!!!! 젠장하알!!!!!”
흐느끼는 와중에.
이를 한 번 꽉 깨물더니.
하늘을 바라보며.
허공에다가 엄청난 괴성을 지르는 지온.
그리고는,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자신을 크게 책망하고 있어...
“...어르신.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책은 금물입니다. 어르신께서 계시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돼버렸을 테니까요.”
“더!!! 더 빨리 왔었어야 했습니다! 더 빨리!! 그랬다면!...”
“그만! 그 얘기는 그만. 더 이상의 가책, 그 누구에도 필요치 않습니다.”
“...”
“저희들, 어르신의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 어르신의 주변에서 큰 문제가 생겼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저희를 찾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크흑...”
저 모습 역시.
마타쎄를 제외하면 처음이야.
누군가가 지온 아저씨에게...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
...
...
“얼추, 줄이 웬만큼 만들어 진 것 같군요. 그럼, 항상 받던 곳으로 가라고 하겠습니다.”
“네...”
스윽.
?!!!
줄의 형태가 거의 다 갖쳐졌고.
지온도 자신의 슬픔을 추스른 것 같았어.
‘문지기’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다시 위로 들더니.
천천히 앞으로 뻗었는데.
할아버지 옆쪽에 선 줄.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한다.
상당히 질서 정연하...
!!!!!!!!!!!!!!!!!!!!!!!
“크흐흑!!! 어떻게... 흐흐으... 흐윽...”
“...”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더욱 슬프게 울기 시작하는 지온.
그리고, 울지는 않지만.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후드를 깊게 뒤집어쓰는 ‘문지기’ 할아버지.
나도 곧바로 알게 된다...
그들의 슬픔에 대해서...
할아버지의 손짓 이후로.
수백 명에 의해, 줄이 만들어졌는데도.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끝내 움직이지 않는 ‘돌’들.
...아니.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시체’였다.
오늘까지는 생명이었다가.
마지막 기다림을.
끝내 버텨내지 못하고.
죽음이 돼 버린.
갓 만들어진 시체...
지온과 문지기 할아버지의 대화를 듣고.
뒤늦게 깨달았어.
이 사람들, 나의 두려움이 만들어 낸 허상과 달리.
죽음도, 시체도, 그 무엇도 아니었으니까.
단지, 죽기 직전까지 굶주리고 있었던...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지온이 오늘 음식을 가지고 온다는 소식에.
생존의 희망을 가지고, 이렇게 모였지만.
아저씨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오늘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아니, 마지막 순간을 버텨내지 못하고...
결국, 이 자리에서 죽어버린 사람들...
처음에는 다른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사이에 묻혀.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나서야.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채.
모습을 드러낸 돌들.
저 돌들이야말로...
진짜 ‘죽음’이었어...
딱딱히 굳어 버려, 진짜로 돌이 된 저들이...
내 가슴을 천천히 옥죄어 온다...
“어르신... 그 89명에서, 이 사람들의 수를 더해야겠군요...”
“...”
“오늘이 정말 큰 고비였습니다. 만약, 오늘도 오시지 않았다면...”
“...”
“...내일은 오늘 죽은 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테지요. 어르신께서는 저희에게 있어, 정말로 간절한 시기에 때 맞춰 오신 것입니다.”
“...”
이제는, 급기야.
아랫입술에 피가 나면서까지, 이를 악물며.
울음소리를 참으려는 지온...
하지만, 소리는 참을 수 있어도.
눈물은 참을 수 없었다.
아저씨의 눈, 코, 입에서 나오는 물은.
지온의 꾀죄죄한 옷과 메마른 광야를 적시고 있다.
꼬옥.
...이제야.
너무나도 늦었지만, 이제야.
이 모든 상황을 뒤늦게 이해해 버린 난.
지온의 뒤로 다가가, 아저씨를 살포시 껴안는다.
꽉 껴안고 싶었지만.
아까 전, 아저씨를 버리고 도망친 데에 따르는 염치가.
내 행동을 조심스럽게 만들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지온을 뒤에서 안은 이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었기에.
“느키티.”
“...네.”
“배고프니?”
“아뇨... 전혀...”
“알겠다. 그러면, 잠시 나를 도와줄 수 있겠니?”
“...네.”
“그래, 그럼. 가자.”
“아저씨! 아, 아까는...”
“아니.”
“네?!...”
“...아무 말도 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나는 당연히, 아까 일에 대해.
지온에게 사과하려 했어.
하지만, 지온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내 말을 곧바로 잘라 버렸다...
...
...
사람들이 줄을 선 곳은.
이곳에 오자마자 봤던, 허름한 벽돌 건물.
돌아와 보니, 이미 음식 준비가 끝난 상황이야.
두 명은 계속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 같지만.
나머지 한 명은 배식을 시작하려는 것 같아.
가로로 기다란 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연기.
하지만, 이들에게는 저 열기와 연기가...
‘생기’로 느껴지는 것처럼 보여...
그들은 아직 음식을 받지도 않았건만.
벽돌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와중에서도.
연기만 보고도, 냄새만 맡고도...
숨을 죽이며 울고 있기에...
수백 명으로 만들어진 줄의 머리.
건물 앞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배식은 시작된다.
나와 지온은, 한쪽에 앉아.
이분들의 식사를 멀리서 구경한다.
...우리 둘, 처음에는.
배식 활동을 도우려 했지만.
지온, 음식을 받아가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열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감정에 전염된 나도.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쏟아냈고.
결국, 식사 준비를 위해 일하던.
세 사람의 만류를 수용해.
멀찍이 떨어져, 이분들의 식사를 구경하게 됐어...
...그나저나.
우리가 여기에 오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세 명.
조리사였다.
자루에 담겼던 것들, 모두 식자재였고.
이곳에 도착한 저 세 명.
곧바로 음식을 준비한 거였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뻔한 거였잖아...
‘식자재 상점에서 살 게, 식자재밖에 더 있겠어?‘
...라는 생각.
뒤늦게 깨달으며.
가볍게 자책한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내가 앉아있는 위치 때문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아, 줄의 끝이.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음식의 양.
솔직히 말해, 넉넉지 않다.
맨 처음,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펠리온차에 실린 화물을 보고.
‘뭘 이렇게 많이 가지고 가는 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지온 아저씨가 구입한 식자재.
상당한 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나눠 먹을 인원의 수.
너무나도 많기에.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음식.
뭘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빵 한 덩이와.
걸쭉한 국 한 그릇이 전부야.
그런데, 국그릇은 신기하게도.
각자가 하나씩 다 구비하고 있어.
대부분 프르슈를 깎아 만든 거였고.
간혹 가다가, 펠로 된 그릇도 보여.
자신의 차례가 되면.
품속에서 그릇을 꺼내서 국을 받고 있어.
...마지막으로.
내 눈에 들어왔던 사람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음식을 먹기 전, 울음을 터뜨렸다...
이미 한참 전부터 흐느끼고 있었기에.
겉으로 보면, 더 이상 울 힘.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에.
음식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쏟아낸 그들의 감정.
나의 눈엔, 너무나 극적이고 절실하게 비춰졌어.
해골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식사 앞에서 각자가 보여준 눈물과 오열은.
으리으리한 식탁 앞에서.
하의 이름을 들먹이며 낭송하는.
어떤 이름있는자의 식사 기도보다도.
하스테리아에서.
하의 최고가치를 인용하며 연설하는.
하키온의 정례 기도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경건한.
하를 향한 기도였다.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격하는.
하를 향한 감사였다.
비록, 나는 저 모든 것을 보지 못했고.
그저, 지금 내 눈앞의 광경만 봤지만.
확신해.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나뿐만 아니라, 이 광경을 본 그 누구도.
나처럼 생각할 거란 사실을.
...동시에.
수백 명에 둘러싸여.
그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이 모든 이들과 함께.
고통을 공감했던 지온의 모습은.
마치, 하와 같았어...
하? 카? 타?
몰라.
모르겠다고, 도통.
‘타카‘는커녕, 특수 능력의 기본이라 불리는.
‘카타’도 쓸 수 없는 나.
카이트와 카이파는 말할 필요도 없고.
카의 각성조차 체험해 보지 못한 나.
하의 옷자락이라던가 그림자는커녕.
하스테리아조차,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
이 세상을 넘어, 온 자연을 초월해.
전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는.
하, 카, 그리고 타.
이 세 가지 개념에 대해.
나 따위 하찮은 존재.
언급할 자격조차 없겠지.
하, 카, 그리고 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창조주이자 유일신.
‘하’
하가 정말로 존재할까?
글쎄, 난 모르겠어.
아니, 정말로 솔직하게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저,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겠지...
세상이 신봉하고, 사회가 강요하니.
하의 존재, 내 머릿속에 주입됐긴 했는데.
세상을 살아갈수록.
하란 존재는 허구에 불가함을 깨닫게 돼.
이 세상, ‘전지전능’한 존재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초라하고 이상한 점들이 많아.
모든 걸 할 수 있고 모든 걸 아는 존재가.
이 세상을 만든 게 아니라.
그저, 자연이라는 존재가.
자기 스스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거겠지.
자연에 대해 이해와 설명이 필요했던 인간들은.
그저 ‘하’라는 개념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자신이 창조해 낸 개념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그걸 진리로 믿기 시작한 거야.
...좋아, 좋다고.
그건 그럴 수 있다 치자.
‘자신이 믿고 싶은 걸 믿는다‘
우리 인간의 속성 중 하나이니까.
하지만,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신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과 극단적 신념을 위해.
얼마나 잔혹하고 비이성적인 짓거리를 자행해 왔는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악행을 저지르며.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하의 영광, 하의 이름, 하를 향한 경배 등.
하와 관련된 모든 걸 아우르는 개념.
‘신성’
정말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하가 존재한다면.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팔아먹으며.
온갖 추악한 행동들을 일삼는 이들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철저히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이 자신에게 주입한 생각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딱 한 번만 다시 바라본다면.
그 누구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하지만.
자신의 앞에 놓인 식사에
감격하고 또 감격하는 저들을 보며.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한.
지온의 품성과 능력에 감탄하며.
하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는 나조차...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돼...
만 번 양보해, 내 생각이 틀려서.
정말로 이 세상이 전지전능한 존재에게 만들어졌고.
모든 걸 다스리시고.
모든 걸 심판한다는.
유일신, 하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하의 모습, 내가 아까 봤던...
지온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달아난 나와는 달리.
빈곤에 의해, 죽음에 문턱에서 허덕이는.
오갈 데 없이, 굶주리며 방황하는 이들.
결코 저버리지 않고서...
비록, 완전하게 구원하지는 못할 지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스로를 묵묵히 희생하며.
최소한, 이들의 고통과 고난을.
같이 공감하려는 존재.
이보다도 더 고귀한 대상...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 역시.
하는 실재하는 게 아니었어.
하스테리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서.
하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력과 돈을 움켜쥐고 있어서.
하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해 왔던 고귀한 가치들을.
자신을 희생해 현실에 구현하는 존재.
인류가 이상향을 마음속에 그리며 꿈 꿔 왔던.
‘하’와 그의 뜻을 실천하는 존재야말로.
진정한 하가 아닐까.
...어쩌면, 머나먼 옛날에.
누군가가 지금의 지온과 같은 대상을 보고는.
그 대상이 보여준 존귀함과 숭고함을 경험하고 나서...
지금의 하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하의 존재를 부정해 왔던 나조차.
오늘만큼은 삼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지온.
본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라는 개념을 내가 이해 가능한 범위에서 구현해 냈고.
...결국,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어.
하란, 무엇인지를.
하는, 누구인지를.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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