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의식
천하제일 어쩌구 대회로 인해 차원의 경계가 흐려진 틈을 노린 고대신은 포탈을 여는 의식을 위해 인류왕국의 수도 근방에 나와 있었다. 이미 제국에서도 최고수준이라 할 만한 인력을 투입했지만 이것만큼은 차원간 이동에 지식이 있는 그가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이곳은 혼돈의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평원. 의식을 위한 제단을 구성하기에 알맞았고, 설령 왕국군이 위험성을 눈치 채고 쳐들어온다 해도 나름대로 거리가 있던 지라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즉, 고등학생처럼 의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변을 감지하고 움직인 사람이 아니라면 의식의 현장을 발견하는 건 전제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제단을 준비하던 병력 일부가 급습 당했다는 보고를 들은 고대신은 제단을 등진 채 현장에 발을 들인 고등학생을 맞이했다.
“왕국에 제법 감이 뛰어난 인재가 있었구나. 너희의 마지막 저항 같은 거겠지. 후후후······. 이제 와서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저기······.”
“허나 늦었다! 포탈은 열린다. 너희가 벌인 축제의 열기로, 저 천억 광년보다 먼 하늘에서 공포가 형태가 되어 내리리라!”
“아니 저기요······.”
“하하하하하하! 울어라. 소리쳐라! 기쁜 축일에 종말을 맞이하라!”
“사람 말을 들으라고 이 대머리야! 머리카락하고 같이 고막도 빠졌냐?”
참다못한 고등학생이 내지른 노성에 움찔한 고대신은 슬그머니 로브를 뒤집어 쓴 채 말했다.
“······내가 이쪽 세계에서 들은 말 중에 심한 말로 따지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말이군. 솔직히 조금 상처받았다. 대체 무슨 일이더냐 어린자여. 최종보스의 대사를 생략하는 세대인 것이더냐?”
“최종보스고 뭐고, 여기 뭐하는 중인데요?”
고등학생이 고개를 갸웃하자 고대신 역시 무언가에 끌린 것처럼 똑같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뭐냐, 불경한 차원으로 통하는 포탈을 여는 중인데. 알고서 온 게 아닌가?”
“아닌데요.”
“ ”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지만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서 무심코 왔을 뿐인데······. 그 끝에 이런 위험해 보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 알았다면 조금 생각해봤을 거예요. 아니면 가까운 경비대에 신고하거나.”
“훌륭할 정도로 소시민적인 발상이로군. 그런데 하나만 묻자. 우리 인력 일부가 공격당했다던데, 네 녀석 소행이 아닌가?”
“인력이고 뭐고, 울타리 뒤편에 아무도 없어서 거기로 들어왔는데요.”
“무능한 녀석들. 근무편성표엔 주의를 기울이라니깐······! 잠깐만. 그럼 기습은 누가 했다는 거야?”
“그녀의 이름은 멜티로제.”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고대신은 급히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고대신이 허둥대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본 화이트엘프는 내리까는 거만한 시선을 한 채 자신들의 우두머리에 대해 소개했다.
“유적의 파괴자. 흡혈귀의 적. 그리고 최근엔 카스테라의 포식자로 불리는 자의 이름이지.”
“음, 마지막은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데. 안 그런가?”
“그 경기 저도 보긴 했는데, 소개용으로는 썩 안 좋은 거 같아요.”
“···그럼 그거 빼고. 어쨌든. 우리 누님께선 이미 이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계셨다. 너희들의 사악한 의식도 이제······.”
“예상했다니. 무슨 재주로?”
“그러게요. 중요하진 않을 거 같지만 궁금하긴 하네.”
“···그건 나한테 묻지 말고. 너희 말 안 끊으면 죽는 병 같은 거 있니 혹시? 어쨌든 너희들의 사악한 의식도 이제······.”
화이트 엘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허공에서 나타난 반투명한 거대 촉수에 얻어맞은 것이다. 제대로 된 비명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밤하늘의 하얀 별이 되어 사라졌다.
“사악한 의식을 막는다라······.”
손을 뻗었던 고대신이 팔을 되돌리자 촉수역시 그의 근처로 돌아와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고대신은 아직 포탈을 완전히 넘어오지 못한 촉수가 내뿜는 탁한 자색의 오오라를 두른 채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막바지인 것을, 무슨 수로?”
“···최종보스 어쩌구 운운하더니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아주 허풍은 아닌가보네.”
어느새 고등학생의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얼뜨기 행세를 하며 어정쩡하게 자리를 떠볼까도 생각했지만 고대신의 불길한 안광을 보고 깔끔히 포기했다. 살기 같은 흉흉한 게 아니다. 농부가 잡초를 제거하는 것 같은, 일방적인 죽음을 선언하는 시선이었다.
“떨고 있구나 어린자여. 좋다. 변덕으로 자비를 베풀지. 나는 이대로 저들의 축제 한복판으로 가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여기서 조용히 물러난다면, 그 목숨만은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마. 하나쯤 놔준다 해서 포탈이 완전히 열리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그 말을 들은 고등학생은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굴복의 증표로 생각한 고대신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제단으로 향했다.
이때, 고대신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은 시선을 내린 거지, 물러난 것은 아니다.
굴복했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움직인 것은 단 한 동작으로 베어버릴 수 있는 간격까지 고대신이 접근한 뒤였다.
일섬.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 아래까지 뼈와 근육을 끊고 단숨에 양단.
그 완벽한 참격은 검사와 여도적과 보낸 모험의 증거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식의 영역.
세 사람의 모험은 신화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다. 신을 베기엔 경험이 턱없이 모자랐다.
[259 : ‘의식’의 시간이 로드되었습니다.]
황제의 몸은 절단된 상반신이 땅에 떨어지는 대신, 아지랑이 같은 일렁임과 함께 깔끔하게 복원되었다.
세이브&로드.
지구의 신과 판타지 세계의 신을 신역에 봉인한 뒤로 사용하지 않고 있던 힘을 사용한 고대신은 자신의 몸을 의식을 치르기 전의 상태로 되돌렸다.
모든 것이 갖춰져 가는 지금, 고대신은 능력을 숨긴 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대답은 잘 들었다. 허나 궁금하군. 엘프가 사라졌을 때 이미 힘의 차이는 알았을 텐데. 무엇을 믿고 죽음 앞에 맞서려는 거지? 영웅심인가? 누군가에게 칭찬받기 위해선가? 보수를 받기 위함인가?”
“전부 다야.”
고등학생은 잠시 눈을 감았다.
굳이 고대신에게 들을 필요도 없었다. 실력차가 극명하단 것은 던전에서 생사를 오가는 싸움을 계속해오며 단련한 감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눈을 감자마자 주마등처럼 기억이 밀려왔다.
드래곤이 날뛰던 시골영지.
사냥꾼에게서 배운 이 세계의 상식과 살아 남는 방식.
좀비들과 아무렇지 않게 같이 밥을 먹고, 일을 하던 날들.
검사 브류와 만나고, 도적 나크와 만났다. 나크와의 인연은 시작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스튜는 검사만큼이나 여도적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여행.
중학생이었던 사냥꾼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풍경들.
몇 번을 좌절했는가.
몇 번을 웃었는가.
몇 번을 다시 일어났는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판타지 세계에서 보낸, 생명과 삶에 대한 기억들.
고대신은 그걸 멸한다고 한 것이다.
물론 스튜도 알고 있다.
그는 고대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고대신이 조금이라도 변덕을 부리면 이 평원의 풀보다 쉽게 사라지리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키고 싶었다.
뜬 눈으로 세계가 부서지는 것을 보느니, 온 힘을 다해 막아내리라.
소년의 눈에 담긴 것은 그런 종류의 결의였다.
“전부 다라. 대단히 탐욕적인 자로구나. 실로 어린애다운 발상이야.”
“맞아. 그게 당신이 말하는 어린애가 이 세계에서 살아온 방식이거든. 게다가 선불로 받아버렸지.”
고등학생 수험생에겐 전혀 상관없는 나날들이었다.
실제로도 도움 되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그가 본래 살았던 현실로 돌아가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시간만이 흘렀다.
쓸데없었지만.
단 하나도 쓸모없는 멍청하고 멍청한 판타지의 연속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고루한 문장은 이럴 때 쓰는 게 어울리리라.
지구에서 온 어린 나그네는 신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감사인사만으로는 갚지 못할 것들을.”
“그게 뭐지?”
“삶과 생명(LIVE And LIFE).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그러니 내가 살아온 세상을 지킬 거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뭔지도 모를 멍청한 이유로 사라지게 두지 않을 거야. 그게 어쩌다 나 혼자 생떼를 부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 순간, 어린 나그네의 등 뒤로 포탈이 열렸다.
평원을 감싼 고대신의 불온한 공기와 다르게, 약간의 잉크 향을 머금은 책 특유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를 간질였다.
어린 나그네가 장소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향기와 드래곤이 둥지에서 했던 말을 연결시키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 끝에 있다는 진짜의미는 거리가 아니거든. 세상의 끝에 있다는 건 운명의 종착점에 있다는 이야기다. 오직 주어진 운명과 과업을 모두 달성한 사람만이 무한도서관에 도달할 수 있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뒤에 열린 포탈은 무한도서관으로 가는 포탈.
지금이야말로 운명의 종착점에 도달한 때.
첫 번째 여행의 목적지로 삼았던 곳이, 그렇게 찾아도 도달할 수 없었던 곳으로 가는 길이 지금 그의 등 뒤에 있었다.
돌아서서 딱 한발만 내딛으면 될 터였다.
하지만 어린 나그네는 이를 악물었다.
버텨냈다.
의지가 꺾이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죽이겠다는 말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자의 앞길을 막아섰다.
이윽고 책 향기가 잦아들었다.
“달아나지 않다니. 형편없다고는 말 못할 각오로구나. 좋은 여흥이었다.”
인류왕국의 수도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곡조가 변했다. 끝을 알리는 듯 잔잔하면서도 힘 있는 멜로디다.
밤을 지울 정도로 성대한 환성의 축제를 뒤로 한 채, 어린 나그네는 이날 가장 어두운 어둠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러니 미숙한 아이여. 형편없이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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