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재회
(""가디언"이 상향을 많이 먹긴 했거든?")
"그건 실력의 영역이지."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여전히 승률이 안 나온다는 걸 말하는 거 아니야?"
("반박을 못하겠네.")
실력만 된다면 지금이 밸런스로는 잘 맞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사소한 불편한 점들이 있거나 스킬 자체에 버그가 있는 것이면 개선해야 하는 게 맞긴 하다.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PvP는 할 만하다.
그러면서 정작 나는 "로다란"에서 열심히 사냥 중이다. 마침 "퀴샬리" 덕분에 손을 놓아도 되어서 편안히 마권과 대화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이미 PvP를 즐기고 즐긴 만큼 하루종일 하고 싶진 않다.
사용자 설정, 줄여서 사설방이 테마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러고 싶지 않다.
대회바라기다.
"그래서, "흙마사"는 어떻게 된 거야?"
("아직까지 잘 키우지. 영상이 잘 안 올라오는 건 영상 거리가 없어서 그렇지, 조만간 "로다란"에 입성하면 소식을 채널에도 전달할 수 있을 거야.")
"노잼이라서 진도가 느린 게 아니고?"
("아니. 그것과 관련된 문제가 있거든.")
"뭔뎨?"
("요즘엔 "가디언"보다 재밌어.")
"딜러라서 그렇겠지."
("제가 맞겠습니다, 하면서 [도발] 걸고 패턴 피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합법적으로 벗어나니까 말이지. 잘하는 게 특기는 맞더라도 특기가 무조건 취미라는 법은 없잖아?")
일반적인 논리다. 어떻게 봐도 하등할 수밖에 없는 몬스터들, 레이드 보스라도 몬스터라는 취급에서 벗어나진 않으니까 그런 류들한테서 맞으면서 플레이해야 한다는 것은 재밌는 경험이 될 수는 없다.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재미야말로 보편적인 RPG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물론 RPG가 Roll Playing Game, 역할 분담이란 게 약자로 들어가 있는 단어이긴 하나, 탱커와 딜러 중에서 어느 쪽을 선호하냐면 당연히 과반수 이상이 딜러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회복 계열이나 보조 계열 등은 비교적 소수의 취미라고 받아들여지는 게 일반적이다.
게다가 '라티온'은 이런 회복 계열이나 보조 계열이 필수인 RPG는 아니다. 좀 더 다른 파티원들이 편해지게 만들 수는 있어도 클리어를 시켜주는 역할은 아니다. 패턴을 파훼만 잘한다면 동일 스펙의 여섯 명이 레이드를 클리어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취미와 특기는 말마따나 항상 똑같은 법은 없기 때문에 마권도 까다로운 것이다.
"이해는 하겠는데, 그래서는 내가 "마크원" 레벨을 추월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전향해야지.")
"시청자들은?"
("전향한다는 소리 자체를 농담으로 받아들일 순 없냐.")
"그걸 내가 모르겠냐."
이미 "가디언"이란 인식이 뿌리 박힌 지 오래다. 안 그래도 마권의 채널에는 "가디언" 영상으로 가득 차 있고, 여전히 "가디언"이란 단어가 채널 소개에 들어가 있는 이상 정체성을 감히 바꾸기란 힘들 것이다.
("정녕 내가 "가디언"만 재밌어 하는 진성 변태였다면 이런 고민도 안 했을 건데, 가끔 이럴 때는 너였다고 생각한다 말이지.")
"그러니까, 내가 진성 변태란 거냐."
("말이 그렇게 되네? 근데 맞잖아?")
"뭐라고요?"
("아무 말도 아닙니다.")
정말 못 들었다면 못 썼을 테니 실제로는 제대로 들은 게 맞다.
("불을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던가?")
"언제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던가? 기호에 꼭 이유가 필요하진 않지?")
내가 "OCM(불)"을 하는 이유는 불을 좋아해서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서 불을 좋아하는 이유를 물으면 대답할 수가 없다.
어쩌면 선천적일 수도 있고 후천적일 수도 있다. 기호라는 게 인과율이 적용되는 것이긴 한가. 결과는 있지만 원인은 있거나 없을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파이로매니악과 밀접해 있어서 불, 불타는 걸 좋아한다기보다는 '라티온'의 불 이펙트가 매력적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지난 생각과 연결지어 보면 이게 최선인 설명이다.
"필요 없지."
("그렇다 할 이유 없이 확고한 의지를 가진 편이 더 대단하지. 너는 따로 새로 키울 만한 직업 같은 거 고려 안 하냐?")
새로운 직업, 나에게는 크게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려할 수가 없지. 새로 키우면 레벨 업부터 시작해서 장비를 다시 맞춰야 한다는 것도 있고, 레이드 장비를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로다란"까지 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기존에 키우고 있는 본캐를 키우는 게 훨씬 이득이잖아."
이제 두 번째로 말하는 것으로, '라티온'은 절대 여러 캐릭터를 육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캐릭터 레벨부터 스킬 레벨까지 수치에 한계가 없어서 강화시키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한 캐릭을 한없이 키울 수가 있다. 오직 특정 레이드까지만은 상정하고 육성의 종점을 정하고 플레이한다면 여러 캐릭터를 육성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스템이 한계가 없다고 말하는 이상 나는 "backist"를 가지고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다. 의지가 꿇리는 때가 오지 않는 이상 300레벨까지라도 키울 작정이다.
("그렇긴 하지. 다만, "가디언" 1위가 이미 있다 보니 추월하고 싶어도 격차가 벌어진 만큼 벌어져서 정감이 안 가더라.")
"1위와 차이는?"
("내가 225레벨이고, 그 쪽이 무슨 240레벨인데 어떻게 따라 잡을까. 최소 1달은 접어줘야 희망이 보일 것 같은데. 그나저나 "로다란"이 나오기 한참 전부터 계속 사냥했다는 말인데 미친 거 아니냐고.")
"그런 속사정은 몰랐네."
제약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음 같아서는 열심히 해서 랭킹을 탈환하려고 들겠지만, 스트리머된 입장에서는 단순히 사냥만 하는 모습을 송출하기란 시청자들의 반응이 따가워서 못할 것이다.
그런 방송 콘텐츠를 일삼는 것도 아닌 마권이기 때문에 취미와 특기가 갈리는 것도 그렇고, 목적조차 방송에 맞게끔 강제되어야 하는 상황이라 서글픈 게 맞다.
("어쩌다가 호소하는 장이 됐지?")
"힘내라."
("그러게. 곧 방송을 켜야 하네. 이게 슬럼픈가? 방송을 켜고 싶은 건지 안 켜고 싶은 건지, 켜야 한다는 건 변함없지만.")
"돈 벌고 싶지 않으면 관둬도 상관 없지."
("누가 그러고 싶겠어?")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게 방송을 준비하러 가서 음성 채팅은 끝이 난다.
나야 말하면서도 꾸준히 사냥을 하고 있어 별 손해는 없다. 마권은 방송 10분 전에 통화를 시작해서 이제 끝난 것이라 역시 손해는 없다.
PvP를 하면서 PvE에서 달라진 점은 있긴 하다. 비교적 쓸모 없다고 생각했던 스킬들이 PvE에서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공용 스킬에 대해서 전용 스킬과 비교해서 잔뜩 단점들을 나열한 전과가 있긴 해도, 비교적 안 좋다는 이야기이지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다.
[드래곤 체이서], 똑같이 내 주변에서부터 방출되어 적을 뒤로 밀리게 하는 스킬이라 접근이 조건에 붙긴 해도 이는 생존 스킬로 쓰일 수 있단 얘기다. 공격적인 원거리 포지션에서는 쓸모가 없어도 사냥에서는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게 보통이라서 잘 쓰인다.
[파이어 로드], [드래곤 체이서]와 비슷하다. 둘 다 사거리 자체는 멀지 않지만 접근한다고 하면 유용하게 쓰인다.
어느 스킬을 쓰든 각자 유용한 점이 있다. 그러면서 스텟 보너스는 덤이다.
PvP와는 달리 PvE는 퀵슬롯을 전환하면서 사용이 가능하니 얼마나 스킬을 기용하든 사용자의 역량만 충분하다면 걱정 없이 활용할 수 있다···
···PvP와 PvE가 주객전도된 감이 있다. 본래 PvE만 있었던 게임인데, PvP가 성행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PvP가 중심이 된 듯하다.
저 설명, 똑같진 않아도 비슷하게나마 전에 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낯선 느낌은 '라티온'이 격변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
콘텐츠라는 게 뚝딱 나오는 게 아니라지만, 전쟁 유희가 출시된 이후에 PvE들은 업데이트 내역에서 거의 없는 취급이다. 이번에야 버그 패치 말고 개선점을 내놓았다고는 해도 콘텐츠 자체가 추가되는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나를 포함한 기존 유저들한테는 불만족인 패치다.
"로다란 산맥"의 입장레벨은 200레벨, 기껏 여러 레이드 등이 있다고 해도 레벨제한이 210레벨 전부라서 나는 이미 모든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플레이어다.
마권이 225레벨이라고 했던 걸 생각하면, 이미 저 경지에 이른 플레이어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재미를 찾기란 힘들다. 그래서 PvP가 유일한 탈출구이며, 적응을 못하면 '라티온'이 재미없어지는 것이다.
[Exp +2,516,433]
경험치의 숫자가 7자리로 늘어나도 그만큼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다.
[Lv211 backist]
[Exp:19,645,730/260,245,010(7.54%)]
2백만 경험치 몬스터를 잡아서 2억을 얻으려면 1천마리. 사실 그렇게까지 험난한 과정은 아니다. 1천마리 정도면 얼마나 잡았는지 셀 수 있을 정도이긴 하다.
그러나 그 1천마리를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면 이 게임의 레벨 업 시스템을 더할 나위 없이 허술함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그렇지 않으니까 유저들이 레벨 업에 허덕이는 것일 테고 말이다.
이 1천마리라는 게 "로다란"에서는 불편한 숫자다.
왜냐 하면, 몬스터 한 마리가 준 네임드에 가깝기 때문이다.
퀴샤아아아아-!
펑, 휘익, 퉁!, 퉁!, 콰아아앙!
차례대로 [화염구], [파이어 로드], [볼케이노]x2, [유성우]다. [볼케이노]의 경우에는 분화구 바로 위쪽에 있으면 분출되는 구슬 4개를 동시에 맞기 때문에 사운드가 겹쳐 '퉁!'소리가 난다. [화염구]는 정말 상식적인 [화염구]니 설명은 따로 안 한다.
뭐, 이런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쉬이잉, 싱-
'퀴샤-!'라고 소리를 낸 시점부터 '슈퍼아머', '경직 면역'인 상태로 패턴을 발동하기 때문에 캔슬을 시킬 수가 없다.
무슨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형체에 크기는 내 아바타의 3배, 양손에는 자신의 몸통만한 마체테를 들고 있어 재빠르게 회전하면서 벤다. 나는 미리 몸을 피해 있어 안 맞는다.
말이 메두사지 나름 이 게임의 이용 연령을 고려해서인지 이미지 자체는 순화된 느낌이다. 그렇다고 머리에 치장된 뱀이 징그럽지 않은 건 아니다. 덜 그로테스크한 편이다.
퓩! 퓩, 퓩, 퓩, 퓩, 퓩, 퓩!
뱀이라고 해도 독을 내뱉진 않을 텐데. 회전베기 직후에 멀리 독을 뱉는 것으로 견제를 한다. 제일 첫 발은 내게로, 나머지는 머리에 달린 뱀들이 주변에 난사한다.
회전베기 이후에 하는 콤보 패턴이라 난 맞진 않았지만, 바닥에 뿌려진 독은 거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귀한 분'의 사절단원/(10.93%)]
[화염 톱니바퀴 시전 중 ··· 남은 시간 1.5초]
스킬 두 방이면 죽을 HP니 경직을 먹이고 다음 스킬로 마무리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준 네임드라고 해도 HP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 1천마리 중 1마리 분의 양식이 되기에 무리가 없다.
잡고 나서 독만 안 밟는다면 문제는 없-
[*주의*]
갑자기 화면 정중앙에 저 표시가 뜬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진다.
[화염 톱니바퀴 시전 중 ··· 남은 시간 0.0초]
바로 [드래곤 체이서]를 시전한다.
[드래곤 체이서 시전 중 ··· 남은 시간 1.25초]
[화염 톱니바퀴 시전이 취소되었습니다.]
포기한다. 저렇게 된 이상 못 잡는다. [화염 톱니바퀴]도 즉발 스킬도 아니었으니 간당간당했다.
[곧 침식시키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달아날 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등장까지 -10초]
[등장까지 - 9초]
배경이 검게 물들더니 이윽고 시야를 좁게 만들고 암흑 속에 있는 것처럼 연출된다. 밝게 빛나는 것은 암흑 속에서 번쩍이는 붉은 번개 모양의 이펙트다.
빈번하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긋지긋한 장면이다.
[등장까지 - 0초]
[침식시키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달아나세요.]
[남은 시간 02:00]
['퀴샬리의 방패'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특수 조작키를 눌러 적절히 사용하면 됩니다!]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놓쳤다는 것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다고 저 [침식시키는 자들]을 때린다고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데미지는 0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사실상 무적이다.
[추격하는 수: 3]
그리고 이 이벤트, 나만 걸리는 게 아니라 필드 전체가 걸리는 것이라 나만 쫓기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필드에 나 혼자만 있으면 달아날 때 꼬여들기 때문에 일단 3마리면 평범하거나 적은 수준이다. 2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방심해서는 안 된다.
강제 종료를 해서 생략하는 방법도 있다. 채널이동은 절대 먹히지 않는다. 귀찮으면 그래도 된다.
단지 하는 이유는 이 이벤트를 클리어하면 경험치를 5%나 주기 때문이다. 레벨 상관 없이 5%가 아니라 내 레벨에 맞춰서 5%다. 필드 몬스터가 주는 경험치에 비례해서 높아지는 시스템이다.
씨익, 씨익, 슈우우웅~···
은근히 뿌리치는 법은 간단하다. 어렵지 않게 일직선으로 돌격해오기 때문에 옆으로 빠져나가면 간단하다.
일단 필드에 도움이 될 만한 플레이어가 있는지 확인차 둘러본다. 피할 수 있어도 2분 동안 피하기만 하는 것은 손이 힘들다.
혹시나 상태이상 스킬들을 보유한 직업들이 없는지 살펴본다.
("방패 안 쓰셨나요.")
"네."
내 사각에서 말을 걸어오는 플레이어에게 시선을 돌린다. 피하던 와중이라 이 정도면 여유다.
다가오는 한 아바타. 암흑 속이라서 실루엣만 보여, 대신 눈에 띄는 그 아바타 위의 닉네임을 살핀다.
[Lv215 길다람쥐]
"어."
절대 잊을 수 없는 하필 그 닉네임이라서 반가움과 함께 실망을 안는다.
결국 똑같은 "OCM(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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