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년 프리뷰(4)
타이틀이 벌어주는 시간을 기회로 "루카"의 반응을 살피는 걸 급선무로 한다.
대놓고 보는 건 삼간다. TV에 집중하고 있다고 해도 각도상 내가 바라보는 걸 인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힐끔 본다.
"와···."
그다지 내 아바타와 비슷한 게 등장한 것을 눈치를 못 챈 모양이다.
상황 자체는 다행이긴 하다.
참 다행이긴 한데, 왠지 모르게 안타깝다는 기분도 동시에 든다.
그렇단 말은 내 아바타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말이며, 별로 잘 맞춘 룩도 아니란 근거가 된다.
한순간 알아채서 "저거 혹시···."라는 말을 나에게 해줄 줄 알았는데, 이런 데에서 기대가 배신감으로 변질되는 슬픔을 겪는다니 방심했다.
뭐, 알아채지 못하는대로 아예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니 이쯤에서 그만둔다.
트레일러를 봤을 때의 알 수 있는 점은 신규 콘텐츠란 것이다.
거기서 그친다. "루카"와 사전에 말했던 신직업의 존재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다 알던 스킬들을 2D로 구현했을 뿐인 상황에서 그림자 마귀에 가까운 적의 정체 속에서 신직업의 떡밥이 있었다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해봤자 마을 침공을 막는 정도의 콘텐츠, 라는 인상이 트레일러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한계다.
···그것과는 별개로 킬링타임용으로 저 트레일러는 무지막지하게 멋있게 뽑혔다. 3D 모델링을 2D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고가 있었을 것인데, 차질 없이 완성되어서 우리에게 전달된 게 매우 기쁘다.
타이틀이 띄워졌을 때 밑에 조그맣게 된 글씨가 하청 업체명을 나타내는 단어들일 텐데, 어떤 곳인지 몰라도 이것으로 위상이 올라갔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멋있게 등장해서 해치운 것도 NPC니?"
"아뇨. 다 플레이어들 아바타일 거예요."
"랭커?"
"랭커, 라기보다는 유명한 사람들이죠."
"보통 랭커를 치켜세워주지 않나?"
"'라티온'이 페이 투 윈(Pay To Win)이 아니라서 그럴 거예요. 유명인 중에서 랭커인 사람도 있긴 한데요, 홍보효과로는 랭커보다는 스트리머, 이런 쪽으로 노렸을 테죠."
"다 방송인이구나."
함부로 말하긴 어렵지만, 랭커라고 해도 어차피 '라티온'의 매출에는 그다지 영양가가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현거래를 통해 골드를 수급했다고 해도 그건 유저끼리 주고 받은 돈이기 때문에 회사에는 직접적인 이득은 없다.
그나마 매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라 하면 캐시로 살 수 있는 치장용 아이템을 대량 구입해서 경매장에 올리는 일이겠다. 그러나 그게 랭커가 되는 데에 중요하진 않다.
장비의 성능도 문제지만, 기본적으로 레벨이 1순위라서 장비 성능을 더 좋게 요구하지 않는 콘텐츠 부족 사태에서 꾸준함만이 랭커의 지름길이긴 하다.
···그런데, 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난 유명인이란 소리인데, 부디 트레일러에 있던 "OCM(불)"의 정체가 내가 아니길 빈다.
혹시나 "루카'는 이걸 모른 채 무덤덤하게 있는 게 아닐지 추측한다. 옆에서 듣고서는 마음속으로 웃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배짱이 있었는지는 내가 아는 "루카"로는 그러지 않을 거라 믿는다.
문제는 저 아바타를 참고했다면 도대체 저 트레일러는 언제 완성되었냐는 말이다.
내가 룩을 맞춘 것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1주일 후일 텐데, 기껏 해봤자 완성본을 검수를 받는 기간이 있을 것을, 최소한 사흘 전에 완료되었을 거라 생각해도 참고할 수 있는 기간은 불과 2주도 안 된다.
아바타를 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캐릭터 정보를 볼 수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장비 외관도 그대로 정면 전신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복장을 보는 것 자체는 쉽긴 하다. 그걸 애니메이션에 넣은 수고가 부담스럽게 정성스러워 걱정이다.
천연덕스럽게 내 아바타와 비슷한 외관을 누가 만들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억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하는 게 마냥 트레일러에 등장했다고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게 한다.
"한 직업만 파는 플레이어로서, 영상에 나온 게 누구인지 아니?"
"그···건 왜죠?"
위기가 찾아온다. 전혀 질문하는 의도를 못 찾겠는 소리를 하는 엄마에 대해 당당하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궤변을 찾는다.
"완전 빨갛게 생긴 룩이 있었는데, 그 사람 아니니?"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답을 못하는 것과 더불어서 괜히 "루카"에게도 트리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껏 벗어난 위기를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수준으로 약점을 정확히 노려오니 대응이 힘들다.
"1위에요."
"그래?"
""불단마사"는 방송인이 없어서 1위 아바타를 넣은 것 같아요."
"그 직업만?"
"예, 아마도요?"
살려낸 기회를 걷어 차지 않는다. 나도 거들어준다.
"아마도가 아니고 진짜로 없긴 하죠."
"아하."
이로써 알 수 있었다.
"루카"는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다. 씁쓸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쪽팔린 결말이다.
정말 몰라서 저런 말을 한 게 아니다. 힐끔 보고 있으니 슬쩍 웃음을 지으며 나를 놀리는 듯해서 사태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당장 감상을 물어보긴 그렇고, 비하인드 때 설을 풀도록 하자.
핵심 트레일러가 지나간 후의 쇼케이스는 나에겐 환영받지 못할 전개를 보여준다. 1주년이라 신나는 건 알다마다.
그렇다고 쇼케이스에서 우리 유저가 알고자 하는 건 이들이 어떤 업데이트를 진행할 것이고 향후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지···
어둑어둑한 배경에서 조명이 빛나더니 난데없이 오케스트라 무대가 튀어나온다.
여기에 가사를 적는 건 민폐다. 트레일러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향이 많은 건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예술적이라고는 못하겠다. 한계는 게임 홍보용 노래이기 때문에 중간에 들어간 밴드 사운드도 정통 오케스트라와는 친화적이지 않은 타겟층을 위한 배려이니 무난한 무대다.
이걸 지켜보는 엄마를 포함한 우리가 7분 동안 아무 말이 없었으니 무난한 것도 아니었나. 목적성과는 동떨어졌다는 비판을 피할 순 없겠다.
무대가 지나가자, 올 것이 왔다는 내 촉이 활기를 되찾는다. 정돈된 상태에서 일제히 지휘자부터 가장 안쪽의 연주자가 악기를 들고 나간다. 그 말은 그대로 무대를 활용하겠다는 의미로, 좌석 수가 웬만한 관객석 못지 않게 많이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도 치우지 않는다는 건··· 여기서 스탑.
("저희의 '라티온'을 1년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아아~")
아이돌 무대 팬에 버금가는 환호성이 스피커에서 들린다. 쇼케이스 답게 마이크는 진행자에게만 있을 것인데, 그 마이크에 가기 전에 있는 장애물을 뚫을 정도면 믿기지가 않는다.
1년, 이만한 팬심을 쌓는 빌드업이 있었긴 했다.
"GM심마니"에겐.
("그렇게 많은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밸런스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여러분이 지탱해주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전쟁 유희'는 성급히 냈던 콘텐츠라고 심히 사죄드립니다.")
제대로 모습이 나오진 않고 있다. 무대 뒷편에 실루엣이 대신 나와 꾸벅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게 실제 그의 모습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과 직후 실루엣이 점차 작아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실제 "심마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전쟁 유희'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으시다면 본 쇼케이스에도 내용이 언급될 테니 기대해 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반년이나 PvE 콘텐츠에 질리셨던 분들을 위해서 오늘 그 갈증을 해소해줄 놀랄 만한 소식이 메인을 장식하고 있으니! 다 함께 소리를 질러보죠!")
아비규환, 은 안 좋을 때 쓰는 말이니까. 이 상황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갑자기 단어가 안 떠오른다.
PvP만 즐기는 사람에게는 아비규환이 되긴 하겠다마는, 워낙 PvP라는 콘텐츠가 발전이 없어도 즐기는 사람은 즐기는 마이너한 콘텐츠이고, RPG의 꽃은 PvP보다는 육성이기 때문에 PvE가 환호받을 수밖에 없다.
신나는 BGM이 흘러나오면서 "심마니"도 신이 나는지 실루엣부터 실체까지 무대의 맨앞까지 뛰어나온다. 평소와 같은 정장 차림이긴 하나 뛸 때만큼은 정장이라기에는 편해보여서 정장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정장처럼 보이는 스포츠 웨어가 아닌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무작정 달려나가서는 별로 하는 건 없다. 마이크를 최대한 뻗어 관객들의 소리를 모으는 것밖에 없다. 그다지 장기자랑이라도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사회자로 나온 이상 장기자랑은 과분한 게 맞다.
("이제 혼자 떠드는 건 그만두겠습니다. 이미 손님들이 잔뜩 와 있다는 정보가 퍼진 걸로 기억합니다. 극비, 는 아니긴 합니다. 신신당부해서 손님들에게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추겼습니다. 어떻게든 알리라고 말입니다. 하필 주말이 아닌 주중에 일정을 잡아 일부 피치 못한 사정으로 모셔오지 못한 손님들도 있어 아쉽습니다. 다음 쇼케이스는, 아직 확답을 드리지는 못합니다만 아마 이번 겨울방학, 주말에 할 수 있다면 그 때는 제대로 여러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게 기획하겠습니다.")
서론은 이제 끝이다. 본론으로 들어간다.
("자, 모두 나오시길 바랍니다! 아, 저는 "GM심마니"입니다.")
[캐스터 GM심마니]
그 말 따라서 밑에 자막으로 "GM 심마니"가 표시된다. 라이브 중에 자막이 송출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의도로 보인다.
그도 그런 게 무대 뒤에서 서서히 게스트들이 등장할 때 실시간으로 자막이 달리면서 나온다.
게스트는 양쪽에서 한 명씩 큰 간격을 두고 입장한다.
"김귤"과 "성요나"부터··· 기준은 없는 듯하다. 각각 구독자나 조회수에서 공통점이 없는 둘이다. 뒤이어 나온 "고고봉"과 "칠리서스"를 보면 정말 기준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스킵. 여태 설명도 안 했던 스트리머들도 잔뜩 나오는데 그건 상황을 봐 가면서 소개하는 게 맞겠다.
("여기에 초대 받은 '라티온'의 홍보 대사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홍보 대사들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게임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깊이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우선! 자막으로 닉네임들을 소개시켜드렸지만, 유저들 모두가 모두를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어느샌가 제일 왼쪽에 앉아 있는 "김귤"에게 마이크가 들려있었다. 사각에 있는 스태프가 마이크를 건네준 것으로 추측된다.
마이크 테스트를 거치지도 않고 바로 자기소개로 넘어간다.
("반갑습니다. '라티온' 정보 전문 스트리머'를 맡고 있는 "김귤"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을 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한 사람씩 그렇게 짧게 소개한다. 가끔은 짧지 않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만, 그게 "라임오렌지"였다는 건 비밀로 하겠다. 어떤 코멘트를 남겼는지 말만 안 하면 되는 일이다.
대신 마권이 어떻게 소개했는지만 보여주면,
("'라티온'에서 1년 동안 귀여운 샌드백을 담당하고 있는 뉴비 "가디언", "Mk.1"입니다. 현실에서는 못 버티니 가급적이면 때려주지 말아주세요.
스튜디오에서 직접 본 기억도 있다만, 은근히 TV에 마권이 나오는 게 신기한 노릇이다.
내 친구가 저렇게 유명한 사람이다, 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나 뭉클해지는 건 무엇일까. 동경도 동정도 아닌 무언가에 휩싸여 다른 스트리머들의 자기소개는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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