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권사
이제 '라티온' 이야기로 돌아가자. 시간 배경은 내일이다.
1주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근원"이라는 서버 단위의 콘텐츠를 내놓은 것과 더불어서 아직까지 쇼케이스에 공개된 콘텐츠들이 다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즐길 거리는 차고 넘칠 예정이다.
그렇지만, 두 번째 업데이트는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게는 흥미를 가져다 줄 수가 없다.
""폭권사"?"
"이름이 "폭권사"라네."
"흔한 이름이 아니네."
절대 흔한 이름은 아니다. 어색해 보이는 이름이다. 일부러 한자어로 만들어보려는 안타까운 시도에서 나왔다는 작위성이 훤히 보인다.
그렇다고 '라티온' 전체적으로 한자어로 된 직업명만 있냐면 그것도 예외가 있다. 하필 "가디언"이 '수호자'란 이름이 아니라서 옥의 티라 생각된다.
"본래 같았으면 '블래스터'나 '인파이터'였겠지."
"'블래스터'가 폭발하니까 나은 거 아니야?"
"다분히 그렇지."
직업명과 관련해서는 국내든 외국이든 포화 상태라서 더 이상 나올 게 없긴 하다. 괜히 특이함을 추구하다가는 괴리감이 들어 대중성을 인정 못 받을 상황도 있겠다.
그러나 직업 스타일에 대해서는 늘 있던 그런 직업들과 크게 틀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아이디어 자체는 밋밋할 수는 있다.
단지 '라티온'에서 어떻게 해석했느냐에 따라 다르겠다.
점심 시간에 벌써 올라온 "폭권사" PV. 서둘러 이어폰을 꺼내서 폰에 연결한다.
주도면밀하게 유선이 아니라 무선 이어폰으로 "루카"에게 왼쪽 귀, 나에게 오른쪽 귀를 부착한다.
"직업이 더 늘어날 줄은 몰랐어."
"1년에 한 직업이 나오는 건 꽤 느린 편이야."
"느린 편이야?"
"다들 열심히 만들고 있으니까 분발하는 거지."
그것도 잘은 모르곘다. 분발한다고 해도 언젠가 독과점이 일어나면 다시 나태해질 수도 있는 것이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단지 '라티온'에게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는 게 시리즈가 있는 패키지가 아니라 오랫동안 온라인으로 유저들과 소통할 의사가 있기 때문에 다들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도 콘텐츠가 부족한 건 플레이어들의 역량이 평균 이상이기 때문이다. 레벨업이 단점이라 해도 작정하고 육성을 하면 "로다란"까지 오는 데에 얼마가 안 걸린다.
210레벨 장비를 거의 다 파밍했으니 부 캐릭터 육성에 힘을 쏟는 것이지 그 사람들이 변태는 아니다.
아니면, 10레벨만 찍고 PvP를 하는 방법도 있으나 PvP는 솔직히 외전으로 봐야하는 게 맞다. 각자 취향이 다양해도 RPG의 PvP를 좋아하는 인구수는 얼마 못 된다.
"주먹을 쓰는 직업은 처음이잖아?"
"다 한 손에 뭐든 들고 있는 게 포인트였지? 그리고 주먹을 쓴다고 해도 아예 무기가 없는 것도 아니네."
주먹, 이라지만 스팀 펑크스러운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는 게 꼭 맨주먹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진짜 증기가 뿜어져나오는지는 PV를 보기 전이라 편견을 일단 버린다. 디자인으로는 어딘가에서 분명히 봤던 모양새, 팔을 감싸는 것을 넘어서 송두리째째 집어삼켜서 차마 벗기도 힘든 모양새다. 실제로 탈부착 난이도는 어떠할지 이것만은 설정을 알고 싶다.
"보자."
PV 영상의 시작버튼을 누른다.
첫 배경은 "고즐 왕성"이 아니다. 직업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시작될 줄 알았지만, 서사의 시작은 "희망의 감시탑" 부근에 있는 "마르조나"란 마을에서 시작된다.
분위기가 어울린다. 아까 스팀 펑크스럽다고 했던 게 "마르조나"는 스팀은 아니라도 펑크 분위기가 연출된다. 디젤인지 사이버인지는 모른다. '라티온' 세계의 과학 기술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매직 펑크라는 단어라도 창조해야 하나? 따지고 보면 마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계관은 매직 펑크인 것인지도 모른다.
잡소리는 그만하고, PV의 서사의 중심은 누구인지 나오는 대목에서 솔직히 좀 충격을 받는다.
건틀릿을 만든 사람이거나 착용해서 싸우는 사람을 내보낼 줄 알았더니, 덩그러니 건틀릿을 화면의 중심에 둔다. 배경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되 건틀릿의 정면으로 카메라를 고정한 채로 놔둬 어디로 끌려가는지 지레짐작하게 표현한다.
대략적으로 "마르조나"에서 시작해서 차근차근 하위 마을로 넘어간다고 보면 된다. 각 마을의 바닥 타일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상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게 영상 시작 20초만에 "고즐 왕성"으로 특급 배송이 된다.
("요놈 아주 튼실하게 생겼구만.")
새로운 NPC다. NPC 소개 영상은 아니라서 NPC의 이름은 안 나오지만 저런 생김새 및 차림새의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새로운 NPC다.
그러나 새로운 NPC가 나와도 카메라의 중심은 건틀릿이라서 아직까지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찰나에,
("자, 니 게 왔다.")
NPC가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장면으로 고정 카메라가 끝이 나고 페이드 아웃이 일어난다.
1인칭 화면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플레이할 때 보는 1인칭 화면이다.
필드와 몬스터들이 바뀌면서 각 스킬들에 대한 연출을 보여준다. 단출하게 각 스킬들을 한 번씩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역동적으로 편집하여 각 스킬들의 특징들을 살려낸다.
가볍게 보이는 돌진 스킬만 해도 처음에 보여준 콤보로는 단순하게 넉백을 시킨 후에 연타를 가격하는 연속기였다가도, 다음 화면에서는 넉백 후에 바로 등 뒤로 돌아가는 기동력도 보여준다.
다른 스킬로는 돌진만이 아니라 바닥을 내리쳐서 파동을 일으키는 스킬도 쓴다.
그런데, 래퍼토리가 그리 다르지가 않다. 적중을 하고 나서 연계로 몬스터에게 달라붙어서 팬다. 스킬이 적중만 하면 기동력이 차고 넘치는 건지 당장 알 수는 없다. PV라서 모든 인터페이스가 보이지 않아 알 방도가 없다.
그나마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나그랜샤"를 대상으로 스킬을 쓸 때다. 다른 레이드 보스는 일절 안 나오면서 "나그랜샤"가 나온다.
이유는 보자마자 알게 된다. "나그랜샤"는 기동력이 넘쳐 흐른다는 모습이 어울리는 보스이기 때문에 "폭권사"의 기동력을 보여주기 적절하다.
사실 기동력보다는 추적력에 가깝다. 표식은 영상에서 나오지 않으나 맞추면 특정 스킬들이 활성화되는 그런 기능인 것으로 추측된다. 무조건 적의 특정 위치에 나타나서 공격을 가하는 템포에 초점을 맞춘 직업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저런 직업이 참 화려해도 어렵단 말이야."
"그래?"
난데없이 혼잣말을 내뱉으나 아직 영상이 끝나지 않아서 부가 설명은 나중에 한다.
("거 참, 성질이 급해서 직당히 살긴 글렀구만. 그러니 세상을 빠릿하게 만들면 되지 않긌나?")
아마, 120레벨 스킬로 보이는 스킬의 연출이 나타난다.
감히 역대급이라 말할 수 있다.
'라티온'은 1인칭을 기반으로 하는 VR RPG라서 아무리 큰 스킬을 쓴다고 해도 우리가 우리 스킬을 목격할 수 있는 건 정면뿐이기도 하고 단편이기도 하다. "가디언"의 [수호]나 "저격수"의 [노블 아이] 등이 범위가 전방 한정이라 스킬 표현력을 시전자가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마련이다.
"폭권사"의 근본을 따지면 주먹으로 때리는 것이라서 바닥을 두드리는 것 아니면 앞으로 내지르는 게 정석이겠다. "저격수"도 총으로 앞의 사물을 조준하고(아무리 그래도 옆으로 조준하지는 않으니), "가디언"의 방패가 전방위는 아니니까 그런 궁극기를 가지는 게 이상하지 않다.
화면에 조준선이 나타난 것도 아닌데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앞으로 자신이 돌진할 경로에 흰 기운이 감돈다. 어느 정도 시전자에게 범위에 대한 감각을 심어주려는 전조 현상으로 보인다.
시전이 되면 될수록 묽었던 현상이 짙어져서 빛나기 시작한다.
레이스 코스처럼 진행 경로를 어렴풋이 일어나는 화살표로 보여준다.
그 후, 압도적인 속도감에 빠져들게 된다.
앞으로 내지른 건틀릿에서 분사되는 증기에 추진력을 얻어 앞으로 뻗어나간다.
화면 연출이 '라티온'에서는 최초다. 너무 빠른 속도에 카메라가 바로 따라가질 못하고 느리게 따라붙어 고작 팔만 보이는데 원근법이 생긴다. 점점 흐릿하게 번지는 배경도 거들어서 신속이 아니라 음속 이상의 돌진력을 보여준다.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모르는 궁극기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타이틀이 떠오른다.
[라티온 : 도래/신규 직업, 폭권사]
"폭권사"라는 글자만 크기만 다른 글자에 비해 크다. 막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업데이트 핵심인 만큼 강조하려는 폰트와 색깔을 입혀서 눈에 띈다.
("싸움놀음도 할 수 있지. 해볼텨?")
마지막으로 새로운 NPC가 말해주고 끝난다. '싸움놀음'이란 말은 PvP라는 뜻인데, 난 의외라고 본다.
PvE에서와 PvP에서의 스킬 컨셉들이 다 다를 텐데 한꺼번에 추가하는 건 배짱이 어느 정도 있단 얘기다. PV에서 선보인 건 PvE에서의 내용들 뿐이다만 '라티온' 특성상 PvP에서는 제한이 많을 거라는 예상이다.
"OCM(바람)"의 기동력이 PvP에서는 화려하지 않은 걸 보면 예상이 갈 수밖에 없다. 한 대를 맞추면 무조건 따라붙는다는 추적력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재밌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게 PV의 목적이니 "루카"가 이렇다면 성공한 것이다.
"실제는 다르겠지?"
그러나 그것이 PV의 한계이기도 해서 "루카"가 이렇다면 성공한 것이다. 실패한 건 아니다. 애초에 광고가 무조건 현실적이라면 광고사라는 게 따로 있진 않을 테다. 물론 PV는 광고사에 맡기는 편도 있고 퍼블리셔나 크리에이터 측에서 직접 제작할 수도 있다.
"나는 멀미가 날 것 같아서 안 할 거야."
"응. 충분히 그럴 것 같아."
그럼 본격적으로 아까 말 못했던 PV의 한계와 예상되는 "폭권사"의 단점에 대해서 낱낱이 파헤친다.
그 전에 들키면 안 될 테니 폰을 책상 속으로 넣고 말한다.
"일단 전용 스킬들은 다 살펴보았는데, 과연 공용 스킬은 어떻게 나올까?"
"어? 그러네? 검을 쓰는 직업이 아니네?"
""암살자"나 "광전사" 부류에서 적당히 가져다 쓸 수 있으면 무난하기야 하겠지."
직업의 성능이 3분의 2 정도는 전용 스킬에서 결정난다고 해도 공용 스킬이 아예 없으면 곤란하다.
'라티온'은 전용 스킬이 어떻게 나올지는 몰라도 쿨타임이 그렇게 짧을 것이라고 예상이 안 들기 때문에 공백을 메꿔주는 공용 스킬의 조합도 중요하다.
더군다나 스킬 레벨에 따라 스테이터스가 올라가는 '라티온' 특성이라 스킬이 많으면 그냥 그만큼 스테이터스가 올라가는 것이니 소소하게 중요하다. 랭킹을 신경 쓴다면 중요도는 더 높아진다.
"그 밖에도 이 직업이 사냥에 좋냐고 하면 그렇게 고평가를 못하겠네. 다른 방법이 있으면 몰라도 말이지."
"기동력은 충분하잖아."
"기동력이 아니라 추적력에 의문을 가지는 거야. 이게 추적이 아니고 제자리에서 스킬을 쓸 수 있는지 판단이 되지 않아서 억지로 추적하는 게 불가결이라면 평가를 낮출 수밖에 없어."
"그런가?"
"네임드나 보스의 패턴에 다라 다르긴 해도 웬만한 보스들은 패턴들이 피하고 때리는 걸 강요해서 위치가 고정되는 스킬이라면 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지."
"아아."
어떤 스킬은 앞, 뒤 혹은 측면으로 적을 따라잡는 게 보였으나 "나그랜샤" 전에서는 유리할 수 있어도 탄막이 기본인 보스에게는 추적 스킬이 강제라면 안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럼 자잘하게 피하면서 스킬을 쑤셔넣는 게 불가능하단 것인데, "광전사"나 "성기사"가 컨트롤에 문제가 없는 한 방관을 자주하지는 않는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실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
"실전이라면, 120레벨까지 키울 거야?"
"아니."
"남이 분석하는 걸 기다려야 하겠네."
"그러게."
10레벨이면 PvP에서 모든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게 PvE에서의 스킬이 아니니 애석하다. 스킬 사전 체험 기능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음 시간대는 "폭권사" 업데이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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