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할수록 스킬이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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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an히란
작품등록일 :
2020.08.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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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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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 다크 어비스(4)

DUMMY

11


필립 교수.

다른 루트에서 그는 배움의 상아탑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별 비중 없는 NPC다.

물론 비중이 없다는 것은 스토리상의 이야기.


잠식자를 처리해 나온 부산물을 그에게 가져오면 상응하는 어둠으로 교환해주는, 일종의 상인이었다.


보스의 영혼을 주면 감격하지만··· 영혼을 소모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양을 줘서 큰 의미는 없지만.

잠식자의 팔다리니 갈기니 하는 것들은 소모할 수도 없고, 강화 재료로 쓰는 것도 한계가 있다 보니 쌓이면 팔러 오는 용도다.


아, 바로 옆에 집회소의 전화가 있어서 세이브 포인트 취급이기도 하고.


“저희는 모든 배움을 사랑합니다. 갑작스러운 이상은 재앙이지만, 이 또한 연구하고 탐구하면 극복할 길이 있겠지요. 근원에 접하셨다면 협력을 구해도 괜찮겠습니까?”


이건 전과 비슷하다.

근원에 접했는지 묻는 게 조금 다르지만···.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트는 말수가 그리 많지 않다.

애들이나 집회소의 관리인을 상대할 때나 말을 좀 하는 수준이지.


“감사합니다! 연구가 진척되면 제 연구실도 소개해드리고 싶군요. 우선 근원··· 어둠에 잠식된 자들의 신체 일부를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전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연구실?’


처음 듣는 정보가 은근슬쩍 섞여있다.

다크 어비스의 스토리는 대강 이런 식이다. 고작 한 두 마디, 조금 구체적인 설명은 아이템 설명 등에 의존한다.

따라서 스토리는 대부분 플레이어의 추측에 기반한다.


단편적인 정보가 상당히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어서, 추측한 스토리가 맞아들어가는 재미도 상당히 있다.


“어쩐다. 바로 거래해볼까?”


회차를 넘으면서 쌓인 재료가 상당히 있었다.

특히 보스의 영혼은 남아돌고, 당장 쓸 일도 없으니까 2개씩만 남겨두면 되겠지.


필립 교수에게 말을 걸자 거래창이 열렸다.

가진 소재는 10개, 보스의 영혼은 2개씩 남겨놓고 전부 매각했다.

대량의 어둠이 소지금으로 들어왔다.

받아도 올릴 스테이터스가 없어서 애물단지다.


이걸로 부족하진 않겠지. 설마 부족하겠어?

그런 생각을 할 무렵, 필립이 먼저 반응했다.


“감사합니다. 연구에 큰 진척이 있겠군요. 선생님께서만 좋다면 제 연구실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어떠십니까?”


눈앞에 떠오른 선택지는 간다와 가지 않는다.

당연히 선택은 간다, 였다.

애초에 안 갈 생각이었으면 내 소재를 왜 넘겼겠어.


필립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잠시 화면이 암전되었다가 밝아지자, 나는 으슥한 공간에 서있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레온하트의 코를 찔렀다.


가로등이 보편화된 페어필드에서도 보기 드문 촛불이 곳곳에 눌러붙었다.

기괴하게 녹아내린 촛불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켜져 있었으리라.


“여기가 제 연구실입니다.”


철그럭, 철컹!


쇠사슬이 거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하나가 아니다. 둘, 셋, 열에 달하는 쇠사슬이 거칠게 소음을 토해냈다.

레온하트의 눈에 실험대와 철장이 보였다.

그 안에는 사지가 잘리거나 구속된 잠식자들이 중하급 갇혀 있었다.


“약간의 지출을 감수하고 구한 실험체들입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제공하신 실험체도 여기 있습니다.”


그는 철장 하나를 덮은 천막을 걷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것은 살아있었다.

아니,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못하는 상태였다.

시체를 엮어 어둠의 힘으로 억지로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었을 뿐인 누더기.


선택지가 시야에 떠올랐다.

아름답다. 혹은 역겹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자명했다.


“아름답군.”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선생님이라면 아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부탁입니다만··· 이 아이의 안에 주입할 어둠을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필립 교수는 반색하며 철장 옆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끄집어낸 무언가를 내민다.

레온하트의 몸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거대한 주사기와 스포이드 사이의 무언가.

크기는 사람 팔뚝만한 길이다. 두께도 비슷하고.


[어둠 추출기]

[배움의 상아탑에서 필립 교수가 만들어낸 무기.]

[근원의 기적 중 하나의 원리를 이용해 잠식자의 영혼에서 직접 어둠을 뽑아내 보관할 수 있다.]


다른 루트에서는 얻을 수 없는 장비다.

실제로 인벤토리를 열어보니 오른손에 장비가 가능했다.

접이식 톱을 대체할 주무기라. 성능을 모르니 판단하기 힘들지만···.


‘근원 빌드를 타고 왔으니 제약 플레이라도 하는 건가?’


이런 게임에는 여러 제약 플레이가 있다.

플레이어가 자체적으로 특정 행동을 금지한다던가, 캐릭터 생성 당시 태생 등을 고를 때 하려는 빌드와 동떨어진 캐릭터를 골라 성장을 어렵게 만든다던가.

지금처럼 특정 장비를 착용해 주로 쓰는 세팅을 바꿔 난이도를 올리기도 한다.


어둠 추출기를 장착하자 허리에 매달아둔 접이식 톱의 자리를 대체했다.

무기를 꺼냈다. 오른팔에 직접 매달렸다. 분명 파일벙커가 이런 식으로 장착됐지?

같은 착용방식이라면 무기 사용도 비슷할 터.


구석에서 몇 번 공격을 의식하자, 주된 공격 모션은 찌르기였다.

빠르게 찌르고, 강하게 찌르고, 모아서 힘껏 찌른다.

사실상 찌르기 빼면 없다.


‘제약이 너무 심한데.’


찌르기는 일대일에서는 나쁘지 않지만, 일대다 전투에서는 상당히 별로다.

일점특화인 탓에 광범위한 견제가 어렵고, 모션은 빠르지만 후딜레이가 생각보다 길어 즉각적인 대처가 힘드니까.


나야 뭐, 허도 검술을 기술 삼아 딜레이를 스킵하면 되지만···.

주무기가 바뀐 이상 플레이타입을 바꿀 수밖에 없는 건 조금 뼈아프다.


“제가 직접 만든 어둠 추출기입니다. 그 안에 어둠을 가득 채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고 뭐고 하라는 뜻이다.

주인공은 하라면 해야지. 새로운 전개를 보니 이게 진엔딩 루트일 터.

레온하트의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어둠의 근원에 우리는 접촉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의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어둠의 근원이라.

이 루트에서 진짜 어둠의 이치를 배우는 건가?

꽤나 기대되기 시작했다.


필립 교수의 감사와 함께 배움의 상아탑을 뒤로 했다. 파수꾼 외의 보스는 없는 지역이다.

대신 이어지는 공동묘지에서 보스만 두 마리, 잡몹도 발아래에 체이는 벌레 수준으로 많다.


사냥꾼의 집회소와는 약간 달라고 배움의 상아탑은 일종의 휴식 장소다.

물론 어둠을 연구한다면서 잠식자를 산채로 잡아놓고, 지상층의 일반 학생들도 어둠의 광기에 오염되는 징조를 보이지만···.


“일일이 잡몹으로 채우기는 싫은데 보스는 얼마나 차려나.”


교회까지 돌아서 딱 차면 좋으련만.

나는 낯선 주사기와 스포이드의 혼종··· 어둠 추출기를 쓸며 공동묘지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12


공동묘지는 이름 그대로 수많은 묘비가 자리한 장소였다.

대학인 배움의 상아탑 바로 뒤에 자리한 이유는 두 가지.


본래 교회를 둘러싸듯이 구성되었기 때문이고.

배움의 상아탑에서 기증받은 해부용 시체 등을 공동묘지에 매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배움의 상아탑 뒤로 이어진 공동묘지는 나선을 그리며 교회로 이어진다.

덕분에 공동묘지의 또 다른 별명은.


[죽음의 나선길]


사자들이 안내하는 나선.

직관적인만큼 으스스한 이름이다.

멀리서 바람소리가 을씨년스러운 비명처럼 고막에 파고들었다.


돌로 된 묘비는 이끼가 잔뜩 꼈다.

무생물은 어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죽음의 나선길은 크게 이상한 게 없어 보였지만.


끄으윽, 끼이익.


돌을 손톱으로 긁는 기괴한 소리가 바람의 비명 사이로 섞여들었다.

나선길의 무덤 중 파헤쳐진 것들이 보였다.

이상한 점이라면, 밖에서 파낸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튀어나왔다는 점일까.


“나왔다.”


조금 멀리 회색의 무언가가 기어 다녔다.

어떤 것은 하반신이, 어떤 것은 머리가, 어떤 것은 팔다리가 없었다.

흔히 말하는 언데드인 구울이다.


백골로 부패하지 않은 시체가 어둠에 잠식되어 강제로 움직이는 것.

잠식자의 사체를 기워 만든 누더기도 움직이는데, 잠식된 시체가 안 움직일 리가.


기어오는 시체가 다수였고, 간간히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오는 시체도 있었다.

구울은 대체적으로 느리다. 대신 수가 많고 잡히는 타격이 아니라 구속한다.

한 번이라도 발목이 잡히면 십 여 마리의 구울에게 잡혀 저항도 못한 채 뜯어먹힌다.

플레이어에게 무력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상당히 짜증나는 적이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른 빌드의 이야기.

근원 빌드 한정으로, 구울은 길가의 잡초 수준이다.


“단축 슬롯에서 쐐기말뚝 잠깐 빼두고···.”


평소에는 안 써도 구울 상대로는 효율적인 근원의 기적을 세팅했다.


“근원에게 간청한다. 적들에게 고통을.”


왼손에 근원의 기적을 발동한 순간, 가까운 구울의 머리통에 수도를 꽂아 넣었다.


파악!


구울의 머리통에 검은 어둠이 맺히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동시에 가까이 붙어있던 구울 다섯 마리도 같은 현상과 함께 박살나 지면에 쓰러졌다.


전염되는 파멸.

발동 조건은 자라나는 쐐기말뚝과 같지만, 범위는 근접한 총 6마리의 적.

대신 데미지는 쐐기말뚝의 반절도 안 돼서, 일반 잡몹을 상대로는 최소한 3방. 평균 5방을 명중시켜야 쓰러트린다.


그럴 시간에 보통은 무기를 휘둘러서 쓸모가 없다.

다만 구울은 시체인 탓에 HP 자체가 낮다.

그래서 전염되는 파멸만으로도 쉽게 쓰러트릴 수 있다.


일대다 전투에서 광역기는 시작이자 끝.

더군다나 원샷 6킬이 확정이라면, 할 말 다 했다.


“파멸, 파멸, 파멸···.”


기계적으로 전염되는 파멸을 사용하면서 전진했다.

발에 밟히는 구울은 전부 시체로 돌아갔다.

물론 전화기에서 휴식하면 다시 살아나겠지만.


이윽고 야트막한 공터에 도착했다.

공터에는 작은 오두막이 딸려있었다.

무덤에는 필연적인 존재, 묘지기의 휴식터다.


-방해다. 방해··· 방해다···.


등밖에 보이지 않는 누더기 후드를 쓴 묘지기는 삽으로 땅을 내려찍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방해다······.


파는 것은 흙이 아니었다.

무덤에서 기어 올라오는 구울의 머리였다.


퍽, 퍼억.


피와 살점, 썩은 뇌수가 삽을 내려칠 때마다 튀었다.

돌연 멈춰선 묘지기가 고개를 꺾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각도로 꺾인 목이 돌아가더니, 레온하트와 시선이 맞았다.


-살아있는, 것···!


삽을 어깨에 짊어진 묘지기가 점프했다.

귓가를 울리는 장엄한 현악기의 선율.

보스전!


[나선길의 묘지기]


루트는 달라도 묘지기는 잘 아는 보스다.

점프는 맞으면 구속 패턴으로 이어진다.

뒤로 몸을 뺐다가, 묘지기가 착지하는 순간 어둠 추출기를 내질렀다.


일대일 전투에서는 특출난 찌르기 무기는 정확히 보스의 빈틈을 찔렀다.


푸욱!


살점에 무기가 파고드는 감촉이 생생하다.

데미지는 기껏해야 총 HP의 3% 가량이지만, 이정도면 상당히 높은 축에 속한다.


물론 나는 근원 빌드.

물리적인 공격이 전력은 아니다.


묘지기가 휘두르는 삽은 불규칙했지만, 바람의 이치로 보이는 범위였다.

뒤로 물러나는 대신 1픽셀 단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는, 단숨에 파고들었다.


“근원에게 간청한다. 나의 피를 먹어라.”


레온하트의 HP중 1/3을 바치고.


“근원에게 간청한다. 내 기도에 응답을.”


소모한 HP에 비례해 막대한 근원 데미지를 묘지기에게 때려 박았다.


퍼엉!


폭음과 함께 묘지기가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당당히 다가가, 그로기 상태인 묘지기에게 내장 뽑기를 시전했다.


푸욱!


어둠 추출기가 묘지기의 가슴팍에 박혔다.

주르륵, 추출기의 실린더에 검은 액체와 기체 사이의 무언가가 차올랐다.


어둠이다. 본능이 속삭였다.

실린더의 10%가량 찬 어둠.


다시 말해 10번 내장 뽑기하면 다 찬다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로기에서 회복하려는 묘지기를 바라봤다.


“실험해보면 알겠지.”


생긋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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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64화 - 빛과 어둠(3) +3 20.11.02 410 10 13쪽
63 63화 - 빛과 어둠(2) +2 20.10.25 448 11 12쪽
62 62화 - 빛과 어둠(1) +1 20.10.24 447 13 13쪽
61 61화 - 전력 측정(4) +3 20.10.23 462 1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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